종교개혁은 끝났는가?
by R. C. Sproul2019-03-07

이 글의 주제에 대해서는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개진해 왔다. 그중 한 사람은 이렇게 설명했다. “루터의 주장이 16세기 당시에는 옳았지만, 지금은 칭의라는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게 다뤄질 사안이 아니다.” 또 자칭 복음주의자라고 일컫는 한 사람은 내가 참석했던 어느 컨퍼런스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이신칭의에 관한 16세기 종교개혁의 논쟁은 그리 중대한 사건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과장되고 말았다.” 그리고 매우 저명한 유럽의 한 신학자는 이신칭의 교리가 더 이상 교회에서 다뤄질 핵심적인 논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개신교인(프로테스탄트)이라고 분류되지만 실제로는 무엇에 저항(프로테스트)하고 있는지를 잊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 16세기의 권위 있는 개혁자들이 제시한 이신칭의에 대한 견해는 그 교리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오늘날의 입장과 사뭇 달랐다. 루터는 이신칭의 교리야말로 그에 따라 교회가 서고 넘어질 수 있는 조항이 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칼빈은 조금 다른 비유를 사용해서, 칭의란 모든 가르침이 움직이도록 돕는 경첩(hinge)과 같다고 했다. 또 20세기로 넘어와서 제임스 패커(J. I. Packer)는 이신칭의란 “다른 모든 교리를 어깨에 지고 있는 아틀라스[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논의 가운데 우리가 반드시 다뤄야 하는 질문은, ‘과연 16세기 이래로 역사의 어떤 측면이 변화되었는가?’이다. 아마도 지난 역사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의 측면에서 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긍정적인 측면이라면, 사람들이 훨씬 더 교양 있는 모습을 보이며 신학적인 논쟁에서도 관용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더 이상 교리에 대한 입장 차이로 누군가가 화형이나 고문을 당하는 광경을 보지 않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대속적인 죽음 및 성경의 영감성과 같은 정통 기독교의 주요 논제들에 대해 타협하지 않고 확고한 입장을 견지해 온 역사도 목격하게 되었다(이에 반해 수많은 자유주의적 개신교인들은 그러한 개별적인 교리들을 전부 부정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현재 로마 가톨릭교회가 낙태나 윤리 상대주의와 같은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그뿐 아니라 개신교를 대하는 입장에서도, 가령 19세기에 소집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인들을 “이단이며 분열주의자들”이라고 언급했지만, 20세기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분리되어 나간 형제들”이라고 부르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지난 역사에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정통 개신교가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교리들이 지속적으로 공포되어 온 것이다. 가령 마리아 교리(Mariology)에 관한 거의 모든 신조들이 지난 150년 동안 계속 선포되어 왔다. 교황 무오류(Papal Infallibility)에 관한 교리도 이미 형식화되기 이전부터 실재했으나,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러서는 공식적으로 정립되어 구원을 위한 믿음의 필수 조항으로 선언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교리문답이 발간됐는데, 이는 칭의 교리에 관한 트리엔트 공의회의 정의를 담고 있어 그 자체로 종교개혁이 주창한 이신칭의에 대한 극심한 반감을 보여 주고 있다. 즉 트리엔트 공의회의 입장을 재천명함에 따라 연옥(purgatory), 면죄(indulgences), 공로주의(the treasury of merits) 등 로마 가톨릭교회의 필수적인 가르침이 함께 선언된 것이다.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은 이신칭의 교리의 지속적인 적실성에 관한 주제로 여러 탁월한 신학자들과 논의하며 이런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1세기 당시의 복음을 하찮게 만든 최근의 변화는 무엇인가?” 분명 칭의에 관한 논쟁은 전체 성경 진리의 한 부분에만 국한될 수 있는 전문적인 관심사가 아니었다. 또 별로 중대하지도 않은 문제가 과장되어 다뤄지게 된 사안도 아니었다. 오히려 칭의는 처음부터 심각하게 다뤄질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 노출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중대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복음의 핵심에 직결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선언한 내용을 인정하여, 하나님이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거나 혹은 의롭지 않다고 하시는 데 필요한 근거는 그 사람 안에 있는 ‘내재적 의’(inherent righteousness)라고 하는 주장을 계속해서 고수한다. 그렇기에 만일 어떤 사람 안에 의가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지옥으로 가거나 아니면 다행스럽게도 연옥에 가서 남아있는 부정을 정화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경적인 관점에서 칭의를 이해하고자 하는 개신교의 입장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유일한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라고 가르친다. 또 이는 신자들에게 전가되는 의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지는 순간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이 그 사람에게 속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우리 안에 있는 의인가, 아니면 루터의 표현대로 우리 밖에 있는 ‘외부적인 의’(an alien righteousness), 즉 우리와 떨어져 있는 타자(他者)이신 그리스도의 의인가 하는 문제이다. 16세기부터 오늘날까지 로마 가톨릭교회도 칭의란 믿음, 그리스도, 은혜에 근거해 있다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칭의가 오직 그리스도에 근거해 있고, 오직 믿음을 통해 얻게 되며, 오직 은혜에 의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구원의 여부를 결정지을 만큼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의로우신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이 직면하는 문제 중에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신칭의라는 성경의 교리를 비난했을 때, 사실상 그들은—기독교 정통성을 대변하는 다른 교리들을 인정했다고 하더라도—결국 복음을 부인하고 적법한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구원에 관한 성경의 교리를 계속해서 거부하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정통 교회로 옹호한다면, 이는 크나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신학적인 대립이 그저 정치적인 문제로 간주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때에 실제로는 화합되지 않은 양측 간의 입장에서 화합을 말하는 태도는 복음의 핵심과 정수에 반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Is the Reformation Over?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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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R. C. Sproul

R. C. 스프로울 박사는 Ligonier Ministries를 설립했으며, 플로리다 주 샌포드 시에 위치한 Saint Andrew’s Chapel의 창립목사로, Roformation Bible College의 초대총장으로 봉직했다. 평생 동안 ‘하나님의 거룩성’(The Holiness of God)을 비롯하여 백여 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