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에 유익한 양식을 섭취하고 있는가?
by David Mathis2019-05-02

유기농 계란인가? 방목한 젖소에서 짠 우유인가? 우리는 매일 섭취하는 음식이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따져보며 살아간다. 닭과 젖소에 주입한 호르몬이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을까? 과연 유전자 조작 식품(GMO)이 몸에 무해할까?


이러한 질문이 때로는 과도하게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분별력 있는 소비자로서 품게 되는 정당한 고민을 반영한다. 특히 우리 자신을 위한 식료품만이 아니라 아이들까지 먹는 음식을 고를 때는 더 신중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몸의 건강을 위해서도 그 나름의 고민이 필요하다면, 우리가 섭취하는 영적 양식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주의를 기울어야 할까?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매주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에 앉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아 먹는 그 말씀이 영적으로 나를 건강하게 할 양식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양식이 장기적으로 내 영혼에 끼칠 영향은 어떠할까? 내가 이 가르침을 계속해서 받아 먹으면, 나의 영혼은 건강해 질까? 아니면 처음부터 현명한 선택을 해야 했다며, 나중에 후회하게 될까?


구체적으로 말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규칙적으로 섭취하고 있는 신앙의 모든 양식들, 가령 주일 설교만이 아니라, 아침에 묵상하는 QT 자료, 수시로 접하는 기독교 서적과 팟캐스트 및 소셜 미디어, 심지어는 일상생활에서 나누는 영적 대화가 건강에 유익한지를 분별해야 한다. 그냥 우리 모두가 평생 읽어야 할 성경책이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영혼에 유익하다는 식의 답변 말고, 우리 자신이 현재 섭취하고 있는 여러 가지 양식이 정말로 영양가가 있는지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교리나 가르침이 나의 건강에 유익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식별할 수 있는 지표나 결정 요인이 있을까? 다시 말해, 무엇이 건강에 유익한 가르침을 만드는지 판단할 수 있는 시금석이 있을까? 이런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0-11절에서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실제적인 지침을 전달하고 있다.


건강에 유익한 양식을 판별하는 기준


디모데전서 1장 10절 말미에 언급되는 표현, 즉 문자적으로 ‘건강에 유익한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가진 ‘바른 교훈’(sound doctrine)이라는 어구는 목회 서신인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에서 사용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여기서 좋은 교리와 나쁜 교리, 또는 건강에 이로운 교리와 해로운 교리를 날카롭게 대조하고 있다. 즉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가져다주는 가르침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가르침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거짓된 가르침은 영혼의 질병을 낳는 반면(딤전 1:3; 6:3-4), 진실한 가르침은 장기적인 건강을 허락한다(딤후 4:3-4; 딛 1:9; 2:1). 우리가 이 ‘바른 교훈’을 처음으로 언급하는 디모데전서 1장 10절에서 주목해야 할 내용은 ‘과연 무엇이 건강에 유익한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가’ 하는 부분이다.


바울은 바른 교훈이 다름 아닌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른다]”라고 밝힌다(딤전 1:10-11).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단순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자 정수이며 근본적인 원리는 바로 복음이다. 바울이 언급한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 즉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라는 메시지가 그 기쁜 소식이며, 이는 우리가 전해야 할 말씀의 요체이다. 따라서 진실한 가르침은 바로 그 복음을 설명하고, 강조하며, 부연하는 반면, 거짓된 가르침은 그 메시지를 희미하고, 불분명하며, 애매하게 취급한다.


하나님은 역사의 정점에서 그 아들을 보내셔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인을 구원하셨다. 그리고 그 아들이 보좌에 올라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가 되게 하셨다.바로 이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메시지가 우리가 가진 신앙의 중심이 되는 복음이다. 이 기쁜 소식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왜 창조하셨는지에 대한 이유가 담겨 있다. 그리고 모든 크리스천이 믿고 고백하는 내용 또한 바로 그 소식과 관련되어 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처럼 우리가 생각하기에 흥미롭고 편안한 사실만이 아니라, 죄와 거룩한 진노와 영원한 지옥 형벌처럼 어둡고 난해하며 불안한 내용도 포함된다.


바울이 강조하듯, 바른 교훈이란 이러한 복음을 따르는 가르침이다. 즉 기독교 교리는 성경의 특정 본문으로부터 세부적인 방향성을 확보하는데, 이때 그리스도인의 건강한 삶을 낳는 가르침이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삼게 된다. 따라서 그분의 인격과 사역을 설명하고, 뒷받침하며, 명료하게 드러낼 뿐 아니라, 그러한 복음을 통일된 주제로 삼아 형성된 가르침이야말로 우리의 영적 건강에 유익한 양식이다. 따라서 어떤 양식을 섭취할 때 그 영양 정보를 확인할 수 없거든, 복음이라는 시금석을 사용해 봐야 한다.


건강에 유익한 양식이 가져다주는 효과


이렇게 ‘복음’을 언급했으니 다 끝난 것처럼 글을 맺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바울은 건강한 가르침이 복음을 따르는 가르침이라고 분명히 밝혔지만, 단순히 복음만 언급하지 않고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the gospel of the glory of the blessed God)이라고 하며 수식어구를 함께 사용했다. 우리는 이런 표현을 대할 때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수식어구는 과연 무엇이 복음을 좋은 소식이 되게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이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라는 어구는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어구는 바울이 어쩌다가 한번 언급한 표현이 아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주요 개념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 개념이란, 우리가 흔히 듣고 말하지만 그 의미를 놓치기는 쉬운 ‘복음’과 ‘영광’과 ‘복되다’라는 개념이다.


먼저 ‘복음’은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 하나님이 그 아들에 대한 믿음을 통해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신다는 좋은 소식이다. 우리가 가진 신앙의 핵심에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 있다. 거기에는 좋은 충고가 아니라 좋은 소식이 있다.


이어서 ‘영광’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혹은 그분의 무한한 가치와 존귀가 가시적으로 드러난 상태를 일컫는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의 위대하심을 세상에 보여 주기 위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내용을 함축한다(특히 창세기 1장 27절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표현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눈으로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이 피조 세계에서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은 바로 우리에게 자신의 영광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즉 에베소서 1장 6절에서 말하는 “은혜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이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가장 선명하고 밝게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복되다’라는 표현은 여기서 그 개념을 파악하기가 가장 까다로운 단어이다. ‘복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가 도대체 무엇일까?


여기서 ‘복되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이 경배 받기에 합당하셔서 우리가 찬양으로 그분을 복되게 여겨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물론 그렇게 해야 하지만,이 문맥에서 그 단어는 하나님을 수식하는 표현으로서 그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시지만, 그분의 존재가 복되다는 표현은 그 이전에 그분 자신이 ‘행복한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분은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완전한 상태에서 무한한 행복을 누리신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그분은 바로 이 행복을 소유하셨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무한히 행복한 존재이시다.


최근에 프레드 샌더스(Fred Sanders)는 ‘하나님의 복되심’(the blessedness of God)에 관한 강의를 시작하며 디모데전서 1장 11절을 다루었는데, 이때 하나님의 복되심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복음은 바로 이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소식이다. 이 소식은 그분의 본질을 영광 가운데 드러내며 복되심 가운데 증언한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인류를 주권적으로 구원하는 분이실 뿐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영광 가운데 그 존귀한 모습을 펼쳐 내는 왕이시며, 더 나아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신성의 깊은 영역에서 그보다 더 행복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상태로 존재하는 분이시다. 과연 하나님은 복되시다.”


이 하나님의 복되심, 즉 그분의 영광 가운데 실재하는 거룩한 행복이 우리가 소망하는 영원한 행복의 토대가 된다. 흔히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듯, 하나님은 우리의 즐거움을 앗아가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좌절하거나 우울해 하거나 불만으로 가득하거나 차가운 마음을 지닌 분이 아니시다. 결코 아니다. 그분은 복되시다. 바로 그 존재에서 향유되는 무한한 행복을 우리와 나누는 분이시다.


이 무한하게 행복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대로 창조와 구속 사역을 통해 스스로의 무한한 가치와 위엄을 공적으로 드러내셨는데, 이를 그분의 ‘영광’이라고 부른다. 그 영광은 자기 백성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그분의 아들이 희생당할 때 가장 충만하게 드러났으니, 우리는 이를 ‘복음’이라고 부른다. 태생부터 위법자들이었던 우리에게 이는 얼마나 좋은 소식인가!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 더할 수 없이 영광스러우시며, 더 나아가 그 영광 가운데 ‘행복’한 존재로 계신다는 사실은 가히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집안에서는 부모가 행복하면 온 가정이 행복해진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집”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딤전 3:15)에서 그분이 행복하시다면, 우리 역시 그 행복을 누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바로 이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야말로 우리 건강에 유익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Am I Sitting Under Healthy Preaching?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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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David Mathis

데이비드 마티스는 desiringGod.org의 주필이며,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Cities Church의 목사이다. '은혜받는 습관'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