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예기치 못한 선물
by Vaneetha Rendall Risner2019-04-25

기다림은 때때로 고통으로 다가온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확실히 모를 때 기다리는 일이 가장 어렵다. 나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지만, 동시에 최악의 결과를 대비하고 있다.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는 보증이 있으면 기다리는 일은 훨씬 쉬울 것이다. 혹은 적어도 붙들고 있으라는 하나님의 약속이나 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어떤 확신이 있다면 기다리는 일이 훨씬 쉬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기다리고 있을 때 종종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이 내 기도에 대답을 하실 것인지 나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래서 마치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시편 13편 1-2절을 읽고 또 읽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 13:1-2).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는 이 질문을 수없이 했었다. 하나님이 내 기도에 결국 ‘알겠다’라고 대답하실 것임을 내가 안다면 아마도 좀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보증이 없다면, ‘기다리라’는 말보다 ‘아니다’는 말이 더 편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하실 때


몇 해 전에 나는 고뇌의 기다림 중에 내게 도움이 될 약속을 발견할 성경 말씀을 찾아보았다. 궁극적으로 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다고 보증하는 말씀을 찾기 원했다. 어떤 것이든 내가 매달릴 수 있는 그런 말씀을 원했다. 그런 말씀을 발견하기를 기다리면서,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20-21)를 읽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사모하지만, 이 구절은 종종 나를 화나게 했다. 물론 아브라함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직접 말씀을 받았다. 만일 내게 대답하시겠다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약속을 받았다면, 나도 기꺼이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결국 그가 원하는 것을 얻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었다. 나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것처럼 내게 약속해 주시기를 원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어떤 사인을 주시기를 계속 구했다.


아무 것도 오지 않았다. 아무 성경 구절도 찾을 수 없었다. 아무 확증도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그냥 침묵만 있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대답은 ‘아니다’였다.


처음에는 불공평해 보였다. 그리고 무의미해 보였다. 나는 낭비한 오랜 세월의 의미를 찾으려고 분투했다. 내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갔지만 왠지 나는 선물을 더 적게 받았다고 느꼈다. 나는 한동안 내 마음을 접었다. 이것을 계속 생각하는 일은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로마서의 그 구절을 읽을 때마다 그것은 나를 아프게 했다. 하나님은 왜 처음부터 대답을 하시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신실함과 아브라함의 기다림


몇 해 전 개인 큐티 시간에 로마서를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로마서 4장을 읽기를 주저했다. 이전에 내가 기도하며 기다리던 때를 고통스럽게 다시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을 잘 알지 못하는 느낌이 들어 창세기에 나타난 그의 생애를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때로 어떻게 의심했는지를 통해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하갈을 통하여 자기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그는 하나님이 그의 도움과 독창성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아브라함의 생각에 일말의 동의가 되었다. 인내하지 못함으로 분투하는 아브라함의 입장이 모두 내게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아주 여러 번 하나님이 그분의 계획을 이루시도록 도우려고 했다. 물론 그 계획은 내가 원하는 계획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기를 바라는 계획이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아브라함이 기다리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일을 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성격을 다듬으시고, 그에게 인내를 가르치시며, 그와 친구 관계를 세워가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친밀하게 알게 된 때는 25 년의 기다림이 있은 후였다. 낭비한 세월 같아 보였지만 그동안 하나님은 그를 변화시켰다. 수십 년의 기다림 끝에, 아브라함이 약속의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을 받았을 때, 그의 믿음을 시험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아들은 그가 기다렸던 아들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알았다. 이전에는 내가 왜 이것을 인식하지 못했을까? 아브라함의 신앙은 후손에 대한 약속에 근거하고 있지 않았다. 그랬다면, 그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여러해 전에 그에게 약속하셨던 것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삭을 놓지 않고 아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오래 기다린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이었다.


하나님의 약속 성취는 아브라함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달려있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그분의 약속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은 필요하다면 이삭이 제물로 희생을 당했더라도 다시 살아나게 하실 수도 있는 분이다(히 11:19). 따라서 궁극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함에 놓여 있었다.


가장 고귀한 대답, ‘기다려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에만 놓여 있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약속하신 분에게 근거하고 있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이 그를 위해 무엇을 하실 것인가에 있지 않고 약속의 주체이신 하나님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위험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는 특정한 결과에 매달리고 있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매달려 있었다. 아브라함의 기다림은 그의 믿음을 강화시켰다. 하나님은 그분의 방식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아브라함은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실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이제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이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 약속을 충분히 인식하게 되자, 나는 기다림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마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다리게 하신 똑같은 이유로 나와 당신을 기다리게 하고 계실 것이다.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그분의 음성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신뢰를 단단히 하기 위하여, 사역을 준비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그분을 닮도록 변화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게 하신다.


다시 살펴보면, ‘기다리라’는 대답은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대답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결과에 매달리기 보다는 하나님께 매달리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게 필요한 것을 아시지만 나는 모른다. 그분은 내 미래를 알고 계시지만 나는 알 수 없다. 그분의 관점은 영원하지만 나의 관점은 한정적이다. 그분은 내게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알맞은 때에 주실 것이다. 폴 트립(Paul Tripp)이 말했듯이, “기다림은 기다림의 끝에 내가 무엇을 얻을지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기다리면서 내가 어떤 모습이 되어 가느냐에 관한 것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The Unwelcome Gift of Waiting

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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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Vaneetha Rendall Risner

베니다 렌달 라이즈너는 자유 기고가이다. Desiring God과 Today’s Christian Woman의 정기 기고자이며, 'The Scars That Have Shaped Me'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