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는 설교용 예화가 아니다
by Greg Lanier2019-04-22

“설교할 때 예화를 더 넣으세요.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예수님도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게끔 비유로 말씀하셨으니까요.”


몇 년 전 다른 목사로부터 받은 설교 피드백이다. 내가 예화를 많이 쓰지 않는다는 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그가 예수님에 대해 그렇게 주장한 근거가 무엇인지 몰라 잠시 당황스러웠다. 예수님은 정말 사람들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셨을까?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안에 바로 이 질문이 들어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모르면 다른 비유도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며(막 4:13),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사람들이 쉽게 알아듣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듣더라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그들이 회개하거나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신다.   


이 어려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예수님의 의도


마태복음 13장 1-23절, 마가복음 4장 1-20절, 그리고 누가복음 8장 1-15절에 모두 나오는 이 비유는 예수님이 드신 비유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곧이어 설명하시듯, 이 비유는 각기 다른 마음의 상태에 씨(“말씀”)가 떨어졌을 때 어떤 결과가 따라오는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길 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사단”)이 먹어버리고, 돌밭에서 싹을 틔운 씨는 해(“환난과 박해”)가 돋은 후 말라버리며, 가시떨기 사이에 떨어진 씨는 기운이 막혀(“세상의 염려”) 결실을 맺지 못하지만,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풍성하게 결실한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곧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언급하셨다는 사실이다(마 13:23). 


예수님은 비유를 그곳에 모인 무리에게 말씀하시고 또 따로 제자들에게도 말씀해주신다(마 13:10). 하지만 예수님이 들려 주신 설명은 오랫동안 성경 독자들을 어리둥절케 해 왔다. 


세 복음서 기록자들(마태, 마가, 누가)은 이 비유를 약간 다르게 묘사하지만 다음의 두 가지 핵심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동일한 가르침을 전한다:  


• 이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스러움/신비”이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각 복음서에 나온 이 비유가 동일하게 내포하는 바는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다.

  

• 비유는 놀라운 역할을 수행한다. 왜 비유로 이야기하는지를 설명하실 때, 예수님은 “사람들이 재미있는 예화를 좋아하니까” 또는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이라는 이유를 들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이유는 오히려 거의 정반대다. 마태 그리고 마가와 누가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는데, 마태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기록한 반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도록”이라고 쓰여져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태복음의 기록이 상대적으로 덜 가혹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태의 긴 설명을 읽어보면, 비유의 목적은 마가복음과 마찬가지로 결국 듣는 자들이 돌이켜 죄 사함을 얻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해,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어떤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듣기도” 하고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도” 하지만 진실로 “듣고 보는” 것은 불가능하게 하여 궁극적으로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 우리를 불안케 하는 긴장이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결국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인가?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사람들을 내치시는 것인가?   


비유의 결과


예수님의 말씀을 푸는 열쇠는 텍스트 안에 묘사된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는 직접적으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암시적으로 자신이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고 계심을 드러내신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이사야가 부름받던 그 장면에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렇게 명하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사 6:9-10)


세 복음서의 기자는 이 명령을 조금씩 달리 표현하지만 기본적인 의미는 같다. 일견 가혹해보이는 예수님의 “하지 못하도록” 이라는 말씀은 이사야의 예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환상을 보았고 이스라엘을 향해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에 따라 그는 많은 이들에 대한 임박한 심판과 남은 자의 회복을 선포하는 데에 자신의 삶을 드렸다. 하지만 처음부터 하나님은 이사야의 선포가 그 자신의 기대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말씀해 주셨다. 즉, 이사야의 선포를 들은 이들 중의 일부는 하나님에 대해 덜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무뎌져서 결국 그분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될 것임을 알려주셨다.


실제로 이사야의 사역을 통해 어떤 이들 안에는 믿음이 생겼으나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던 다른 이들의 마음은 오히려 더욱 완악해져 버렸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사야의 예언 사역이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 가운데 이스라엘 안에서 회개하는 자와 회개치 않는 자를 나누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사야의 부르심에 관한 구절을 직접 그 입술을 통해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의 사역 역시 동일한 결과를 가져올 것임을 미리 알려주신 것과 같다. 


그렇다면 왜 비유를 사용하셨을까?


비유의 참 목적


예수님이 왜 비유를 사용하여 말씀하시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비유라는 단어 자체를 살펴보는 것이다. “비유(parable)”는 영어에서 문자적 의미, 도덕적 의미 등 여러 측면의 뜻이 내재된 짤막한 이야기를 가리키는 비교적 친숙한 단어이다. 그러나 그리스어나 히브리어에서는 비유가 이야기, 수수께끼, 잠언 등의 다양한 장르를 포괄하며, 복음서에서도 역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들의 사역에서 비유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시편 78장 2-4절에서는 선지자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라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라고 명하셨을 때(겔21:7), 에스겔은 “아하 주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비유로 말하는 자가 아니냐 하나이다”(겔 21:4)라며 불평한다.  


선지자들은 각종 비유를 사용하여 진리를 감추거나 드러내었고, 이로 인해 듣는 이들이 자신에게 임할 심판을 깨달아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이끌었다.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신 정확한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자신이 선지자로서(마 13:57; 눅 13:33) 이사야가 보여준 예언 사역을 계속하는 것이며 심지어 그 사역을 극치에 이르게 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처럼 예수님도 비유를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셨고, 죄에 대한 깨달음을 촉구하시며,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이끄셨으나, 그에게 완악해져 있던 이들에게서는 정반대의 결과가 초래되었다.  


좋은 땅처럼 마음이 잘 준비되어 있는 이들, 즉 들을 귀가 있는 이들(마 13:9)은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비유에 녹아 있는 영광스러운 단순함과 심오한 진리 안에서 기쁨을 누린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하셨다(마 13:11).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완악해져 있는 이들에게 비유란 그저 농업, 포도원, 그물, 땅, 여행 또는 연회 따위에 대한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한 자들에게 비유는 불분명하고, 베일에 가려져 있으며, 심지어 기이하게 보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복음마저도 그렇게 보이게 된다. 


유심히 살펴보면 우리는 예수님이 일부러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분의 비유는 복음과 그것이 요구하는 바를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성경 다른 곳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듯이, 복음을 듣고 나면 어떤 이들의 마음은 부드러워지나 어떤 이들의 마음은 완악해진다. 사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부드럽게 함과 완악케 함의 비밀을 통해 전진한다.  


요한복음 12장 40절은 이사야 6장 9-10절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말씀을 믿지 못했는가를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28장 24절도 이사야 6장 9-10절에 기대어 바울의 사역 결과를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라고 묘사한다(비교. 행 28:26-27). 이러한 극명한 결과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바로 십자가 사역이다. 마음이 완악해진 자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로 몰았으나, 그 십자가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이들에게 그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신비 


요약하자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담겨있는 신학,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요한의 묘사, 그리고 자신의 사역을 이사야의 사역에 빗대어 묘사한 바울의 말에 담겨있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즉, 구원에 있어서 여호와의 주권은 때로 우리를 어리둥절케 하기도 하나 궁극적으로는 그분 자신께 영광이 되도록 실행된다는 것이다. 


복음의 씨앗은 값없이 그리고 사랑으로 모든 이들에게 뿌려질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토양의 질이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그 토양의 질을 준비시키셔서 씨앗이 뿌리내리고 많은 회개와 죄 사함의 열매를 맺도록 하실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설교자는 자유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그저 신실하게 씨를 뿌린 후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죄악된 마음을 당신의 주권적 뜻에 의해 변화시켜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면 되기 때문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Jesus’s Parables Are Not Heartwarming Sermon Illustrations

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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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Greg Lanier

그렉 래니어(PhD, Cambridge).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Orlando, Florida)의 부교수로, 그리고 River Oaks Church(PCA)의 부목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