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이 교회를 변화시킨 네 가지 방식
by Alex Duke2019-04-16

마틴 루터의 유산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제각각이다. 많은 이들이 행위를 쌓아 의로움을 얻는다는 공로주의의 심장에 치명타를 가한 독일 종교개혁자인 그를 역사적, 신학적 영웅으로 칭송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루터를 거만한 자아도취적 반(反)유대주의자로 비판한다. 여전히 어떤 이들은 루터를 인문주의자 중의 인문주의자요, 교조주의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차가운 손아귀에서 개인의 자유와 이성을 해방시킨 21세기형 인간으로 지지한다. 


한 사람에 대한 이런 다채로운 반응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예를 들자면 나치, 미국 남침례교 복음주의자들, 자유주의 역사가들 등—이 오백여 년에 걸쳐 믿거나 말거나 식의 성인전(hagiography: 주인공을 성인 취급하는 전기문—역자주)을 써내는 동안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지성사를 논한 근사한 책인 '종교개혁자들이 신학'(Timothy George, Theology of the Reformers​)와 '충족시킬수 없는 불꽃'(Michael Reeves, The Unquenchable Flame​)을 보면 루터와 그와 함께했던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이 교회사의 흐름을 바꿔놓았음을 잘 보여준다. 


어떻게 바뀌었을까? 네 가지 방면에서 바뀌었다. 


1. 일반 신자들을 억누르던 교회의 엘리트주의를 무력화시켰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회법에 대해 반감이 있던 이들을 언제든 파문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의미로 “지키지 않으면 저주가 있을 뿐”이라는 말을 늘 사용했었다. 종교개혁 이전의 16세기 교회 미사는 아무런 생각 없이 행해지는 잡일 같았고, 사제의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은혜의 물방울을 무조건 받아 모아야 했던 일종의 정치적 요구 조건이었다. 미사는 대부분이 알아듣지도 못하던 라틴어로 된 웅얼거림이었다. 성만찬 역시 사제가 혼란스럽고도 난해한 야단법석을 떨면서 빵과 포도주를 소위 모두를 교화시킬 수 있다는 살과 피로 성변화(聖變化)시킨다는 원맨쇼였다.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그리고 이후의 개혁자들 모두 문제를 직시했다. 그들에게 칭의는 삼위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택하셨기에 그에게 단번에 주어지는 결코 뒤집을 수 없는 판결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갈보리에서 그리스도가 완전히 마무리 지은 사역을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전적으로 주어지는 '외부적 의'가 크리스천에게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바로 이 깨달음이 아주 조금씩 '점진적으로만' 이루어진다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칭의에 대한 가르침을 뒤엎었다.


완전히 구체화된 루터의 구원론은 치열한 성경 연구 후에 나왔다. 다시 말해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 '오직 믿음'(sola fide)을 이끌어낸 것이다. 종교개혁의 신학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루터의 글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츠빙글리 역시 유사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1519년 1월 1일, 로마 가톨릭의 사제였던 츠빙글리는 전통적으로 해오던 라틴어 성구집을 없애고 자신의 모국어로 신약 전체를 강해해나가기 시작했다. 


1525년까지 츠빙글리는 신약 전체에 대한 강해를 마쳤고 구약 강해를 시작했다. 그 사이에 그는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교황과 종교회의에 부여된 권위에 도전했을 뿐 아니라 취리히에서 미사를 폐지함으로써 그곳을 사상 최초의 관료후원적 개신교 행정구역으로 만들었다. 비슷한 시기에 루터는 자기 민족을 위해 구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1534년에 출판하였다. 이 모든 것이 사람들이 이해할 뿐 아니라 반응할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이 유럽 교회의 지평을 바꾸었고 오늘날의 개신교가 시작되는 길을 닦았다. 교인들은 이제 더 이상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지적으로, 또한 다른 여러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은 것이다. 이전에는 교회에 그저 수직적 관계만 존재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으로 인해, 들불처럼 번져가는 교회의 변화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2. 목사의 직분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회복되었다


종교개혁은 '목사'나 '사제'가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경적 그림을 회복시켰다. 사제들이 자기 자신도 이해 못하면서 그저 뭔가를 하는 시늉이나 내는 날들이 종말을 고한 것이다. 이제는 그 자리에 목사들이 섰으나 그들은 중보자로서가 아니라 회중의 마음과 뜻이 예수 그리스도께 고정되도록 돕는 임무를 부여받은 자로 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 사이를 잇는 유일한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신실한 목사들이라면 은혜를 나누어준다거나 구원의 효력을 발생시키게 해준다는 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목사들에게서 은혜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사들은 그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수 있는 다함이 없는 부요함을 가리키는 화살표일 뿐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는 양날의 검이다. 분명히 맞는 방향이긴 하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제는 중보자를 잃어버린 것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제가 중보해주지 않는다면 누가 한단 말인가? 종교개혁은 크리스천들이 예외 없이 모두 절박한 상황 속에 있음을 강조했다. 이전에 사람들은 경건한 척 위선을 떨거나 성례라는 의식 뒤에 숨는 것으로 자신들의 절박함을 감췄지만 이제는 밝히 드러난 것이다. 의심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루터 역시 오랫동안 영혼을 뒤트는 듯한 의심으로 괴로워했음을 다시금 인식한다.


3. 성례가 신자들에게 회복되고 정교 분리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가장 명백한 변화는 세례와 성만찬, 즉 성례에서 일어났다. 유아세례는 가톨릭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성례 중 하나였다. 루터, 츠빙글리, 칼빈, 그리고 그들과 함께 했던 동시대 개혁자들 모두 신학적으로 유아세례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의견의 불일치가 많았는데, 왜 유아세례에 대해서는 모두 의견이 같았을까?


다양한 층위의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메노 시몬스(Menno Simons,네덜란드의 종교개혁자이자 메노나이트교회의 창시자-역주)나 재세례파(Anabaptists)처럼 유아세례에 반대한 개혁자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추측을 해보는 수 밖에 없다.


가능성 있는 이유 하나는, 단순히 말해, 루터, 칼빈, 그리고 나머지 개혁자들은 국가로부터 독립된 교회를 상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정교일치의 뿌리가 너무도 깊었기에 루터는 심지어 교회는 '하나님의 오른손'이요 국가는 '하나님의 왼손'이라 표현하기까지 했다. 메노나이트나 분리주의 재세례파들은 지나치게 나아가 교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세례를 추구했지만, 그들은 오늘날 신자세례(credobaptist, 자기의 신앙고백이 있는 사람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파, believer's baptism이라고도 한다-역주)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종교개혁이 신자세례를 보편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세례가 논의될 수 있는 배경을 제공했다.   

 

4. 신학적 다양함 속에서도 일치됨을 추구하는 협력을 위한 길을 닦았다


종교개혁 내내 가장 첨예한 의견 대립을 초래한 것은 성만찬이었다.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떨어져나온 개혁자들은 이제 각각 서로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루터는 화체설을 형이상학적 신비주의라며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공재설'(consubstantiation)이라 불리는 신학적 중간지점을 주장했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form)과 '우유성'(偶有性, accidents—비본질적 성질 [역주])에 기반한 생각이었다. 루터는 성만찬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형상이 빵과 포도주의 우유성(偶有性) '안에,' 우유성과 '함께,' 그리고 우유성 '밑에' 임한다고 주장했다. 칼빈의 경우 로마 가톨릭과 루터의 견해 모두를 형이상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칼빈은 성만찬시에 그리스도께서 임하시되 영적으로만 임하신다는 '영적 임재설'을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더 나아가 '기념설'을 주장했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고 그때까지 우리는 그의 임재의 유익을 거둘 뿐이라고 하였다. 

 

루터는 츠빙글리의 주장을 거의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것으로 치부했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육적인 임재를 부정하는 것은 그의 무소부재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불일치가 중대한 국면을 맞은 것은 헤세(Hesse)주의 영주인 필립의 요청으로 1529년 10월 루터와 츠빙글리가 만나 교황과 그의 군사적 압박에 대항해 개신교 연맹을 조직하고자 했을 때였다. 둘이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연맹이 조직되지 못했던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의 신학적 말싸움은 근시안적인 것처럼 보인다. 산적한 문제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이 개신교 대표 주자 두 명은 미세한 신학적 차이를 극복하고 연합 군사전선을 조직할 수 없었을까?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만찬에 대한 종교개혁의 재해석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전적인 의견 일치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매우 자명했다. 성만찬 자체가 은혜를 수여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권한에 속한 일이다. 또 다른 성례인 세례도 마찬가지다.신자세례에 대한 초석이 메노 시몬스와 재세례파에 의해 다져졌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달리, 유아세례 자체는 은혜를 수여하지도 구원을 부여하지도 못한다. 그 누구도 단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영적인 특혜를 누릴 수 없다. 


마찬가지로 누구도 영적인 특권에서 제외된 채 태어나지 않는다. 종교개혁이 분명히 가르치듯 골고다 땅은 평평하여 누구도 편애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개신교인과 가톨릭교인, 반유대주의자와 복음주의 남침례교인, 독일인과 프랑스인, 자유주의 역사가, 그리고 신학교 신입생, 즉 구주께서 주시는 외부적 의가 필요한 불의한 모든 사람을 위해서 흘리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4 Ways the Reformation Changed the Church

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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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Alex Duke

알렉스 듀크는 9Marks의 총괄 에디터이다. 그는 켄터키주 루이스빌에 위치한 Third Avenue Baptist Church에서 청소년 담당 사역자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