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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없는 창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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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Matthew Miller  /  작성일 2019-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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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eatone on Pixabay
유대인 후손이 아니라면, 당신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이교도의 후손일 것이다. 당신의 족보를 추적해 보면, 쥬피터(Jupiter), 머큐리(Mercury), 그리고 아폴로(Apollo)를 숭배했던 로마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투타티스(Toutatis), 에수스(Esus)나 인간 희생 제사를 했던 타라니스(Taranis)를 숭배했던 켈트족이었을지도, 오딘(Odin)과 토르(Thor)를 숭배한 스칸디나비아인이었을지도, 또 둔다리(Doondari)와 시다 마툰다(Shida Matunda)를 숭배했던 아프리카인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러가지를 나열해 봐도 그것은 수많은 이방인들이 섬겼던 많은 신들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교도인 우리 조상들은 바울이 성경에서 "육체로는 이방인"이라고 불렀던, "이 세상에 하나님이 없으며"라 말했고, 또 그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던 사람들이 분명하다(엡 2:11,12,17).

성경 속 ‘복음’의 메시지를 이교도인 우리 조상들이 처음 들었을 때, 전혀 다른 종류의 구원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더욱이 완전히 새로운 창조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창세기의 첫 두 장이 강조하듯 하나님이 ‘무로부터’(ex nihilo) 창조했다는 사실로 이교도들이 갖고 있는 신화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란 것을 느꼈을 것이다. 매우 중요하지만 그에 비해 덜 알려진 그 창조 이야기는 우리 조상들의 신화들과 비교할 때 놀라울 정도로 대조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이교들의 창조 신화는 창조 과정을 설명할 때, ‘갈등’을 추진력으로 사용하는 것이 보통인데, 성경 속 창조 이야기는 그 점에서 매우 대조적이다. 몇 가지 예를 생각해보자.

바벨론의 창조 서사인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에 따르면, 육지와 하늘이 없고 오로지 물만이 있었을 때, 담수 아프수(Apsu)와 바닷물 티아마트(Tiamat)가 생겼다. 그 두 종류의 물이 융합함으로 서로 갈등을 겪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신들의 가족이 태어났다. 그들의 후손 중 하나인 마르둑(Marduk)이 티아마트(Tiamat)와 대결했고, 마르둑의 화살이 티아마트를 반쪽으로 쪼개버렸다. 승리한 마르둑은 죽은 티아마트의 절반을 높이 올려서 하늘로 만들었고, 나머지 반으로 땅을 만들었다. 또 365일과 행성의 질서를 만든 마르둑은 신들이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인간을 만들어서 신을 섬기게 했다. 이런 ‘갈등과 투쟁’이 지금 우리가 아는 세상을 낳았다는 것이다. 

노르웨이 신화에 따르면, 반 신이며 반 거인인 오딘(Odin), 빌리(Vili), 그리고 베(Ve) 삼형제는 얼음과 불이 우연히 만나서 낳은 자웅동체 신인, 이미르(Imir)를 죽인다. 그들은 죽은 이미르를 벌어진 공간(Yawning Gap) 중앙으로 옮기고 그의 시체로부터 이 세상을 창조한다. 땅은 이미르의 살로, 그리고 산은 그의 뼈로 만들고, 이미르의 두개골을 높이 들어 하늘을 만든다. 이 창조 신화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죽음에서부터 시작된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태초에는 혼돈만이 있었지만 여러 신들이 태어나면서 창조 이야기를 담은 거대한 서사시가 시작된다. 그들의 사랑과 미움, 질투와 분노, 갈등과 속임수로부터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세상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삶의 ‘갈등’은 이 신들의 불안정성과 내분을 반영하는 것이다. 

몇몇 이교도의 창조 신화는 불확실성과 긴장감으로 끝난다. 예를 들어, 인도 북동부에 사는 미뇽(Minyong) 부족의 창조 신화는 지구와 하늘,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사는 인간과 동물의 세계를 보여준다. 지구(Sedi)와 하늘(Melo)이 결혼하기로 하는데, 그로 인해 지구와 하늘이 하나로 합쳐질 경우 그 가운데에서 부서지게 될 것을 두려워한 인간과 동물이 살아남기를 의논했다고 전해진다. 

마찬가지로 미국 남동부에서 가장 큰 인디안 부족인 체로키(Cherokee) 부족은 지구를 바다에 떠있는 커다란 섬으로 보았는데,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진 하늘 천장으로부터 내려온 코드가 섬의 중요한 네 군데 지점을 붙잡고 있어서 유지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구성은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인디언들은 세상이 오래되고 닳아 없어지면 사람들이 죽을 것이고, 줄이 끊어지면 지구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게 되어 다시 물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그 상황을 두려워한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 세상의 신화들은 ‘안식’이라는 마무리 대신 오히려 불안한 긴장감만이 맴돌게 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인다. 

왜 이처럼 시공간을 초월한 ‘갈등’이 이교도들의 창조 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일까? 이는 갈등이 우리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기억하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왜 삶이 이토록 불일치로 가득하고, 왜 역사가 칼부림을 통해서만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그리고 우리는 왜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항상 불안하고 갈대처럼 흔들리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이 이처럼 갈등으로 가득 찬 이유가 애초에 세상이 그렇게 존재하도록 창조된 것이라는 가정은 매우 합리적으로 보인다. 

다윈의 진화론이 가진 매력의 일부도 다름 아니라 이교도 창조 신화의 핵심인 ‘갈등’이라는 특징을 공유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자연 선택이라는 메카니즘으로 모든 생명 형태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흔히 ‘자연, 피로 붉게 물든 이빨과 발톱’으로 상징되는 진화론은 삶을 규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힘으로, 또 생명 자체의 근원으로 ‘갈등’을 꼽는다. 또 칼 마르크스(Karl Marx),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그리고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이제 갈등을 경제적, 심리적, 그리고 사회적 영역으로까지 확대함으로, 힘은 오로지 힘으로만 대응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성경의 창조 이야기가 타락한 인간의 귀에 얼마나 이상하게 들리겠는가? 복음이 우리 이교도 조상들에게 처음 소개되었을 때, 그들은 투쟁과 폭력, 그리고 죽음의 암시가 전혀 없이 창조된 하늘과 땅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주권적이고 비길 데 없는 하나님은 그의 아름답고 (심지어 시적이기도 한) 순차적이며 완전한 계획에 따라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긴장감이 드러나는 결말이 아니라 안식일에 쉼이 주는 만족스러운 ‘안정감’에서 그 절정을 이뤘다(창 2:1-3).

갈등이 없는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우리 이교도 조상들이 알고 있던 ‘갈등으로 가득한 신화’와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보인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C.S. 루이스가 언젠가 삼위일체의 증거로서 말했던 것을 생각나게 한다. “삼위일체는 인간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에 진실이다.” 창세기의 처음 두 장을 통해 그 창조 이야기를 들으면 루이스와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육지와 바다에서 초목, 천체, 바다 생물, 파충류, 포유 동물, 그리고 인간까지, 갈등의 흔적 없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타락해서 갈등으로 꽉 찬 인간이 오래 전에도, 또 오늘 날에도 결코 생각해낼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이며, 특별히 타락 전에 창조주가 이 세상에 증거를 심어 놓으셨기에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갈등과 투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성경에 따르면, 갈등과 투쟁은 창조 때문이 아니라 창조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 다음 사건, ‘인간의 타락’에 기인한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이교도 창조 신화의 한 페이지처럼 읽히지만, 그건 창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아담이 지은 죄의 여파와 관련이 있다. (이는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오로지 그 분을 통해서 세상이 만들어졌고, 그 분의 순종을 통해서만 생명과 구원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예표한다.) 이교 신화는 성경이 뚜렷하게 구분하는 창조와 타락을 시공간을 초월해서 마구 섞어 놓아버린 꼴이다. 

자, 그럼 이런 창조가 왜 중요할까? 타락한 세상에서 그 창조의 의미를 통해 우리의 하루하루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으로 이 글의 결론을 맺고자 한다. 

삶이 궁극적으로 갈등에 의해 움직인다고 하면, 생존과 성공은 그런 갈등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의 문제로, 얼마나 갈등에 강한 인간이 되는가에 달려있다. 위협에 대응하며, 상대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수없이 많은 잠재적인 결과들을 계산해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삶을 치닫게 되면 우리는 방어적이고, 실용적이며, 능수능란한 영이 자라나, 결국은 암묵적으로 권력을 숭상하게 되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대부분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고 또 이런 삶은 소모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삶이 궁극적으로 갈등이 아닌 초월적인 창조주에 의해서 형성된다면, 우리는 신앙과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조화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단 하나의 관심사만을 가지게 된다. 만약 그분이 우리를 대적하신다면, 우리가 만들거나 계획하는 그 어떤 피난처(금전, 군사, 정치, 인간관계)도 우리를 보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우리를 대항하는 그 어떤 무기도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할 것이라는 약속 안에서 우리는 안식할 수 있다(사 54:17). 다윗이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시 25:21)라고 기도했을 때, 그는 인간의 일을 관장하는 것은 밀물과 썰물같은 갈등이 아니라 의롭고 초월적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은혜 속에 주어진 경건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간구했지, 결코 자신의 지혜, 방패 또는 인간 관계를 찾지 않았다. 

갈등이 없는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우리 이교도 조상들이 들은 갈등으로 가득한 신화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그 결과를 그 분께 맡기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간다. 세상이 창조되던 바로 그 때처럼, 지금도 우리 삶에 궁극적인 결과를 만드는 주체는 혼돈과 갈등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만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다. 



원제: The Bible’s Conflict-Free Creation Story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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