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칼빈이 다시 발견한 성령
by Sinclair Ferguson2019-05-07

루터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에 비해 칼빈의 이야기는 덜 알려져 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라는 개념과 씨름했고, 그것을 미워하게 되었다. 그에 반해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향한 엄청난 갈증을 갖고 있었지만,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루터가 은혜로운 하나님을 찾았던 반면,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진실되고 확실한 지식을 추구했다는 게 전체 이야기라고 볼 수는 없지만, 거기에는 나름 일리가 있다.


루터의 경우, 중세 후기 가톨릭의 의식이 그에게 죄로 고통하는 양심에 평화를 주지 못했고 죄를 씻어내지도 못했다. 칼빈의 경우에는, 교회뿐 아니라 십대와 이십대 초반에 그가 보여 준 엄청난 지적 훈련과 중세 후기 인본주의 학문의 습득조차도 그를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로마서 1장 16절


이 두 사람의 배경, 교육, 기질 및 개성의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로마서 1장 16절 및 이후 구절이 이들의 회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우리는 루터가 로마서 1장 16-17절과 씨름한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 구절을 싫어했다. 그 구절 속에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다고 생각했다. 바울이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좋은 소식에 "하나님의 의"가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건지? 하나님의 의가 인간에게 하는 역할은 오로지 저주뿐이라고 루터는 강하게 느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기록했듯이, 그의 눈이 열렸다. 그는 로마서 구절을 읽는 동안은 눈이 멀어 있었다. 글자들을 보았지만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루터는 그 의가 죄인을 의롭게 만드는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을 알았다. 천국의 문은 열렸고 루터는 자신이 다시 태어났음을 느꼈다. 


칼빈은 로마서 1장 18절과 이후 구절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하나님이 드러내신 지식, 우리가 소유한 그분에 관한 지식, 그러나 억압하고 우상 숭배와 바꿔버림으로 결국 인류가 포기했지만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그 지식이 칼빈의 관심사였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마지막 라틴어 판(1559)의 번역자인 포드 루이스 배틀(Ford Lewis Battles)도 그렇게 생각했다. 칼빈 신학의 대의이자 그의 신학이 끊임없이 중점을 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을 아는 것이기에 나도 거기에 깊이 동의하는 바이다.


종교개혁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을 받으면 우리 대부분은 본능적으로 종교개혁은 의롭다하심, 칭의(justification)에 관한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또 혹자는 (나중에 만들어진 말인)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말씀(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과 같은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그것이 다가 아니다. 


이 다섯 가지 솔라(sola)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특히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솔라도 성령으로부터 분리된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성령은 이 각각의 솔라에 필수 조건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성령의 재발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벤자민 워필드(B.B. Warfield)의 그 유명한 말처럼 칼빈은 '성령 신학자'였다. 성령을 떠나서 믿음이 생길 수 없다. 우리는 은혜를 통해 구원 받고 견인되지만, 은혜가 우리 속에서 나온 무엇이 아니라 오로지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가 알게 되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허락하신 역사이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토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은 성령이 영감받은 인간을 통해서 쓰도록 하신 결과이다. 게다가 칼빈이 강조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런데 성령이 바로 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


그럼 도대체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루터 신학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성령에 관한 그의 신학도 별도의 주제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지는 않다. 그에 비해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통해서 좀 더 조직적으로 성령을 정리했다. 이 두 사람은 성령에 관해서 간결하고도 기념비적인 발견을 했다. 


성령의 재발견


수 세기에 걸쳐 교회는 점점 구원 역사에서 성령의 역할을 빼앗아 갔다. 그 사실은 성례를 통해 은혜와 구원이 개인에게 주어졌다고 가르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구원은 성례에 갇혀버렸고, 구원에 필요한 열쇠는 이제 신부들과 교회 관리자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그 결과는 신학적으로나 실재적으로 재앙이었다. 성령의 역할은 탈취되었고, 그의 권위는 사제직에 의해 격리되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참된 자녀로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탄생 권리, 용서의 확신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경험하는 대신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구원을 의심하고 불안하게 되었다. 과거 루터의 경우에서처럼, 그들은 성례의 도움을 통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배웠고, 그 결과 그들이 가진 믿음은 완전한 사랑에 걸맞게 그들도 완전해야만 의로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을 스스로 돕는 사람들을 돕는다"는 중세의 교리였다. 의롭게 된 사람들의 칭의는 다름 아닌 성례의 도움을 통해 의로워지는 칭의이다. 이 제도는 교회가 이런 칭의를 '은혜'로 인함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했지만, 이 은혜는 결코 '오로지 은혜로만'은 아니었다. 이 은혜는 성례라는 도움과 점진적 발전이 필요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게 "이 정도면 구원받기에 충분하다"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구원에 대해서 낙관할 수 없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이 지점이 바로 성령을 통해서 루터와 칼빈이 눈을 뜨게 된 지점이다. 칼빈이 즐겨 말했듯이 우리의 모든 구원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된다는 사실 말이다. 바로 여기서 성령이 역할을 한다.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굳어진 마음을 녹이고 그래서 우리를 가까이 불러 구원의 믿음에 반응하도록 한다. 


루터가 자신이 거듭났다고 또 "천국의 문이 완전히 열렸다"라고 느낀 건 분명하다.


칼빈이 교회가 그동안 '부당한 지식'을 가르쳐 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가 '갑작스럽고' 또 '예기치 않은' 회심을 경험했다면, 그건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교회는 성도와 그리스도 사이에 자신을 부당하게 자신을 끼워 넣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셨고 칼빈은 구원의 모든 과정이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기에 존 녹스(John Knox)가 종교개혁에 대한 설명으로 '하나님께서 평범한 사람들에게 성령을 풍성하게 주신 것'이라고 말한 것은 놀라운 일이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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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www.9marks.org

원제: How the Reformers Rediscovered the Holy Spirit and True Conversion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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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Sinclair Ferguson

싱클레어 퍼거슨 박사는 Ligonier의 작가이며,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객원 교수였고, 현재는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특임교수로 가르치고 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콜롬비아에 위치한 First Presbyterian Church에서 담임 목사로 섬겼다. '온전한 그리스도', '성숙의 길'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