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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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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Dennis Johnson  /  작성일 2019-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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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Anita Austvika on Unsplash

사탄이 결박된 후 이어지는 “천년”에 대한 환상에서 사도 요한은 보좌들과 거기에 앉아 심판하는 자들, 곧 예수님을 신실하게 증언하다가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을 보게 된다(계 20:4-6). 여기서 그 영혼들은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을 하는데, 이때 “살아서”라는 표현은 곧 이어 언급되는 “첫째 부활”을 의미한다. 이는 바꿔 말하면, “둘째 사망”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고통(계 19:20; 20:10, 14-15)이 첫째 부활을 한 이들에게는 미치지 않는다는 내용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문맥과 관련하여 일부 전천년주의자들은 “첫째 부활”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 신자들에게 이루어질 육체 부활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살전 4:13-17; 고전 15:20-23; 참고로, 전천년주의는 요한계시록 20장에서 묘사된 천년왕국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진다는 견해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들은 ‘둘째 부활’이라는 표현을 요한이 실제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는 비신자들이 경험할 육체 부활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다음 구절에 함축되어 있다고 여긴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계 20:5). 따라서 종말에 대한 전천년주의 관점에서는 천 년을 기준으로 두 가지 육체 부활(곧 신자의 육체 부활과 비신자의 육체 부활)이 나눠지게 된다. 요약하자면, 신자들의 육체는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강림하실 때 부활하게 되며, 그렇게 부활한 상태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이 땅을 다스리게 된다. 그런 후 “천 년”이라고 상징되는 오랜 세월이 지나 비신자들의 영혼이 최후 심판을 받기 위해 부활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전천년주의 관점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본문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 집약적으로 사용된 구약의 이미지들에 관심을 두고 이 환상을 이해한다면, 더욱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요한이 보좌들을 바라본 후에 그 위에 앉은 이들로 시선을 옮긴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 순서는 그가 성령에 감동되어 하늘의 환상 가운데 보좌 위에 앉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던 일을 상기시킨다(계 4:1-2; 20:11). 그리고 이는 또한, 보좌 위에 좌정하여 옛적부터 항상 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심판대를 보았던 다니엘의 환상을 상기시키기도 한다(단 7:9-10). 이 중첩되는 이미지들은 우연히 사용된 것이 아니라, 모두 하늘에 위치하고 있는 법정과 보좌들을 보여 주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이는 곧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을 다스리는 자들도 하늘에서 통치하지, 땅에서 통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보좌에 앉은 이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증언을 위해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이다. 그들은 단지 참수형을 당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돌에 맞거나 십자가형 내지 화형을 당하거나 칼에 베임으로써) 순교한 사람들을 대표한다. 이미 요한은 희생의 피를 쏟으며 죽은 자들을 하늘 성전의 제단 아래에서 목격한 바가 있다(계 6:9-11). 여기서 이 사람들이 특별하게 구별되는 이유는, 그들이 비참한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충성했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있었든 그렇지 않았든 “주 안에서 죽는 자들”(계 14:13)이라면 그 사람들 가운데 다 포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 사람들의 정체(즉 주 안에서 죽어 하늘 보좌에 있는 상태)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장소가 하늘 법정임을 다시 한번 확증해 준다.


혹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가령, 본문에 진술된 바와 같이 그들이 살아서 첫째 부활을 한다는 내용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을 하기 전에 그들의 영혼이 육체와 먼저 재결합하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부활의 육체를 가지고 보좌에 앉게 된다고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한 마디로, 과연 ‘부활’이라는 단어가 문자적인 의미에서 육체적인 부활 외에 다른 사건을 의미할 수 있느냐는 반문이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문에 대해 답변하자면, 신약성경에는 육체적인 부활 외에도 다른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부활’이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즉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1, 5-6). 이 내용은 요한계시록 20장 4-6절의 사건 순서와 동일하게 진행된다. 곧 죽은 자가 살아나고, 일으킴을 받으며, 결국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기 위해 하늘 보좌에 앉게 된다. 여기서 바울은 미래에 그들이 육체적으로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서 보좌에 앉게 되리라고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에도 경험했고 현재도 경험하고 있는 은혜, 즉 성령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적용하실 때 경험할 수 있는 은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엡 2:8).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육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변화될 재림을 기다리는 중에도(롬 8:11; 빌 3:10-11, 20-21), 부활하신 그분의 생명과 천상의 통치를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골 3:1-4; 롬 6:4).


이처럼 예수님이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현재적 권능과 육체를 일으켜 부활하게 하시는 미래적 권능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가령, 현재에 일어나는 일에 관해서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이 말씀은 혹 우리의 육체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바로 지금 적용되는 약속이다. 이 내용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기도 하셨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일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바로 이 사건, 즉 육체의 죽음으로 무덤 속에 있는 자들에게 장차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가 요한계시록 20장 12-13절에 묘사되어 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 20:12-13). 이 장면을 보면,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만 심판에서 살아남게 된다(계 20:15). 여기서 비록 ‘둘째 부활’이라는 표현이 명시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지만, 이 사건이 바로 “첫째 부활”(계 20:5-6)이라는 표현을 통해 예고된 둘째 부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살아났다’라든지 ‘부활’이라고 하는 표현들은 때때로 상징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20장 5-6절에서 언급된 “첫째 부활”도 그렇게 해석해야 할까? 즉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영혼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해석해야 할까? 간혹 미래에 일어날 일에 관해 바울이 산문체로 서술하는 내용은 요한이 생생한 환상을 통해 전달하는 이미지를 해석하는 데 유용할 때가 있는데, 이 경우가 그러하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5장 22-2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대적들을 어떻게 정복하시는지 그 순서를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2-26).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미 부활하셨는데, 이는 자신과 연합한 자들이 마지막 날에 경험하게 될 부활을 보여 주는 첫 열매였다. 그리고 현재 그분은 자신의 대적들을 정복하며 다스리고 계신다. 이 과정에서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인데,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의 부활과 더불어 발생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순서가 요한계시록 20장에 나타난 사건 순서와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대적인 사탄은 오랫동안 결박된 채로 있다가(계 20:1-3), 잠시 그 결박이 풀리면서 이내 멸망하게 되는데, 바로 이때 그동안 죽은 자들이 다 살아나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계 20:11-13). 그리고 최후에는 사망 그 자체도 불못에 던져진다(계 20:14). 어떤 대적도 이 마지막 대적인 사망보다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설명하는 신자의 육체 부활은 결국 모든 사람이 경험하게 될 마지막 날의 부활(곧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을 보여 주는 일면으로서, 이는 역사의 마지막 단계인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일어날 둘째 부활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요 5:28-29; 계 20:11-13).


따라서 이와 같이 “첫째 부활”이 육체의 부활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이제 그 부활이 무슨 사건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해야 할 과제가 남는다. 혹 요한복음 5장과 에베소서 2장이 보여 주듯이, 복음 가운데 전달되는 효과적인 부르심을 통해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영적으로 일으키시는 사건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까? 안타깝게도 그렇게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20장 4절은 “영혼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 영혼들은 죄나 불신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신실한 증언으로 인해 죽은 자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되는 이미지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는 다른 의미를 전달하는 역설적인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요한은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하나님의 두루마리를 열기에 합당하다는 음성을 듣게 된다(계 5:5). 그런데 이와 동시에 그는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서 있는 모습도 목격한다(계 5:6). 여기서 어린 양은 피를 흘리고 죽임을 당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봉을 떼기에 합당한 자처럼 여겨진다(계 5:9). 그렇다면 어떻게 어린 양의 죽음이 사자의 승리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일까? 그 비밀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대변되는 약함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에 있다(고전 1:18-25). 요한계시록 11장 7절과 13장 7절을 보면, 사탄에 의해 세워진 짐승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싸워 이기며 그들을 죽인다. 표면적으로 보면,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며 죽는 사건은 완전한 패배같이 여겨진다. 그런데 이 상황 가운데 요한은 진짜 현실이 무엇인지를 바라본다. 즉 한때 사탄에게 고소를 당했던 자들은 이제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다]”(계 12:11). 예수님의 보혈과 그분의 의를 신뢰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놓은 순교자들이 사탄을 이기는 승리자들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하여 승리하셨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도 신실하게 죽음으로써 승리하게 되었다. 요한계시록이 제시하는 이 역설적인 논리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론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즉 첫째 부활이란, 다름 아닌 핍박을 받아 순교한 자들의 참혹한 죽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 죽음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가 지금도 제사장으로 예배하며 왕으로서 통치하고 있다(계 7:9-12; 20:6). 비록 이 순교자들은 하나님이 정의로운 심판으로 그들의 피를 갚아 주시기를 기다리며(계 6:10) 지금도 “몸의 속량”을 바라고 있지만(롬 8:23),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해 세상을 떠난 것이 자신들에게 “훨씬 더 좋은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빌 1:23). 그 좋음이란 바로,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전 15:54)라는 약속이 성취되는 그날에 이루어질 둘째 부활을 미리 맛보는 달콤함 같을 것이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The First and Second Resurrection

번역: 장성우

작가 Dennis Johnson

데니스 존슨은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Westminster Seminary의 실천신학 교수이며, 캘리포니아 에스칸디도에 위치한 New Life Presbyterian Church의 부목사이다. 대표 저서로 'Triumph of the Lamb: A Commentary on Revelation'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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