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무게
by Vaneetha Rendall Risner2019-06-04

하나님은 왜 어떤 기도에는 응답하시고 다른 기도에는 침묵하실까? 하나님은 왜 누군가에게는 치유의 기적을 베푸시고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실까? 왜 특정 도시에는 재앙을 내리시는데 다른 도시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실까?


허리케인 플로렌스가 노스캐롤라이나의 동부를 완전히 휩쓸어버린 이후로 나는 이러한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 나는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중심에 살고 있었는데, 당초 예보와는 달리 우리 지역은 상대적으로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가 왜 참사를 당하지 않았는지, 왜 광풍이 이 지역을 피해 남쪽으로 갔는지 알아. 그때 내가 하나님께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달라고 기도했거든. 주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던 거야.”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7:7). 하지만 내 친구의 논리를 따른다면, 동부 사람들은 그 순간 아무도 기도하지 않았다는 의미인가? 그들은 도시를 구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생명을 잃었고, 또 누군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재산과 집을 잃고 말았다.


기도와 응답의 상관 관계


신앙인의 입장에서 이러한 자연 재해를 통해 어떤 영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하나님은 과연 우리의 모든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시는 분일까? 여러 해 전에, 암으로 투병 중이던 목회자가 기적처럼 암세포가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고 간증했다. 그 목회자는 즉시 교인들에게 자신의 완쾌 소식을 전했는데, 그때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목사님이 치유받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아니, 하나님은 치유해 주셔야만 했어요. 왜냐하면 많은 성도들이 기도했거든요.”


그 목회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준 것에 감사했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치유해 주셔야 할 어떤 빚을 가진 분이 아님을 알았기에 마음이 적잖이 무거웠다고 한다. 진정으로 기도하지만 아직 치유 받지 못한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다. 바울도 이에 해당한다. 하나님은 그가 약한데서 온전하여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하시려고 바울의 '가시'를 치유해 주지 않으셨다(고후 12:9). 


내 얘기를 조금 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내 아들 폴을 아주 일찍 하늘 나라로 데려가셨다. 우리는 기도하며 금식했고, 주변 친구들에게도 아들의 치유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아들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아내의 품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몇 년 후, 우리 부부는 우연히 한 형제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아들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 얘기를 오해 없이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 부부는 아이들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 생명을 위해 기도했고 모두 건강하게 태어났죠.” 우리는 당혹스러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베드로를 구출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언제, 왜 우리를 고난에서 구출하시는가? 사도행전 12장의 말씀을 떠올려보자.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 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중략]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 12:1-3, 5) 야고보를 죽인 헤롯이 베드로마저 죽이려고 하던 그날밤, 하나님은 베드로를 옥에서 구출해내셨다. 


야보고의 죽음과 베드로의 구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이 가장 아끼시던 세 명의 제자였다. 이들은 예수님께 선택 받았고 또 종종 그분과 함께 있도록 허락된 이들이다. 하지만 주님이 부활하신 후, 그들의 삶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펼쳐졌다. 요한은 가장 나중에 죽었고, 베드로는 사도행전 12장에서 보듯이 옥에서 구출되기는 했지만 훗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당했다.


야고보는 제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순교를 당한 인물이다. 성경은 그 구체적인 정황을 기록하지는 않는다. 다만 헤롯이 야고보를 죽였다고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베드로는 비록 순교를 당했으나 그에 앞서 옥에서 구출을 받았고, 야고보는 그렇지 못했다.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나님이 야고보보다 베드로를 더 사랑하셨기 때문일까? 아니면 야고보의 삶이 덜 중요했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야고보의 믿음이 베드로의 것보다 약했기 때문일까? 혹시 초대 교회 성도들이 야고보를 위해서 기도를 덜 했기 때문일까? 


모두가 하나님의 뜻


성경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 그분의 생각과 길은 우리의 생각이나 길과는 완전하게 다르다(사 55:8-9). 우리는 죽음 이전의 삶에 대해 고민하며 많은 계획을 세우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이를 완전하게 넘어선다. 그분은 이미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삶을 그리시고, 이 땅에서 이룰 각자의 사명을 계획하시며, 또한 죽음의 날까지도 결정하신다(시139:16).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다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성경의 기록을 통해 제자로서의 야고보의 삶이나 순교자로서의 그의 죽음이 이미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사 46:10). 바로 그 목적에 따라 하나님은 순교를 통해 야고보를 그분의 품으로 부르신 반면(빌 1:6), 그분이 계획하신 베드로의 사명은 아직 이 땅에서 끝나지 않았기에 그를 옥에서 구출하신 것이다(빌 1:24-25).


살고 죽는 문제, 또는 위기에서 구출되거나 고난을 당하는 상황 등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나 개인의 신앙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고, 우리의 미래 또한 그분의 보시기에 가장 좋은 방향으로 결정될 것이다(롬 8:28, 35-39). 


바울은 이 영적 원리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 1:21~23).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 이 땅에서의 짧은 삶보다 훨씬 낫고,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다. 이 땅에서 내가 부유하든 가난하든, 힘이 있든 아니든, 화려하든 소박하든,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우심 안에서 그분이 베푸시는 천국의 은혜를 영원토록 누릴 것이다(엡 2:7). 


처벌이 아닌 우리의 고난


그러나 이 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고난으로부터 건짐을 받은 반면 나는 여전히 애통함 속을 걸어간다는 사실에 종종 좌절하고는 한다. 번영 신학과 거짓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은, 만약 내가 믿음으로 기도했더라면 몸이 치유함을 얻었을 것이고, 내 아들은 이 땅에서의 생명을 연장 보장 받았을 것이며, 또한 우리의 아픔이 더 빨리 회복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곧 내 삶에 벌어지는 모든 상황이 오로지 나의 선택과 의지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그들의 이해는 마치 내가 좀 더 잘하기만 했더라면, 더 나은 결과가 얻었을 것이라는 뜻과도 같다.


이러한 주장은 오롯이 나와 남편에게 상처와 환멸을 안겨주었고,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대한 비통한 마음과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신학은 기독교 신학이 아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기도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우리가 특정 상황에서 마땅히 보여드렸어야 하는 어떤 종교적 행위나 반응이 아닌, 그분의 위대한 자비와 긍휼하심 그리고 계획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단 9:18).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롬 8:31). 그분은 아들을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내에게 모든 것을 주기 원하신다. 그리스도는 항상 우리를 위하신다(롬 8:31).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 그러므로 지금의 고난은 형벌이 아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제대로 기도하지 않았거나, 충분히 요구하지 않았거나, 혹은 믿음이 약하거나, 또는 중보자의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분명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고난을 사용하셔서 그분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언젠가 나와 당신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허락하신 고난의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다. 또, 그 고난이 바로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무게를 더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고후 4:17).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진정한 복음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분의 모든 백성에게로 향한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Just Have More Faith’: How Bad Theology Hurts the Suffering

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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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Vaneetha Rendall Risner

베니다 렌달 라이즈너는 자유 기고가이다. Desiring God과 Today’s Christian Woman의 정기 기고자이며, 'The Scars That Have Shaped Me'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