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개종, 문화 정죄, 문화 소비
by Matt Chandler2019-05-30

오늘날 세상은 테러 공격에서부터 인종 차별, 정치적 혼란에 이르기까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덕을 점점 상실해 가는 듯 보인다. 이런 혼란의 세상을 겪으며 우리가 독특하고 도전적인 시대 속에 살고 있음을 새삼 알게 된다. 단순히 문화적인 현상을 넘어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며, 이런 유의 불안이 교회 안까지 점점 스며들고 있다. 여러 크리스천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거나 혹은 기독교 관련 블로그 등을 읽어 보면 교회가 확실히 예전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교회는 과거의 교회들과는 매우 달라졌다. 

 

이런 문화적 상황 속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작금의 상황에 대응한다. 때론 위대한 생각이나 직감에 따라 대응하기도 하고, 다른 교인들을 따라하며 대응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대응 방식은 전형적으로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문화를 개종하려 들거나, 문화 자체를 정죄하고 무시하거나, 문화를 소비하는 방식이다. 이 세 가지 방식은 앤디 크라우치(Andy Crouch)의 저서 ‘컬처 메이킹’(Culture Making)에서 차용한 개념들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접근은 문제가 있거나, 근본적인 그리고 성경적인 용기가 결여됐다는 한계가 있다. 


문화를 ‘개종’하는 방식


문화를 개종하려는 사고 방식의 핵심은 우리 사회의 문화가 성경적 원리와 가치를 절대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보는 시각이다. 이런 관점을 지지하는 이들은 문화 개종에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기꺼이 거기에 헌신하려 든다. 설령 그것이 부패한 정치인 혹은 정당과 동맹을 맺거나, 분명한 도덕적인 방향성을 찾지 못한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최근 들어 이런 방식으로 문화에 접근하는 이들이 외치는 ‘기독교의 우선 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라. 

 

그러나 교회가 압도적인 문화적 입지를 차지하지 못할 때, 이런 접근 방식은 도리어 많은 사람들을 이 전쟁에서 좌절하고 낙망하게 만든다. 실제로 이미 그러한 일들이 여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런 방식은 오히려 교회를 세상 앞에 엎어지게 만들 구덩이를 파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접근의 기저를 이루는 교만한 태도는 세상과의 ‘문화 전쟁’을 영구히 지속시킬 뿐이다. 결국 세속 문화를 완전히 전복하려는 접근 안에서는 지금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와 장차 올 하나님 나라 사이의 건강한 접합점을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를 개종하려는’ 방식에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와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 같은 신학자들의 놀라운 업적은 문화 개종을 근간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의 움직임은 크리스천이 가급적 모든 문화에 관여해야 하며, 온 만물을 창조하고 지탱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의 문화가 변해야 한다는 인식 안에서 전개되었다. 그리스도는 교회만의 주인이 아닌 온 세계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들은 이와 같은 움직임을 시작한 것이다.


크리스천은 주변 사람들의 장점을 찾고, 정의를 추구하며, 선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라고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의 도시와 하늘의 도시를 혼동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까지의 이 땅은 불완전하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을 세우겠다는 명목으로 문화를 완전히 개종하고자 이 땅의 정치와 사람을 이용하는 것은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물론 문화 개종을 지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들이 이를 위해 타협과 불합리한 동맹을 이용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교회와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문화를 ‘정죄’하는 방식


이는 크리스천을 세상으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방식이다. 죄악으로 가득찬 사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상반되기에, 크리스천의 문화를 마치 소수의 하위 문화처럼 은둔하게 하고 또한 사회의 보편적인 흐름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방식이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등을 돌리는 이런 유의 방식은 교회 역사 속에 늘 존재했다. 수도원의 부흥에서도 이를 찾아볼 수 있고, 재세례파 운동의 다양한 양상 속에서도 유사한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분명 존경스럽고 아름다운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거룩하라고 명하셨고, 성경은 교회가 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가르치기 때문이다. 또한 크리스천은 세상과는 다른 ‘맛’을 내는 소금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 역시 온전히 성경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마 5:13)이어야 한다. 소금은 음식 속에 스며들어 부패를 막을 뿐만 아니라, 형체는 사라질지언정 그 맛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니, 소금은 오히려 그 맛을 음식 전체로 퍼뜨린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언젠가는 사회를 향해 크리스천의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이 무엇인지를 증거해야 할 때가 온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친밀함과 온화한 인간 관계가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역 공동체에 소속되어 공적인 행사에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망명 생활 동안 구약 시대의 사람들에게 바벨론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렘 29:7)라고 명령하셨듯이, 우리도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 공동체의 평안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음식, 앞선 기술, 음악, 그리고 오락 거리 등을 선물로 주셨다. 이는 창조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넘어서지 않는 선에서 바르게 즐기도록 허락하신 것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것들의 잘못된 부분을 비평할 줄도 알아야 한다. 두려운 마음에 숨거나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문화는 악의 원천이 아니다. 모든 악한 것은 마음에서 나온다(막 7:18-23). 그러므로 문화를 차단하려 아무리 높은 담을 쌓는다고 해도 죄 자체를 막을 순 없다. 


문화를 ‘소비’하는 방식


문화 소비는 세상의 문화 트렌드를 그대로 따라 가는 것으로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가장 널리 퍼져 있으며, 또한 가장 압도적인 방식이다. 이러한 접근 아래에서는, 문화와 성경적 가르침이 상충할 때 전자가 후자에 앞선다. 기독교 전통쯤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에 없어도 무방하지 않은가 하면서 말이다.


많은 크리스천은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문화의 트렌드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미국 도시 문화의 중심인 맨하튼에서 사역하는 팀 켈러(Tim Keller)는, 그의 저서 ‘센터 처치’(Center Church)에서 이 접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평했다. “이 모델은 기독교와 주변 문화를 근본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본다. 따라서 이 모델을 수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관련 없는 문화 운동 안에서도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문화 소비의 문제는 복음을 무시한 채 문화와 사회 정의에 과도한 초점을 맞출 때 시작된다. 사람들은 대체로 복음 자체보다는 복음이 낳은 사회적 결과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발생한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접근 안에서는 성경 말씀보다 문화를 따르는 일이 더 우위를 차지하기 때문에, 믿음의 본질적인 모습들은 무시되거나 타협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 결과, 크리스천의 삶은 점점 세상을 닮아 가며 교회의 가르침과는 멀어지는 길을 걷게 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닌 세상의 문화가 교회를 다스린다면,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단지 시대 정신을 반영하고자 절박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의 사교 모임일 뿐이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교회의 문을 닫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도 하다. 누가 세상과 구분되지 않는 교회에 굳이 찾아오려고 하겠는가?


용기 있는 자세


문화 개종, 문화 정죄, 문화 소비. 이 세 가지 접근은 비록 진행 양상에 있어서는 각기 다른 특징을 지닐지라도 근본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세 가지의 대응 방식 모두 일정 부분 두려움에 기인한다는 사실이다. ‘문화 개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한다. 그들은 옳지 못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문화 전쟁의 우위를 차지하지 않고는 교회가 번성할 수도, 살아남을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문화 정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세상 문화가 크리스천과 교회를 부패시킬 것이라며 두려워한다. 또한 ‘문화 소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교회가 대중에게 외면당할까봐 두려워한다. 


이렇듯 크리스천이 두려움에 빠져 있음을 감안할 때, 나는 우리가 세상 문화에 관여하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세우기보다는 용기의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후기 기독교, 포스트 모던 시대의 크리스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용기를 내어 올바른 길에 소망을 두지 않는다면,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일들은 금방 끝나버리거나 잘못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담대한 용기가 있다면, 우리는 그분의 백성으로서 맡은 사명을 감당하며 세상에 없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용기를 가진 자에게는 도전적인 이 시대가 두려움과 공포가 아닌 소망과 기회로 여겨질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용기가 있다면, 우리의 관점이 바뀔 것이다. 그리하여 주어진 상황 앞에서 겁먹거나 화내거나 마비되지 않고, 기뻐하며 서로를 격려할 수 있을 것이다.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그 믿음에서 주어지는 용기가 있을 때, 변화하는 세상에서 어떠한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직관과 동기를 갖게 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Christian Courage before Cultural Strategy

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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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att Chandler

맷 챈들러는 텍사스 달라스 포트워스에 위치한 The Village Church의 선임 목사이며, Acts 29의 회장이다. 그의 저서로는 Take Heart  Mingling of Souls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