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에 대항하는 진정한 교회
by Brett McCracken2019-06-04

문화에 대항하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다면, 굳이 멀리 가서 살펴볼 필요가 없다. 혹은 애써 우리의 상상력을 쥐어짜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기독교를 이해하면 된다.


하지만 기독교가 이미 확고하게 자리잡아 그 문화가 깊이 뿌리내린 지역에서는, 교회가 얼마나 혁명적인 존재인지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런 지역에서는 교회가 너무 평범하고, 심지어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담대함을 상실하거나, 혹은 세상과는 달라야만 하는 교회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 신앙 공동체를 개조하여 세상과 같은 색을 띄게 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런 움직임은 위험할 뿐 아니라 때로는 이단적인 성격을 안고 진행되기도 한다.


당연히 교회는 개조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교회가 지닌 근본적인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이를 깊이 받아들임으로써, 세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서고 또 그 구별됨으로 세상을 설득해야 한다. 


이를 위해,여기서는 세상 문화에 대항하는 교회의 네 가지 정체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문화에 대항하는 모임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며 떡을 떼기 위한 실제적인 모임으로 존재해 왔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존재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망각하곤 한다. 과연 이 세상 어디에서 사람들이 이처럼 정기적으로 모여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는가?


각종 매체와 스마트폰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시대적 변화로 인하여, 교회조차도 점점 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식되기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다. 우리의 관계도 거의 다 디지털화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눈에 보이는 형체로 존재한다는 말은 지루하게 들릴 수도 있다. 이러한 시대상은 우리의 신앙을 눈에 보이는 물리적 공동체로 구현하기보다, 오로지 머리(두뇌)로만 이해하려는 움직임을 낳고 있다. 따라서 교회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지녀야만 하는 물리성 혹은 신체성(physicality)이 미묘하게 약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일마다 몇 시간씩 한 자리에 몸소 참여하는 모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시대의 문화에 대항하는 이와 같은 특징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 교회는 오늘날의 사회 문화적 흐름에 역행하는 '회중성'을 소유 및 이행하는 공동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나누며, 또 복음을 전하고 여러 섬김과 교제에 힘쓰는 자들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 성육신의 실체를 다름 아닌 교회를 통해 새롭게 알아가야 할 시대적 사명이 있다.


2. 문화에 대항하는 가족


또한 이 시대의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관계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우리는 어떤 컨텐츠든 “그냥 인터넷으로 들으면 된다”라고 말하는 개인주의적인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기독교는 한 개인이 홀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기독교는 ‘나랑 예수님만’ 있으면 된다는 식의 영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연합체고, 교회는 한 가족이다. 세대와 문화와 인종과 성별을 초월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로 연합되었다. 이 사실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고, 그 연합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힘써야 하는 우리의 사명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시대의 문화는 나라와 사회 곳곳에서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에서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다양성은 세상에서 찾기 힘든 소망을 제시한다. 가령 요한계시록이 보여 주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 한데 모여 주님을 예배한다. 이는 우리가 개별적 존재로서 갖는 서로 다른 특징들이 천상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동시에 그 차이점들은 여전하지만, 우리는 한 가족으로서 똑같이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사실도 보여 준다.


이처럼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될 때 나타나는 다양성과 단일성은 종말론적 공동체(the eschatological community)로서 교회가 지닌 본질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즉 ‘아직’ 이르지 않은 마지막 날의 온전한 모습을 ‘지금’부터 세상에 조금씩 드러내는 존재가 바로 교회이다.


3. 문화에 대항하는 변화


교회는 변화가 일어나는 장소이다. 기독교는 결코 우리에게 “지금 모습 그대로 살아도 괜찮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죄와 불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를 그저 묵인하며 세상을 마치 변화시킬 수 없는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하지 않는다.


각 지역에 있는 교회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주된 장소이다. 교회는 용서받은 죄인들이 모인 공동체로서, 그 구성원들은 함께 노력하며 거룩을 추구한다. 그리고 사랑 가운데 서로에게 진리를 나눔으로써 함께 성장하고 변화한다.


이런 모습은 그 자체로, “당신의 모습 그대로가 좋습니다. 누구도 당신에게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라고 주장하는 이 세상의 문화를 대항한다. 요즘에는 많은 교회들 안에서 ‘거룩함’보다 ‘솔직함’을 더 추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온전한 공동체를 추구하기보다 각자의 상한 마음을 솔직히 나누기를 더 좋아하는 시대적 경향성을 그대로 따라 가곤 한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의 독특성은 상한 마음을 공유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 가며 함께 거룩한 모습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만일 우리가 이 거룩과 변화의 중요성을 가볍게 여긴다면, 교회는 결국 세상에 있는 여느 조직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우리가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감각도 상실될 것이다. 


그러나 어두운 세상에 던져진 빛과 소금이라는, 바로 이 독특한 신분에서 나타나는 차이점이야말로 교회를 진정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인이다. 마틴 로이드존스(Martyn Lloyd-Jones)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가 세상과 완전히 다를 때, 세상은 언제나 교회를 주목해 왔다. 복음의 영광은 그때 나타난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서로가 거룩을 추구하는 모습, 바로 그 모습이야말로 문화를 대항하는 교회의 결정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4. 문화에 대항하는 사명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을 망각하면, 냉담과 권태 및 열등 의식이 내면에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교회가 지닌 근본적인 사명, 즉 문화를 대항하는 본연의 사명을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사명이란 자기 자신에 관한 일이 아니다. 또 본인 스스로를 돕고자 하는 사업도 아니다. 사명은 우리의 성장과 변화를 꾀하지만, 우리 자신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최고로 영광스러운 삶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확신 가운데 산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현재의 고통과 아픔을 기쁨으로 여기며 인내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최고의 삶이란 바로 자신의 인생을 다른 이를 위해 쏟을 때, 더 큰 목적을 따라 당장에 취할 수 있는 편안함을 희생할 때 미리 맛볼 수 있다.


이는 소비지상주의가 판치는 현대 사회에서 얼마나 도발적인 주장인지 모른다. 세상은 ‘자기’(self)라는 미명 하에 모든 가능한 것을 부추긴다. 자기 개발, 자기 실현, 자기 홍보, 자기 보호, 그리고 자기를 사진 찍는 셀카까지, 모든 게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런 시대의 모습은 니체(Nietzsche)를 떠올리게 만든다. 왜냐하면 니체야말로 ‘자기’에게 집중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화두는 개인의 자아였다. 오늘날 동네 북카페에서부터 지하철 가판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대중적인 책과 잡지에는 ‘카르페 디엠’, 즉 바로 지금이 최고의 순간이니 오늘을 붙들라는 표어가 수도 없이 붙어 있다. 니체는 이런 사상을 일찌감치 자신에게 적용했고, 오늘날의 수많은 사람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행복을 유일한 삶의 목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은 결국 죽음에 이른다.


세상에 만연한 자기중심적 사상에 역행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자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참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을 찾으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당신의 잠재력을 발견하여’ 성공하라는 조언도, 또 세상으로 하여금 당신의 영광을 인식하게 만들라는 충고도 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너 자신을 부인하며(마 16:24) 그 생명을 내려놓아야 살게 되리라는 가르침을 제시한다(마 10:39).


이런 가르침이 거칠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스스로를 자유하게 하는 메시지다. 왜냐하면 그 진리는 우리에게 무겁게 매여 있던 자기 사랑(narcissism)과 자기 통치권(autonomy)이라는 죄악의 짐을 내려놓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통해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는 공동체를 이루어 가게 된다(벧전 2:5). 이렇듯 기독교는 강하고 크고 영광스러운 교회의 지체가 되도록, 스스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그 자리에 이르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한 2년 전이었는데, 자신에 대해 “신앙을 저버린 후 무기력하고 혼란스러워진” 그리스도인이라고 소개한 어떤 사람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저는 교회가 제 삶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지금의 현실이 싫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도전에 직면하고 세상 정신을 거절하며, 그저 편안한 장소가 아닌 진정한 피난처이자 큰 산이 되어 주기를 원합니다. 비록 제 자신은 수시로 욕하고, 술에 취하며, 하지 말아야 할 행동으로 후회하는 사람이지만, 가끔씩 예배를 위해 찾는 교회마저도 저와 같은 모습이 되어 가는 게 싫습니다. 제가 믿기로 교회는, 자신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성소여야 합니다. 즉 우리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장소, 바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만이 나를 용서하시며 또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장소여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모습을 보여 줄 때, 비로소 사람들을 이끌 수 있다. 그때만이 세상의 환난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요, 자기라는 우상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성소가 될 수 있다. 교회가 이처럼 세상과 구별될 때, 우리는 이 시대의 관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새롭게 대항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 되신 교회라면, 문화에 대항하는 본연의 정체성이 그저 당위가 아니라 강점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 단지 이질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교회의 고유한 정체성을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출처: www.9marks.org

원제: The Local Church as a Counterculture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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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Brett McCracken

브랫 맥크레켄은 미국 TGC의 편집장으로 Southlands Church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으며, 'Hipster Christianity: When Church and Cool Collide'를 비롯하여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