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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도 고난을 받으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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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Matthew Barrett  /  작성일 2019-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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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by Holger Langmaier from Pixabay

스프로울(R. C. Sproul)박사에 따르면, 생각은 결과를 초래한다. 20세기를 뒤돌아보면 심각한 결과를 야기했던 생각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하나님도 고난을 받으신다는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을 비롯한 영향력 있는 신학자들은 세계 대전을 두 번이나 치르며 쪼개지고 고난으로 점철되어 버린 이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몰트만은 나치 수용소의 잔학 행위들을 오랫동안 깊이 관찰했다. 유태인들이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며 울부짖었을 때 몰트만은 하나님은 바로 거기 계시며 함께 고난 받고 계시다고 대답했다. 몰트만은, 하나님이 우리 고통을 아시기 때문에,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솔직히 말해, 몰트만의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고 감정적인 호소력이 크다. 가령 당신이 어떤 성경 공부 모임에 갔는데 거기서 당신과 가까운 친구 한 명이 최근 일어난 힘든 일에 대해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생각해보라. 그런 상황이라면, 분명 누군가가 “힘 내요.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고난 받고 계시니까요. 하나님도 당신만큼 아파하고 계시고 당신만큼 슬퍼하고 계세요”라고 말해줬을 것이다. 고난 받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관계에 대한 우리의 본능에 깊이 와닿고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는 이들에게는 큰 위로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눈물이 우리의 뺨을 적시는 그러한 고통의 순간이야말로 정확한 신학이 필요한 때이다. 하나님도 고난 받고 계시다고 친구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그를 위로하는 방편은 되겠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아무런 위로나 소망을 주지 못하는 위험한 생각임이 자명해진다.   


불이야! 집에 불이 났어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 예를 들어보자. 당신의 집에 갑자기 불이 났다고 상상해보라. 화염을 피해 빠져나와 길가에 서서 불타는 집을 지켜보고 있던 당신은 아이를 집에 두고 나왔다는 걸 깨닫게 된다. 바로 그 순간, 당신 이웃이 당신에게 달려와서는 당신의 고통에 동참하고 공감해준답시고 자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고 생각해보라. 


당연히 당신은 지금 눈 앞에 벌어지는 그 광경을 믿을 수 없을 것이고, 심지어는 그런 식으로 행동한 그 이웃의 광기에 극도의 분노를 느낄 것이다. 그 순간에 당신에게 필요한 이가 누굴까? 굳건하고도 절제된 자신감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화염 속으로 뛰어들어 당신의 아이를 죽음의 손아귀로부터 구출해 내올 바로 그 소방관이다. 그러한 지옥 같은 상황에서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소방관이 당신의 희망이다.  


고난 받으시는 하나님, 즉 감정적인 변화에 휘둘리는 하나님은 사실 우리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 고난 받으시는 하나님은 우리와 비슷한 존재는 될 수는 있겠지만 우리를 구출해줄 수는 없다. 사실 감정적인 하나님은 우리 자신 만큼이나 무력한 존재이다. 고통의 때에 우리에게는 고난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 고난을 이기시고 우리를 구출해내실 뿐 아니라 이 악한 세상에서 정의를 행하실 하나님이 필요하다.  


오래된 단어 다시 꺼내기: 고난 불가능성


이러한 이유로 초대 교부들로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사람이 겪는 감정이 없는 분이라 믿어왔다.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고난을 받지 아니하신다(impassible)는 것이다.


19세기까지는 감정(passions)이라는 말은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에 한하여만 사용되었다. 변할 수 밖에 없는 존재, 다른 이들이 행사하는 감정적인 힘에 영향을 받는 존재를 가리키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부들이 하나님께는 감정이 없다고 주장한 것은, 불변하고 자충족적인 창조주 하나님을, 항상 변할 뿐 아니라 외부에 의존해야 하는 피조물들과 엄격히 구별했기 때문이었다(바울도 행 17장에서 동일한 주장을 한다). 이 한 단어 감정(passions)에서도 우리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차이점을 볼 수 있다. 그리스의 신들은 감정적 동요가 심하고, 기분이 시시때때로 변하며, 타자의 의지에 의해 변화를 경험하거나 조종당하기도 한다. 일순간 욕망의 포로가 되었다가, 또 다른 순간에는 자제심을 잃고 분노를 폭발시키기도 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와는 반대로 감정적으로 동요하시지 않는다. 피조물들은 그를 바꾸지 못한다. 하나님이 고난을 받지 아니하신다(impassible)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그렇다면 앞서 든 화재 예화에 오류가 하나 있는 셈이다. 공포와 혼란의 순간에 그 소방관은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고난 불가능성은 선택이 아닌 본성적이라는 사실이다. 고난 불가능성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렇기에, 고난 가능성은 하나님의 바로 그 본질에 위배된다. 하나님은 고난 당하실 수 없다. 


왜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하나를 말하자면 고난을 당하는 하나님은 변화, 즉 감정적인 변화에 노출된 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변치 않으시는 분임을 가르친다 (말 3:6; 약 1:17). 그는 불변하신 분이다. 고난 불가능성은 변치 않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고난 불가능성은 단순히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을 구성하는 필수적 요소이다.   


감정이 없는 하나님? 


하나님이 고난을 받지 않는 분이라면, 하나님은 금욕적이고, 생기도 없고, 무관심하고, 감정이 없어 사랑을 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것이 불가능한 분이라는 걸까? 불행히도 이것이 너무도 만연한 인식이다. 실제로는 고난 불가능성은 정반대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미 영원무궁히 살아계시고 사랑이 넘치시므로 더 이상 그렇게 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이 불변하실 뿐 아니라 그가 무궁하시다고 가르친다는 것을 기억하라(시 147:5; 롬 11:33; 엡 1:19; 2:7). 하나님은 측정할 수 없으며, 그의 크기 뿐 아니라 그의 본질 자체가 무궁하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절대적인 완벽함 그 자체이시다. 하나님이 무궁하신 분이라면 우리는 어떠한 하나님의 속성이라도 그것이 최고치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고급 신학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하나님께는 피동적 효력(passive potency)이 없다는 것이다(하나님의 속성과 행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역주). 하나님은 당신의 속성들의 무한한 발현 그 자체이시다. 달리 말해, 하나님은 살아계시되 최대치로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이미 영원무궁히 살아계시므로 더 이상 그렇게 될 수 없다. 교부들은 하나님을 순수 실현(actus purus)이라 칭하며 이를 설명하고자 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만큼 완벽한 실현으로 존재하신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완벽한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유한할 뿐 아니라 개선의 여지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 진리를, 예를 들어, 사랑 같은 속성에 대입해보면 왜 고난 불가능성이 그렇게도 중요한지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고난 받지 않는 분이라는 것은 그가 사랑을 단순히 소유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체가 사랑, 즉 무한하게 발현된 사랑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미 영원무궁히 사랑이 넘치시므로 더 이상 그렇게 될 수 없다.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그의 사랑은 고난에 영향을 받는 사랑일 것이다. 현재보다 더 좋은 사랑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인데 – 그렇다면 달리 말해 하나님의 사랑이 완벽하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한 관점에서, 고난 불가능성은 하나님이 무한하게 발현된 사랑이심을 보증한다. 고난에 영향을 받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할 수도 있고 심지어 개선되기까지 하는 데 반해, 고난 받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무한히 완전하므로 변치 않는다. 고난 불가능성은 하나님의 사랑이 지금보다 더 무한할 수는 없음을 보증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어나게 하고 실행시킬 수 있는 것은 결단코 없다. 그분 자체가 영원히, 변함없이, 창조계의 질서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무한하게 발현된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직관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난 불가능성만이 우리에게 영원하시고 변치 않는 사랑이신 인격적인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다. 감정이 없거나 둔한 것이 아니라, 고난 불가능성은 하나님은 이미 영원무궁히 사랑이 넘치시므로 더 이상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난에 영향을 받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약속을 우리에게 주실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고난 불가능성, 그리고 우리의 고난 


생각은 결과를 초래한다. 처음에는 잘 모르겠지만, 고난에 영향을 받는, 실제로 고난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실로 위험한 생각이다. 고난이 실제로 닥쳤을 때 그리스도인의 자신감과 확신, 그리고 소망까지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감정적 변화를 겪으시는 분이라면 당신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리라는 것을 우리가 어찌 확신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것 만큼 그의 복음의 약속도 계속 변할 것이다. 하나님이 감정적 동요에 노출된 분이라면 그의 성품이 언제나 동일하시리라는 확신을 어찌 가질 수 있겠는가?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하지 않을지도 모르며, 그의 자비 또한 영원하지 않을지도 모르며, 그의 공의 역시 미래의 승리를 보장해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한 생각은 위험할 뿐 아니라 비관적이기도 하다. 캐서린 로저스(Katherin Rogers)가 고백하듯, “인간에 의해 고난을 당하셔야만 하는 하나님, 비로소 충만케 되기 위해 인간을 필요로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은 신성에 대한 비관적인 개념이라 생각한다”(Perfect Being Theology). 그 생각이 비관적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반석이요 요새이신(시 18:2) 하나님께로 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앞에서 유한한 피조물들과 똑같이 무력한 하나님을 동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고난 불가능성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좋은 소식이다. 하나님은 변치 않고 고난 받지 않는 하나님이시므로, 우리에게 혹독한 삶의 시련이 닥칠 때에도, 인격적이고 사랑이 넘치시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계획은 흔들리지 않는다. 고난이 우리를 격렬하게 흔들어도 우리는 넘어지지 않고 루터처럼 찬양할 것이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Does God Suffer?

번역: 이정훈

작가 Matthew Barrett

매튜 바렛은 Mid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신학과 부교수이다. 그는 Credo Magazine의 총괄편집장이며 Credo podcast의 호스트이다. 대표 저서로 'None Greater: The Undomesticated Attributes of God'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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