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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가 아닌 성경을 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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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PJ Tibayan  /  작성일 2019-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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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by Free-Photos from Pixabay

칼빈주의가 정말 맞다면, 설교에서 칼빈주의를 전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설교의 내용, 기능, 그리고 목적 때문이다.  


1. 설교의 내용


칼빈주의가 아닌 성경을 전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성경이 인간의 신학을 서술해 놓은 문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바울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 벧후 1:21 참조)라고 말한다. 성경의 구절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의 신학적 논의는 결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쓰신 성경보다 앞설 수 없다.


찰스 시므온(Charles Simeon)은 성경 중심적 설교자의 좋은 예이다. 그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 교리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대할 때 그 본문이 어떤 교리를 지지하는지 혹은 어떤 신학 체계의 발전에 기여하는지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모든 부분에 합당하고 완전한 권위를 부여”하였다(Charles Simeon, Pastor of a Generation). 만일 당신이 칼빈주의가 성경적이기 때문에 받아들였다면, 당신은 반드시 성경 안에서 기뻐하고 성경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칼빈주의 설교자들이 특정 본문과 자신들의 신학이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그 본문의 뉘앙스를 미묘하게 조정하는 현상에 대해 시므온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필자[시므온]는 어떠한 본문도 변경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모든 종류의 본문에서 동일한 만족을 얻고, 모든 본문을 동일하게 사용한다. 영감을 받은 성경 저자들이 아무 제한 없이 말하므로 나 역시도 그렇게 할 자유가 있음을 믿는다. 진리를 어떻게 전파해야 하는지에 대해 성경 저자들 역시 내게 배울 필요가 전혀 없다. 나는 거룩한 사도들의 발 앞에 앉아 배우는 것이 그저 기쁠 뿐이다. 사도들이 어떤 식으로 말해야 했는지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교인들이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그 말씀에 뿌리내리도록 도우라. 크신 하나님에 대한 신학을 설파하기보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라. 성경 본문에 뿌리내리고 성경 본문으로 틀이 잡힌 신학을 가르치고 그 안에서 기뻐하라. 성경만으로도 칼빈주의는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예를 들어, D. A. 카슨(D. A. Carson)은 사도행전 13장 48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바울의 설교를 상세히 소개한 후, 누가는 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라고 적고 있다. 사도행전, 또는 신약 전체에 걸쳐 회심 및 회심자들을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고 거기서 사용된 말들을 우리의 설교와 말에 적용한다면 멋진 훈련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에 대해 생각 성경 말씀 자체에 기반하여 정의하도록 도와야 한다. 새로 부임한 교회에서 약 2년이 지난 무렵, 나는 하나님의 으뜸되심에 대한 출애굽기 개론 설교를 전했다. 이때 나와 성도들은 바로가 자기 마음을 완악케 한다고 묘사된 본문, 바로의 마음이 완악케 되었다고 말하는 본문, 그리고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케 하셨다고 묘사한 본문 모두를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고 자칭 반(反)칼빈주의자들인 성도들에게, “바로의 마음이 완악케 된 것은 궁극적으로 누구에 의한 것이지요?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바로 자신입니까?”라고 물었다. 놀랍게도 성도들은 한 목소리로 “하나님입니다.”라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답했다. 이는 전형적인 '칼빈주의적' 해석이었지만, 성도들이 바로의 마음이 완악케 된 일에 있어 하나님의 최종적 권위를 인정했다는 사실에 대해 주님께 감사했다.  


2. 설교의 기능


설교는 단순한 정보 전달의 행위가 아니다. 설교는 성도들에게 건강한 교리의 틀을 잡아주고 그 틀에 지속적으로 영양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주일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성경에 관한 '정보'를 습득하는 것은 물론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설교가 전달하는 전부가 아니다. 강해 설교의 언어와 목표는 해당 본문의 언어와 목표에 의해 설정되기 때문에, 특히 강해 설교는 성도들이 성경 본문 앞에 순종하고 성경 본문을 묵상할 수 있도록 이끈다. 강해 설교를 할 때는 설교자 자신이 먼저 매주 본문 말씀에 즐거이 순종하는 본을 보여야 한다. 또한 성도들은 강해 설교를 통해 본문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목사가 전하는 해당 구절의 해석을 통해 성경을 어떻게 묵상해야 하는가를 배우게 된다. 즉 설교를 행하는 방식을 통해 청중은 성경에 순종하고 또한 성경을 묵상하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이는 곧 제자 훈련과 같다.   


주일의 회중 설교는 전 교회가 동시에 같은 장소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다는 사실 때문에 목회 사역에 있어 수원(水源), 즉 핵심 역할을 한다. 하지만 수원은 수원일 뿐 물길 전체는 아니다. 설교는 교인들에게 주일 이후의 삶까지 책임질 올바른 교리를 불어넣어야 한다. 그렇게 설교를 통해 선포된 말씀과 교리는 전교인의 제자화를 이룸과 동시에 목사의 사역과 연계되어 교회 전체로 퍼져 나가야 한다.


설교가 목회의 전부는 아니다. 목사들은 양떼를 위해 기도하고(행 6:4), 가르치며(행 20:20), 감독(히 13:17) 및 온전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엡 4:11). 또한 목회자는 성숙한 기독교적 삶의 본이 되도록 노력한다(딤전 3:1–7). 하나님은 교회에서 열리는 각종 학습 과정, 함께 하는 식사, 대화, 일대일 성경 공부, 소그룹 등의 다양한 상호 보완적 활동과 상황을 통해 목회자들로 하여금 성도들이 건강한 교리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이끄신다. 설교가 목회의 전부가 아니듯, 주일 예배 역시 함께 하는 교회 생활의 전부가 아니다.     


성도들이 교회에서 서로의 삶을 나눌 때, 비로소 예수님과 그의 말씀 역시 그들의 관계 속에서  된다. 지역 교회와 그 교회 안에 존재하는 관계의 망은 제자도와 교리적 성숙을 위해 하나님께서 디자인해 주신 매트릭스와 같다(엡 4:11–16). 그러므로, 성도들이 서로 말씀을 나눌 수 있도록 성경을 전하라. 또한, 섬기는 교회만의 신앙고백문이 있다면 성도들이 그 신앙고백문 위에 굳건히 설 수 있도록 도우라. 더욱 일치된 신앙 고백을 위해 노력하라. 그것을 당신의 칼빈주의식 용어들보다 더 귀하게 여기라. 당신의 칼빈주의가 성경적이라 믿는다면, 칼빈주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필수가 아니라는 것 역시 잊지 말라(조직신학 용어들은, 주일 설교 강단에서는 거의 필요가 없지만, 제자도에 관한 대화에서는 종종 도움이 되며, 어떤 의미에서는 필요하기까지 하다는 것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목사 청빙 위원회의 인터뷰에서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칼빈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고자 했다. 왜냐하면 청빙 위원들이 말하는 '칼빈주의'라는 말에는 내가 볼 수 없고 알지도 못하는 함의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가리킨 '칼빈주의'는 하이퍼 칼빈주의(Hyper-Calvinism)인 것 같았다. 나는 그저,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택과 그에 따르는 우리의 선택들이 어떻게 양립 가능한지에 대한 내 견해를 나눴고 청빙 위원들도 그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신앙고백문에 내 자신도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말씀을 드렸다.   


3. 설교의 목적 


설교와 교육의 목적은 신학적인 지식을 추구하기 위함도 아니고 '칼빈주의'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다(딤전 1:5). 사랑이 우리의 목적이다. 하나님을 향한, 서로를 향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목적이다(막 12:30–31; 요 13:34–35).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이 필요하지만(벧후 3:18), 바울이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라고 경고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므로,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히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한다(벧전 5:5; 약 4:6). 우리가 강단에서 전하는 메시지 때문에 성도들이 신학적으로 점점 교만해져서 하나님이 그들을 멀리하시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건강한 교리 위에 세워진 사랑을 위협하는 두 가지는, 분별력이 결여되어 그저 감상적이기만 한 생각들(intentions), 그리고 결코 사랑의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고 개념으로만 머무는 지식이다. 우리는 신학적으로 무지해지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민감하게 반응하여 신학 지식 자체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곤 한다. 신학 지식은 그 자체를 위해 추구해서는 안 된다. 신학 지식은 사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목회자여,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 안에 그리고 그들을 통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성도들을 세워가라. 성경의 기능과 목적에 맞게 설교하라. 그렇게 할 때, 당신이 늘 기도하는 것처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보여줄 수 있게 된다. 궁극적으로, 사랑이 결여된 신학 지식이 아닌, 성경에 뿌리 내린 사랑을 추구하라.   


결론


그러므로, 설교의 내용, 기능, 그리고 목적 때문에, 나는 칼빈주의가 아닌, 성경을 전할 것을 간절히 소망한다. 특정 신학 용어에 집착하는 것보다 성경 자체에 확신을 갖는 것이 성도들의 영혼에 훨씬 더 중요한 일임을 잊지 말라.  


자문해보라. 도대체 왜 그렇게 칼빈주의를 가르치고 싶은 것인가? 아마도 성경의 가르침을 잘 정리한 칼빈주의를 처음 접했을 때 당신은 압도되었고, 칼빈주의가 당신 마음 속에 절대 꺼뜨리고 싶지 않은 기쁨의 불꽃을 일으켰을 것이다. 실로 멋진 일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칼빈주의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 조직신학 책을 통해서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러한 기쁨에 도달한 것인지 궁금하다.


형제들이여, 칼빈주의가 아닌 성경을 전하기로 결심하는 순간 당신은 성도들을 더 풍성해 보이는 신학의 샘으로 인도해 가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실 것이다. 당신이나 다른 이들의 신학적 재능이 아닌 성경을 신뢰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은 성도들에게 당신이 얼마나 신학적으로 탄탄한지를 뽐내며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성도들에게서는 신학적 파벌주의가 심해질 것이다. 결국, 성도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점점 신뢰하지 않게 되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의 영광에 대해 성도들이 마음을 닫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굳건한 확신으로 성경을 밝히 전하면 성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고, 그 말씀을 신뢰하게 되며, 다가올 고난에도 능히 맞설 수 있게 된다. 이는 성도들에게 억지로 칼빈주의를 수용하게 만드는 것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진정한 확신을 갖고 그 말씀을 귀하게 여기게 된다. 그러면 비로소 당신은 우리의 선한 목자를 묵상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인내로 목양할 수 있게 된다.  




출처: www.9marks.org

원제: Preach the Bible, Not Calvinism

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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