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는 어떤 ‘것’이 아니다
by Jeremy Treat2019-07-30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알 파치노(Al Pacino)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께 자전거를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그게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란 것을 깨닫고는 기도하는 대신 자전거를 훔쳤다. 그리고는 용서를 빌었다.” 파치노의 이 말은 우리 모두가 내적으로는 다 느끼고 있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서 말하지 못하는 어떤 긴장감을 건드리고 있다. 하나님이 용서의 하나님이라면 굳이 무엇 때문에 거룩한 삶을 살려고 발버둥쳐야 할까? 이미 모든 죄값이 치러졌다면 뭐하러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는 걸까?


이런 식의 긴장감이 생기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우리가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은혜는 무엇인가


한 때 나는 하나님이 천국 보좌 뒤에 보관하고 있다가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나눠주는, 일종의 영적 물질이 은혜라고 생각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과는 별도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 은혜라고 생각했었다. 


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은혜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자신과 상관없이 별도로 나눠주는 뭔가가 아니다. 또 은혜는 다 나눠주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전혀 자격없는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분이 하나님이다. 그게 은혜이다. 자격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게 은혜라는, 자주 듣는 은혜에 대한 정의는 이 세상 최고의 진리이다. 그러나 단순한 그런 정의만 가지고는 은혜의 하나님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은혜는 선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냥 뭔가를 나눠주는 분이 아니라 그 분 자체가 바로 선물이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통해서 우리를 은혜롭게 만들어 가신다.


그럼 그런 게 은혜라면, 은혜가 하는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 은혜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나는 이 점을 말하고 싶다. 은혜는 당신이 이미 만들어놓은, 꽤 괜찮은 종교적인 시스템을 포장하는 꽃이 아니다. 당신의 자랑스런 도덕성 위에 꽂는 장식품도 아니다.


은혜는 모든 것을 바꾼다


은혜는 우리를 구원하고 성화시켜 간다. 최소한으로만 설명한다 해도 은혜는 그래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자주 과거를 뒤돌아보는 게 은혜라고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게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 혼란이 생긴다. 이 말은 우리가 은혜를 받았지만 그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되지 않았고, 그렇기에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은혜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은혜에 관한 다음 다섯 가지의 오류들을 없애고, 또 은혜를 대적하는 세 가지 적들을 물리쳐야 한다.


은혜에 관한 다섯 가지 오류


1. 은혜 때문에 죄를 지어도 괜찮다

그러니까 은혜는 죄에 대한 일종의 허가서이다. 하나님이 언제나 은혜 속에서 용서하시는데 뭐하러 죄 짓지 않는 삶을 살려고 노력할까? “내 특기는 죄짓는 거고 하나님의 특기는 용서하는 거지. 이거야말로 천국에서 만들어진 기막힌 조화 아니야?” 이런 식의 생각은 하나님을 단순히 우리 죄를 용서하는 존재로만 간주한다. 그분은 하나님이고, 또 하시는 일이라고는 용서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간주해 버릴 때,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다. 은혜는 죄에 대한 허가서가 아니다. 은혜는 죄를 이겨내는 능력이다. 은혜를 통해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고, 또 죄인을 성인으로 바꾸어 가신다. 거룩은 은혜의 필수 조건이 아닌, 은혜의 결과인 것이다.  


2. 은혜는 마무리를 할 뿐이다

“네 일에 최선을 다해봐, 그럼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셔.” 이런 식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대부분의 일을 하는 건 우리 자신이고, 하나님은 너무 고생하는 우리를 위해 마지막에 도와주는 정도의 존재로 전락한다. 할 일은 우리가 거의 다하고 하나님은 마무리만 하면 되니까 얼마나 좋을까? “은혜는 마무리를 할 뿐이다”와 같은 식의 생각이 가진 심각한 문제는 너무도 광범위하게 퍼진 죄의 심각성을 위험할 정도로 과소평가한다는 점이다. 성경은 절대로, 우리가 마지막 결승선을 통과할 때나 되어야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성경은 우리가 지금은 생명을 얻었지만 한 때는 영적으로 죽은 시체였다고 말한다. 죄가 우리의 모든 존재 구석구석에 다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 그 때 비로소 은혜가 우리 힘으로 이룬 도덕적 성취의 마무리 정도에 필요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은혜는 기독교인의 삶의 시작이고, 과정이며, 또 끝이다. 죄에 대해서 정직할수록 당신의 마음은 은혜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된다.


3. 은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준을 완화하신 결과이다

거룩에 대해 대단히 집착하는 듯한 구약 속 하나님은 말도 안되는 기준을 백성들에게 강요했다고 흔히들 생각한다. “내가 준 율법을 지켜라”라는 말은 한 마디로 천국에서 휘날리는 깃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하나님이 다행히 신약에 와서는 정신을 차리시고 당신의 기준을 낮추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백성을 부족한 모습 그대로 사랑하기로 작정하셨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그런가? 틀렸다. 은혜는 하나님이 율법의 기준을 낮춘 게 아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 그 기준을 만족시킨 것이 은혜이다. 예수님은 완전한 삶을 살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과거에 실패했던 모든 언약들에 대해 예수님은 그것을 다 지키고 준수했다. 복음과 함께 성령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됨으로 기독교인들은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이 정한 거룩의 그 기준과 일치하는 삶이다.  


4. 은혜는 노력을 거부한다

“모든 건 다 은혜야”라는 말이 맞는다면, 인간의 노력은 확실히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가 한 때 말했듯이, “은혜는 노력을 거부하지 않는다. 은혜는 단지 공로(earning)를 거부할 뿐이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은 열심히 일해야 한다. 노력하고 땀을 흘리며 노동해야 한다. 그러나 그건 은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이미 받았기 때문이다. 복음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 동기를 주는 것은 더 이상 죄책감이 아닌 감사함이 되었다. 복음이야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이웃을 사랑하고, 정의를 행하고 또 바로 그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복음 그 자체이다. 빌립보서 2장 12-13절은 은혜가 동기가 되는 노력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5. 은혜는 거룩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다

비록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드러내놓고 하지 않을지 몰라도 꽤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생각을 품고 있다. 이런 사고가 발생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선한 사람만을 사랑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사람이 선하게 바뀐다는 것을 기억하라. 성경은 결코 선한 사람을 찾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신 죄악이 가득한 인간을 구원하는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좋은 소식이다. 은혜는 거룩하지 않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대신 은혜는 그들을 거룩한 사람으로 바꾸어간다. 반드시 이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헌신하겠다는 결심이 없이 고백되는 ‘그리스도를 위한 결단’은 삶 전체를 바치는 헌신이 아닌 단지 순간적인 기분의 결과일수도 있다. 


은혜를 대항하는 세 가지 적


1. 자만심

무료로 주는 선물을 거부하는 사람은 왜 그럴까? 내 능력으로 벌지 않은 선물 속에는 나의 공로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취지향적인 사람에게 은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은혜의 진짜 적은 은혜가 필요 없다는 생각이다. 종교는 약한 사람에게나 필요한 ‘목발’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은혜는 약한 이를 위한 목발이 아니다. 은혜는 정직함을 위한 근원이 된다. 내가 나 자신에게 정말로 정직하다면, 나는 안다. 내게는 목발보다 더 대단한 것이 필요하다는 것과 이제 새로운 마음이 필요하다는 사실 말이다. 은혜는 나를 지지하는 목발 같은 것이 아니다. 대신 은혜는 나를 안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나 나의 영광을 갈구하는 사람은 그런 은혜를 거부해 버린다.


2. 당연함

당연함은 다음 세 가지 단계를 가진다. (1) 감사함으로 선물을 받는다, (2) 선물받는 데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3) 선물을 당연시하고 아예 권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많은 기독교인이 빠져있는 함정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위험하다. 은혜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순간 은혜의 능력은 사라진다. 은혜는 사람을 감사하게 만든다. 그러나 당연함은 그 은혜를 아예 사라지게 한다.


3. 자기 연민

‘자만심’이 “나는 은혜가 필요없어”라고 말하는 것이라면 ‘당연함’은 “나는 은혜 받아 마땅한 사람이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 이 세 번째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은 뭐라고 말할까? “나는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어.” 이런 식의 감상적인 말은 종종 또 이렇게도 표현된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신 거 알아, 하지만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어.” 이런 말은 아주 겸손하고 또 자신을 대단히 낮추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허영일 뿐이다. 둘 중의 하나이다. 당신이 하나님보다 더 높은 도덕 수준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그리스도의 대속하신 죽음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말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은 죄보다 훨씬 더 위대한 구원자이다. 그분의 은혜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창녀로 가득한 왕국


자, 은혜에 관한 오류는 무너졌고 적들은 격퇴되었다. 그럼 이제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되는걸까? 창녀의 예를 들어보자. 마태복음 21장 31절에서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왕국이 거룩하지 않은 창녀들로 가득할 수 있을까? 두 가지이다. 하나님이 죄를 신경쓰지 않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죄인을 완전히 변화시켰거나 말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기준을 낮춰서 창녀로 가득한 왕국을 만드실 수도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성적인 죄, 불의 그리고 약자를 괴롭히는 것 등의 모든 죄가 하나님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복음을 주신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결코 그 죄를 그냥 간과하시지 않는다. 그는 희생제물을 통해 죄를 완전하게 처리하셨다.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고 무조건 다 왕국에 넣어주는 것은 듣기에 따라 아주 괜찮아 보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그런 왕국은 천국이 아닌 지옥일 뿐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창녀로 가득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죄를 간과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사랑은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만나지만 우리가 변하지 않은 채 계속 죄의 자리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뿌리 내리기 시작하면 우리는 삶에서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기준을 낮추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당신의 백성을 온전하게 변화시키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Grace Is Not a Thing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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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Jeremy Treat

제레미 트릿은 Wheaton College에서 박사학위(PhD) 받았으며, 현재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에 위치한 Biola University의 신약학 겸임교수이며, 미국 TGC의 이사로 섬기고 있다. 대표 저서로 'Seek First: How the Kingdom of God Changes Everything'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