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시는 하나님
by 전재훈2019-07-27

우리는 자주 신을 ‘능력’으로 상상한다. 공부를 특별하게 잘하는 사람을 ‘공신’이라고 부르고 전쟁을 하면 무조건 이기는 존재를 ‘전쟁의 신’이라고 부르듯,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를 신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를 만나주었던 하나님은 자신을 능력자로 표현하기보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의미의 야훼로 소개하셨다.


존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과 능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의 사고방식은 전혀 다르다. 능력이 없는 아버지라 할지라도 그분이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사람과, 아버지로서의 능력을 전혀 갖지 못한 사람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다르듯이 말이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이라면 자신의 존재를 능력으로 드러내야만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


‘능력 중심의 신관’을 가진 사람은 신을 경험한다는 것이 주로 기적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하고, ‘존재 중심의 신관’을 가진 사람은 신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신을 경험했다고 여긴다. 자신을 존재로 드러내신 하나님은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을 기록하셨다.


능력 중심의 신관을 가지면 언제나 우리의 행위에 초점이 맞춰진 성경해석을 하게 된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한다. ‘그를 믿는 자마다’라는 구절을 보면서 믿음의 ‘행위’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하고 말한다. 하지만 존재 중심의 신관을 가진 사람은 믿고 있는 ‘상태’에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네가 만약 예수를 믿고 있다면 너는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한다. 능력 중심은 자신의 행위가 강조되고 존재 중심은 ‘믿고 있는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강조가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설교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지를 설교하는 방향성이 결정된다.


마태복음 5장 13절과 14절에 나오는 ‘소금과 빛’에 관해서도 능력이 중요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반드시 ‘소금처럼 빛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존재가 중요한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를 ‘소금과 빛’으로 여기신다고 강조한다. ‘소금처럼 빛처럼’은 어떻게 사는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되고, ‘소금과 빛’으로 여기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자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는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수고를 설교하는 것과, 우리를 소금과 빛으로 삼으시기 위해 주님이 무엇을 하셨는지를 설교하는 것으로 나뉜다.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신 것을 두고 어떤 이는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신 말씀으로 듣고, 어떤 이는 ‘증인이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으로 듣는다. 명령이 강조가 되면 증인이 되기 위한 각종 훈련 프로그램이 중요하고, 예언이 강조가 되면 하나님의 섭리와 이끄심이 중요한 이슈가 된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둘의 차이는 극명하다. 능력이 중요한 사람들에는 성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성자 예수님이 구원을 이루셨고, 성령 하나님이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하셨다는 역할론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존재가 중요한 사람들에게는 삼위일체의 존재 방식이 관심의 대상이다. 세 분이면서 동시에 한 분이실 수 있는 존재 방식이 무엇일까?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깊이 관여하고,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얼마나 깊이 의존하고 계실지가 궁금해진다. 존재를 중요하게 여기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충분히 만족스럽고, 무한히 풍요로우시고, 전혀 부족함 없는 사랑을 누리고 계실 것이라고 짐작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대할 때, 어떤 이는 피조물로서 해야 할 마땅한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어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로서 하나님이 누리고 계시는 만족함과 풍요로움과 깊은 사랑에 참여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일꾼으로서 창조하셨는지, 아니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리시는 풍성함을 함께 누리기 위한 자녀로서 창조하셨는지 극명하게 다른 관점을 보인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범죄했다. 성경은 선악과를 따 먹으면 왜 안 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선악과를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결과만 설명한다. 그런 탓에 능력 위주로 성경을 보면 선악과를 먹은 것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명령을 어긴 행위로 보게 되고, 존재 위주로 성경을 보면 선악과는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가 깨어지는 것으로 본다.


선악과 사건을 볼 때 명령을 어긴 것으로 보면 그 벌이 중요하게 보인다. 남자는 땀을 흘려야 하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반대로 신뢰의 관계가 깨진 것으로 보게 되면 범죄한 인간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보이고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라는 메시아 예언 구절이 눈에 띈다. 이를 통해 비록 깨어진 관계이지만 다시 회복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된다.


아담과 하와 이후에 펼쳐지는 인류의 역사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고 인간은 어떻게 율법을 지키고 어겼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보는 사람이 있다. 반면 다른 이는 끊임없이 반역하는 인간에 대해 하나님이 무한히 오래 참으시고, 다양한 방법으로 다시 회복시키시고, 다시 백성으로 삼으시고, 다시 관계를 이어가시는 이야기로 본다. 전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상과 벌, 축복과 저주의 이야기에 눈길이 가고, 후자는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과 신랑이 되시는 이야기에 눈길이 더 가게 마련이다. 또한 이 둘은 하나님의 주시는 상과 벌의 내용에 관심을 갖는 것과, 하나님이 상과 벌을 주실 때 느끼시는 기쁨과 슬픔에 관심을 갖는 것의 차이를 만든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대할 때도 두 관점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능력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같은 일들을 좋아한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귀신을 쫓아내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일들을 볼 때 가슴이 뛴다. 존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고, 수가성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고, 죄 많은 여인의 향유를 받으시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는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에서도 어떤 이는 환호하는 무리가 보이고, 어떤 이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그분의 겸손함이 보인다. 전자는 성전 정화 사건에 관심을 보이고, 후자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시는 장면에 관심을 보인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에도 수건과 대야에 초점을 두는 사람이 있고, 가룟 유다의 발을 씻기시는 주님의 마음에 초점을 두는 사람이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흘리신 땀방울을 찬양하는 이가 있고, 번민하시는 주님을 묘사하는 사람이 있다.


고난당하시는 주님을 볼 때 능력이 중요한 사람은 주님이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고, 침뱉음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 박힌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존재가 중요한 사람은 가룟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이 중요하며,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신 주님의 부르짖음이 크게 들린다. 십자가 사건은 주님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받아야 할 죽음의 심판을 대신 받으신 대속의 사건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하나님께 버림받으시는 화목의 사건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부활하신 주님을 대할 때 사망권세 깨뜨리고 다시 사신 능력의 주님으로 바라보는 사람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사건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천국을 그릴 때도 금 면류관과 황금 길과 궁궐같은 집을 그리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아가는 곳으로 그리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하늘에서 받을 상에 관심이 있고, 후자는 하나님과 함께 누릴 관계에 관심이 있다. 능력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 천국은 침노하는 곳이고, 존재로 바라보는 사람에게 천국은 예비된 곳이다.


능력이 중요한 사람은 내가 회개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존재가 중요한 사람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회개케 하심을 고백한다. 회개의 내용도 자신이 이해하는 기준을 따라 잘못된 행동들을 고백하는 사람과, 행동 이면에 담긴 자신의 타락한 본성을 회개하는 사람이 있다. 회개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공로를 붙드는 반면, 예수님의 사랑을 붙드는 사람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만든 내 죄를 미워하며 회개하게 된다. 전자는 죽음의 권세를 두려워하고, 후자는 생명의 법을 기뻐한다. 둘 사이에는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과 서서히 성화되어 감을 기뻐하는 사람의 차이도 보인다.


구원의 확신도 자신이 선한 삶을 살고, 다양한 기적들을 체험하고, 엄격한 규칙들을 지켜 나갈 때 비로소 안심하는 사람이 있고, 이미 주님이 행하신 일들로 인해 구원의 확신을 두는 사람도 있다. 전자는 기도할 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후자는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을 기대한다. 자연스레 전자는 일의 성취가 기도 응답의 기준이 되고, 후자는 마음의 평강이 기준이 된다. 이 둘은 간구와 도고가 중심이 되는 기도 스타일과, 감사와 찬양이 중심이 되는 기도 스타일로 나뉜다. 신앙생활도 능력의 관점에서 신을 보는 사람은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지만, 존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기쁨의 연속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셨다. 그 안에서 충분이 만족스럽고, 서로 깊이 사랑하셨다. 그리고 더없이 풍요로움 안에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당신은 하나님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함께 누리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음을 만족케 하실 수 있으며, 오직 그 안에서 가장 깊은 안정과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이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사랑의 하나님이셨다. 우리가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사랑의 원형이 하나님이시고, 역사 속에서 실제로 보여준 가장 위대한 사랑이 십자가 사건이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했고 또 살아가게 한다. 그 사랑은 세상이 보여주지 못한 기쁨과 평안을 준다. 세상에서 당신이 무엇인가를 이뤄야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이미 인정하신 사람이므로 당신의 성공과 실패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지혜로 무엇이든 도전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행복을 누리고 만족한 삶을 살면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롬 5:6-10)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고 그 일로 인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롬 5:11)하게 하셨다.


오직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누리시는 충분히 만족스럽고, 무한히 풍요로우시고, 전혀 부족함 없는 사랑 안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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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전재훈

전재훈 목사는 서울장신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발안예향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오히려 위로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