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하나님의 제단
by Donald Macleod2019-08-10

모든 신자는 속죄 신학을 믿고 있다.


신앙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구세주를 믿는 것이며, 그 속죄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절대 그 신앙에 이를 수 없다. 우선 십자가에 죽으신 분을 아는 것이 신앙이라면, 그분이 왜 죽었는지를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분은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다. 


하지만 신앙은 그러한 기초 지식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신앙은 그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매일의 삶 속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더 깊이 추구하며 일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가장 먼저 이해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속죄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이를 정반대로 가르치고 있다고 종종 비난 받아왔다. 그리스도가 인간을 사랑하기 위하여 죽으심으로 격노와 복수심에 찬 하나님을 설득했다고 말이다. 이것은 분명히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가 아니다. 


아들을 주기로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으며(요 3:16; 요일 4:10), 그 사랑 자체는 어떤 이유나 시작점도 없다. 하나님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 사랑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장 위대한 패러독스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심은, 아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처럼, 그분의 본성 외에 특별한 무엇이 필요치 않았다. 그것은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사랑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존재하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 적이 결코 한 번도 없으시다. 그렇기에 우리 죄로 깨진 관계를 치유하시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그 사랑이었다. 그리고 주도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댓가를 모두 부담하기까지 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특별한 강조


하지만 신약성경은 구원의 기원을 추적하며 하나님의 사랑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특별히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아들의 사랑을 축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핵심 구절들 안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성부의 사랑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과 요한일서 4장 10절에서 명백하게 나온다. 요한 사도는 그 사랑의 본질은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아들을 희생물로 보내시는 아버지 안에서만 볼 수 있다고 선언한다.  


구원 사역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사명을 주고 나서 그냥 뒤 쪽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자기 아들을 내주신 이가 아버지셨고(롬 8:32),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분도 하나님이셨다(고후 5:21). 신약성경은 성부 하나님의 제사장직을 일관되게 언급하고 있다. 아들을 제단에 올린 분은 아버지셨다.

 

가장 어려운 부분


이 부분이 십자가를 이해하려 할 때 가장 어려운 면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자신을 희생하셨다는 측면은 비교적 잘 이해한다. 그분이 세상을 긍휼히 여기심으로 마음이 움직이셨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행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분은 어떤 권리로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셨는가? 수많은 속죄 신학 이론들이 제대로 설명을 해내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많은 속죄 이론들은 아들의 행위는 설명할 수 있지만, 아버지의 행위는 잘 설명해 내지 못한다.


하나님이 갈보리에서 행하신 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것 하나는 그것이 옳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 스스로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고 있다고 선언하는 이유 때문에 옳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마땅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논란은 끝났다. 성자 예수님이 그분의 백성들의 죄를 자신의 죄로 취하기로 성부와 성령과 함께 동의하고 영원한 언약을 하셨기 때문에, 아들을 죽게 하신 하나님의 행위는 마땅한 것이었다. 인간의 죄가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저주를 대신 당한다고 했고,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죄를 위해서 그것을 담당한다고 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일컬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와 저주에서 자유케 하기 위하여 몸값을 지불하는 대속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필요했을까? 하나님이 그냥 특별 사면을 허락하실 수는 없었는가?


그분의 노하심이 누그러졌다 


여기에서 진짜 문제는 하나님이 죄로 인해 더 이상 분노하지 않기로 선택하실 수 있었는지이다. 하지만 바로 그 질문은 그분의 분노가 처음에 선택의 문제였다는 예상을 하게 한다. 마치 세상의 죄를 마주하게 된 하나님이 앉아서 신중히 생각하고 나서, 결국에 “그래, 내가 생각해 보니 죄로 인해 분노해야겠다.”라고 결정했다는 듯이 말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마주 대하게 되는 사악한 것과 불의에 이런 식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분노로 반응하는 것은, 그렇게 하기로 우리가 결정해서가 아니라 사악함이 우리의 본성을 격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매우 싫어하시는데, 이것은 그분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본성 때문이다. 그분은 거룩성 때문에 우상 숭배와 비인간성에 분노하신다. 그분의 노하심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달래져야 했다.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 죄 때문에 노하고 계신 상태에서 화해한다는 점은 어떤 면에서 보면 엄청난 모순이다. 그리고 죄를 용납하는 신적 용서는 그분 스스로 하나님이시기를 포기하신 모순이기도 하다.


이것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죽어야 했던 이유이다. 때로 그것을 단순히 하나님의 노여움을 달래주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그보다는 죄를 용서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만족하시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순종함으로 우리 죄를 속죄하셨고, 죄를 속죄하심으로, 하나님을 달래셨다.

 

갈보리에서의 영광


하나님이 죄를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법천지에서 살게 된다. 그리스도가 그분을 달래지 않았다면, 그 분노는 여전히 타오르고 있고 언젠가 그것은 우리를 집어삼킬 것이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칭의 규정이 없다면 복음 전체가 의미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칭의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다. 속죄가 칭의보다 우선한다. 우리는 그분의 피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롬 3:25). 그리고 성육신이 먼저 있어야 속죄가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그분이 인간으로 오심에서부터 진행된다.  


신앙은 갈보리 십자가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결정하는 단 하나의 사건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이가 영광의 주님이기 때문에 그것은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The Cross: God’s Altar

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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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Donald Macleod

도날드 맥크라우드는 에딘버러에 위치한 Free Church of Scotland College에서 30년 넘게 조직신학 교수로 섬겼다. 대표 저서로 'The Person of Christ'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