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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벌적 대속론을 정립해준 세가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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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Daniel Hames  /  작성일 2019-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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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David Beale on Unsplash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셨다는 메시지를 귀에 못이 박히게 강조하는 복음주의 교회에서 나는 어릴 때부터 자랐다. 여름 수련회, 휴일 특별 성경공부, 그리고 주일학교 토론회 등의 모든 모임에서 핵심 메시지는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였다. 나를 대신해서 나의 죄와 내가 받아야 할 형벌까지 대신 짊어지고 예수님이 죽으셨다. 그 결과 이제 나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고, 그분과 영원히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 신학책을 찾아 읽기 시작하면서 또 내 믿음을 점검하면서,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랐던 믿음에 대해서 나는 점점 더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 여태 알고 이해하던 기존의 십자가와 구원에 대해서 전혀 다른 방향에서 진지한 질문을 던진 몇 분의 저자들의 책을 읽게 되었다. 브라이언 맥라렌(Brian McLaren)이 쓴 ‘새로운 종류의 기독교인’(A New Kind of Christian)과 스티브 초크(Steve Chalke)와 알란 맨(Alan Mann)이 쓴, 이제는 꽤나 유명해진 ‘잃어버린 예수의 메시지’(The Lost Message of Jesus) 중 다음 부분도 읽었다. 


“십자가는 우주적으로 저질러진 아동 학대 범죄가 아니다. 십자가는 복수하는 아버지, 아들이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 때문에 아들을 벌하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중략] 만약에 십자가가 정말로 하나님에 의해 저질러진 인류를 향한 폭력의 행사라면, 단지 아들이 대신 그 폭력을 당하도록 한 것이라면, 그거야말로 예수가 자신의 가르침,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스스로 우습게 만드는 꼴이 된다. [중략] 하나님은 화가 난 신이고, 그의 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희생제물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은, 정말로 고대 이방신의 모습에 더 가깝지 결코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의 모습일 수는 없다.”


나는 안셈(Anselm)의 만족설(theory of satisfaction)에 관한 비판을 읽었다. 비록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이론이지만, 그것도 결국 고작해야 중세 서구의 법의학 수준에 그친다는 비판이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진노한 신이라는 생각, 그러니까 그 진노를 달래기 위해서 반드시 희생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정말로 고대 이방신에게나 어울리는 생각이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런 추측도 가능하다. 초기 기독교 작가들은 이런 이교도 신들에게서 모티브를 가져왔지만, 거기서 한 걸음 벗어나서 하나님의 진노와 죄의 대가, 그리고 대속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 형태로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사고는 브래들리 저색(Bradley Jersak)이 이야기했듯이, 단지 “칼뱅의 상상이 만들어낸 법정 드라마” 정도로만 부각될지 모른다. 결국 이런 시각은 다 하나님을 화난 존재로, 아들을 희생자로 그리고 나는 감사해야 하는 존재로, 무엇보다 십가가형이 주는 폭력적인 공포의 수익자로 만든다.


어릴 때부터 들어서 익숙해진 속죄에 대한 이런 그림은 끔찍할 정도로 왜곡되고, 단순하고 또 역사적으로도 전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는 좀 앞으로 나가야 할 때가 되었다.


거기로 다시 돌아가서


그러나 몇 년에 걸쳐서 신학적인 혁명을 가져온 책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그들의 결론이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릴 때 이해한 십자가가 정말로 너무 단순하고 순진했던 걸까? 물론, 난 아이에 불과했다. 따라서 주일학교 이야기를 비판한 성인들의 글을 읽으면서 그들과 함께 내 과거를 코웃음 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중고등부 시절 붙잡았던 믿음을 해체하고, 내가 좋아하게 된 새로운 작가들의 생각에 근거해서 당당하게 그 믿음을 던져버리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심각한 수준의 속죄 신학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게 진정한 신학적인 혁명일까? 나는 칼뱅, 이레니우스(Irenaeus), 안셈 또는 아나스타시스(Athanasius)의 글을 읽은 적은 없다. 솔직히 성경을 진지하게 읽은 적도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사실은 내게 심각하게 경고하는 듯 보였다. 기존의 신학을 제대로 모르면서 새로운 신학에 파고드는 것은 나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어처구니없는 길이었다. 나는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한 때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던, 복수심에 불타는 이방신의 이미지를 닮은 하나님, 사랑없는 하나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믿고 있던 진짜 하나님과 조금도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새롭게 인지했던 하나님에 대한 여러 생각들은 도대체 얼마나 믿을만했던 걸까?


다음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을 다시 정립시켜 주었다. 이제 나는 신앙이 처음 뿌리내린 바로 그 지점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1. 진짜 성경을 제대로 읽기


누구든지 이사야서 53장 5절과 고린도후서 5장 21절과 같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았다는 ‘결정적인’(clobber) 구절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동시에 얼마든지 이런 구절을 다르게 해석하고, 또 다른 구절들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전혀 다른 십자가를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을 보다 깊이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성경의 위대한 주제와 유형에 비추어 이 본문들을 보게 되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동물 가죽,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숫양, 유월절 양과 맏아들, 출애굽할 때 닥친 심판의 날, 그리고 예수님이 죽었을 때 온 세상을 뒤덮은 어둠, 이 모든 사건을 대속과 우리를 대신해서 흘린 피라는 의미를 빼고 나는 도저히 다른 방법으로는 해석할 수가 없다.


실제로 전체 주제를 고려해 통합적으로 성경을 읽음으로, 또 구약을 복음의 예시라는 관점에서 읽음으로, 나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졌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메시지이지 결코 곁다리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결코 의도적으로 조작된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삼위일체


어린 시절에 들었던 십자가에 대한 설명 중 일부는 삼위일체에 근거한 게 아니었다. ‘하나님’은 죄를 너무 싫어하기에 어떻게든 우리를 구원할 방법을 찾는 분이었고, ‘예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든 일종의 제3자였다. 이런 설명도 일부는 맞다. 그러나 너무도 단순한 이런 설명은 복음과 삼위일체를 왜곡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물론 나를 가르친 주일학교 선생님 중에서 그 누구도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은 없었고, 나는 고작해야 열 살이었다. 그런 우리였기에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런 부족함에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성경에 따르면, 성삼위 하나님의 삼위 모두가 다 죄로 인해서 손상을 입었다. 그래서 삼위 하나님 모두가 다 이 죄를 함께 진멸하고 인간을 자유롭게, 세상을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로 결심했다. 예수님은 영원한 아들이고 그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영원을 위한 계획에 따라서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기로 선택되었기 때문이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까지 보면, 인간이 되기 전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육체를 입기로 결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종이 되어 죽기까지 죄인들을 위해서 순종했다. 진노의 잔을 앞에 놓고 겟세마네에서 드리는 그의 기도를 보면,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구원을 이루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마 26:42).


‘복수하는 하나님’과 ‘죄 없는 예수님’을 굳이 서로 대척점에 놓을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이 바로 죄를 싫어하고, 또 죄인을 구하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저주하는 바로 그 사건에 스스로 참여한 아들의 공모(complicity)는 복음의 가장 영광스러운 진리 중 하나이다. 이 진리를 분명하게 알게 됨으로 우리는 믿음을 더 굳건히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사랑까지 더 잘 보게 된다.


3. 역사 속에 드러난 교회의 증거


예수님이 마지못해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능동적으로 십자가를 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형벌적 대속(penal substitution)이 속죄 이론 중에서도 나중에 만들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그에 대해 많은 신학자들이 비난을 여전히 되풀이하는 것에 놀라게 되었다. 그리고 형벌적 대속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듣는 건, 왜곡과 혀가 꼬이는 이상한 소리(lisping) 뿐일 것이라는 비판도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기독교 초창기 변증에 관한 글을 하나 보도록 하자. 2세기에 쓰인 마테데스(Mathetes)가 디오그네투스(Diognetus)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얼마나 달콤한 교환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역사하심! 모든 기대를 뛰어넘는 혜택! 많은 사람의 사악함이 한 명의 의로운 이로 인해 숨겨지고, 그 한 의로운 이가 수많은  범죄자를 다 의롭게 만들다니!


시편 51편 주해를 하면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썼다.


“주님조차도 죽음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건 죄로 인한 게 아니었다. 그분은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아들였고, 그리고 우리의 죄악을 없앴다. [중략]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다, 다름 아닌 원죄 때문에 말이다. [중략] 그렇기에 화해를 위한 중보자가 필요했다. 한 번의 희생을 바침으로써 율법과 선지자가 행한 모든 희생이 예시하던 그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는 사라졌다. [중략] 이제 하나님이 화가 났다고 할 때, 우리는 이제 그것을 분노한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왜곡된 감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의 감정을 기초로 해서 비유로 전달된 단어, ‘분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단지 죄에 대한 그의 불만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고대의 노래조차 진노를 대신 받아서 짊어진 그리스도의 희생을 찬양한다. 1500년 전에 쓰인 베난시오 포르투나토(Venantius Fortunatus, AD 530–607)의 아름다운 찬양, ‘보아라 예정된 날이 시작된다’(See the Destined Day Arise)는 이렇게 시작한다.


“보아라, 예정된 날이 시작된다. 기꺼이 희생제물이 된 이를 보아라. 예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저 부끄러운 십자가에 달렸다. 예수, 그가 아니면 다른 그 누가 하나님의 위대하고 공의로운 진노를 감히 대신 질 수 있을까? 모든 고통, 모든 가시, 저주받은 너의 삶을 회복한다.”


나는 또 현대 복음주의 클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The Cross of Christ)와 제임스 패커의 ‘십자가가 성취한 것은 무엇인가?’(What Did the Cross Achieve?)를 읽고 그들의 관점 또한 내가 과거 신학 고전 속에서 발견한 것과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할렐루야, 얼마나 놀라운 구세주인가!


아마도 어렸을 때 내가 이해한 십자가는 얕은 수준이었을 것이다. 당연하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신학을 통해서 또 교회 역사를 통해서 나는 예수님의 죽음을 응시했고 또 동시에 나의 위치와 내 죄를 바라보았다.


십자가에 대한 각종 사례는 잘못된 것들이 적지 않기에 제대로 된 언어를 사용해서 표현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대표성, 머리됨과 하나됨, 악한 세력이 전복, 십자가를 통한 전 우주적 승리 등의 가장 중요한 개념만은 달라질 수 없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모든 진리는 다 어릴 때 배운 말씀을 통해 내 속에 저장되었던 ‘좋은 기초’(good deposit)가 있었기 때문에 더 강화되고 풍성하게 될 수 있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3 Reasons I Changed My Mind About Penal Substitution

번역: 무제


작가 Daniel Hames

다니엘 하메스는 Michael Reeves의 보좌관으로, 현재 Free University of Amsterdam에서 박사과정 중이며, Union School of Theology에서 조직신학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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