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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로 세워가는 하나님의 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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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J.Mark Beach  /  작성일 2019-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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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Szilvia Basso on Unsplash

부모들은 자녀들보다 훈계의 유익을 더 잘 안다. 나는 어렸을 때 벌을 받았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벌을 받았더라도 그것을 그리 크게 생각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때에도 나는 나 자신을 변호하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받은 벌의 심각성을 고심하고, 부모님이 내리신 평결의 성급함과 죄와 벌의 불균형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 베개 속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었다. “불공평해!”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나이가 조금 더 들어서야 나는 좀 더 명확한 시각으로 부모님의 훈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지금 나는 그때 부모님이 사랑으로 훈계해 주셨음에 감사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훈계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가? 그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보는가?


우리는 믿는 자들로서 이러한 어린 시절의 교훈을 신앙의 삶에 적용하는 것은 잘 하지 못한다. 때로 철없는 아이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훈계를 바라보곤 한다. '왜'라는 질문이 충동적으로 일어나 괴로워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우리는 놀람이나 불만 혹은 의심으로 어리둥절해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에 의문을 갖는다. 하나님의 동기를 묻는다. 아이로서 부모의 훈계를 대하듯이, 우리는 고난의 심각성과, 적절성 그리고 판결의 정당성을 묻는다. 내가 왜 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이것은 히브리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상황과 잘 맞아떨어진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의 청중인 유대 크리스천들에게 현재의 시험과 고난을 영적 성숙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라고 촉구한다.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들을 인도하는 방식이라고 기억하도록 격려한다. 우리 모두는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이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히 12:5). 이 말씀은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는, 앞에 나오는 권고의 일부분이다. “십자가와 죄인들의 거역을 참으신” 분을 기억하라는 훈계이다(12:2-3).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이 마치 아버지가 그러함과 같이 우리에게 주시는 “권면”이나 “격려”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여기에서 사용된 특정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성령에 대해 사용된 단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옹호자” “위로자” 혹은 “조력자”로 불렸다. 요한복음에서 그 단어는 파라클레토스(paraclētos)이며, 히브리서에서는 파라클레시스(paraclēsis)이다. 히브리서 저자가 청중들에게 잊지 말라고 하면서 말한 하나님을 묘사하는 이러한 위로의 단어는 사실 잠언 3장 11-12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잠언의 저자는 이를 설명하기 전에 우리에게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아야 하며, 둘째, 징계를 받았을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훈계는 마치 아버지같이 우리를 돌보심에 근거하고 있다. 요점은 명백하므로 우리가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고난당하여 씨름하고 있을 때, 실망과 핍박을 받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를 잊지 않으셨고, 우리를 불량품이나 달갑잖은 존재로 취급하지도 않으셨다. 정반대로, 우리를 그분의 아들과 딸로 대우하고 계신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주제를 확장한다. 그는 이것을 사방으로 포위된 신자들을 사랑으로 양육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린다. 우리의 육신의 부모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한다”(히 12:9)고 말한다. 저자는 “자기의 뜻대로”라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부모들에게 잘못이 없지 않다는 점을 밝힌다. 부모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우리를 키우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그들을 공경한다. 일반적인 상황 안에서, 성인으로서, 특히 자녀들을 두고 있는 우리는 자신을 키워주신 부모님의 노고에 감사한다. 우리를 더 나아지게 하고 우리의 품성을 더 발달시키려고 노력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공경한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방법, 충동을 저지하거나 혀를 제어하는 방법을 부모로부터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부모들처럼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기 위하여 훈계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이 하고 있는 일을 스스로 아신다. 그분은 자신의 자녀를 키우는 데에 있어서 어느 것이든 모르거나, 잘못 인도하거나, 불공평하게 하신 것이 전혀 없다. 훈계가 즐거워 보이는가? 히브리서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인다]”(12:11). 훈계가 불쾌하다는 점은 피할 길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교정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훈계는 우리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죄된 태도와 행동, 생각과 말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게 만든다. 우리의 습관을 더 나은, 더 성경적인 관점으로 보게 한다. 그 길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는 보상으로 복을 받는다.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1절).

 

“그로 말미암아 연단을 받은 자들은”이라는 핵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유대 크리스천들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연단”을 받도록 권고받는다. 다시 말하면, 훈계가 효과를 얻으려면, 그들이 고난받는 것을 그냥 견디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연단”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그로 인해 배워야만 했다. 왜냐하면 학교에 가는 것만으로 배움이 거저 보장되지 않듯이, 고난을 받는다고 “연단”이 그냥 자동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큰 고난을 당했지만 그다지 배운 것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훈계로 “연단”받은 이들은 하나님과 우리가 볼 수 있는 “의의 열매”를 맺는다. 


욥의 이야기는 이 점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욥은 가장 심한 믿음의 시련을 당했다. 그의 삶을 강타한 비극은 그가 죄인이었기 때문도 아니고 그의 죄 때문도 아니었다. 그는 신실했기 때문에 시험을 당했다(욥 1:1, 8; 2:3). 사탄은 욥의 시련을 통해 그가 신앙을 저버리는지를 보려는 한 가지 목적만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그가 연단을 받아 의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한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 욥은 거의 모든 가족을 상실했고, 그의 부와 건강까지도 잃었다(이 모든 것이 지독하게도 시기가 잘 짜 맞춰졌다). 그의 아내도 그를 버렸다. 그녀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고 조언했다. 욥은 이 모든 무지막지한 일을 겪었다. 그 다음에 친구들이라 하는 사람들로부터 추궁을 당했다. 그들은 그에게 선한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다며, 그가 그의 죄 때문에 괴로움을 당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회개하라”(욥 8:5-6; 15:4-5 등)고 조언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 말씀을 교훈으로 아는 사람이었으며, 그래서 위로자들이어야 했던 사람들을 상대로 자신의 경우를 변론했다. 그는 하나님께도 추궁했다. 혼란스러움으로 비틀거리는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기를 요청했다. 하나님이 설명해 주시기를 원했다. 마침내 하나님은 말씀하셨지만, 추궁을 받은 것은 주님이 아니라 욥이었다(38장).


결국, 욥은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했다(42:6). 고난 중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것을 회개했다. 그는 “낙심”한 것과 하나님께서 정의와 고난을 통해 그를 향한 선한 목적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의심한 것을 회개했다. 하나님의 지혜와 호의와 사랑에 의문을 품은 점을 회개했다. 하나님이 그 시련을 그를 위하여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점을 회개했다. 그리고 그것이 히브리서 저자가 유대 크리스천들에게 말하고 있는 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련을 “우리를 위한” 훈계로 사용하신다.     


이것을 믿으려면,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를 훈계하신다. 하지만 상황들은 우리를 주목하게 하고, 하나님은 모든 종류의 이목을 끄는 상황들을 사용하신다. 실직, 장난이 심한 어린 아이, 문제가 있는 십대 자녀, 부상, 질병, 이혼, 사고 등 수없이 많은 상황들을 모두 사용하신다. 그 짐들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욥의 경우는 거대했다. 


그의 시련과 비교하면 우리의 것은 작을 수도 있다. 시련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하나님은 그분이 사랑하는 이들을 훈계하신다. 시련과 어려운 상황에 주목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바르게 교정시키는 작용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바르게 수정하고, 위로하며, 책망하고, 훈련시키기 위해 귀에 들리는 음성으로 작용한다. 이것이 아버지 같은 “훈계”이다. 훈계(discipline)라는 단어가 또 다른 성경적 단어인 제자(disciple)와 얼마나 가까운지 주목해 보라. 하나님의 훈계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든다. 우리가 맞이하는 시련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와 하나님 나라에 더 봉사하는 제자가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설계이다.


당신이 겪는 어려움으로 인해 바르게 되고 “훈련”받고 있는가? 하나님의 훈계로 그리스도의 적합한 제가가 되어 가고 있는가? 하나님의 훈계는 믿는 자들에게만 해당한다. 그것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도 생의 역경을 통해 많을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도 시련을 겪은 후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역경이 그들을 성화시키지는 않는다. 그들은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을 훈계하시지만, 이는 그들을 성화시키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훈계는 사랑의 조치이다. 그것은 우리를 망치려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함으로 사랑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훈계를 통해 우리를 제자로 만들고 계신다.  

 

하나님의 훈계하시는 음성이 귀에 들린다면(아마도 우리가 대면하는 어려운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잠시 멈추고 그분의 음성을 경청하게 할 것이다), 불신앙에 작별을 고하고, 죄의 고리를 끊으며, 고집스런 습관과 태도, 악한 감정과 의문, 혹은 자기 연민으로부터 후회 없이 떠나야만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지혜로운 그리고 순종하는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중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 나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이라고 기도하기를 배우라.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The Blessing of God’s Discipline

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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