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순종
by John Piper2019-11-30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되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회복된다고 가르친다(롬 5:19; 고후 5:21; 롬 4:6, 11: 10:3). 이 가르침은 그분이 공생애 마지막 순간, 십자가에서 고통당하고 돌아가신 사역만으로는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거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내용을 함축하는가?


이런 질문은 칭의의 원인을 특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해서 설명하는 본문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본문은 이러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롬 5:9).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위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죄 사함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무죄한 생애를 주장하는 가르침은 흠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감당하신 사역만으로는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충분하지 않다는 내용을 함축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의 죗값이 탕감받고 용서받는 일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치는 본문을 찾을 수 있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 2:1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 53:5).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계 1:5).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할 만큼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려면, 그 죽으심이 바로 ‘무죄한 생애의 절정으로서’(as the climax of a sinless life) 이해되어야만 한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처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완전하고 죄가 없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밝힌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히 7:27-28).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9).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사건은 그분이 사신 무죄한 생애의 절정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덮는 효력을 가지는 것이다. 이는 십자가 사건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설명이 아니다. 또한, 그 사건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설명도 아니다. 신약의 저자들은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공생애의 절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분의 전 생애가 바로 그 십자가를 향하도록 계획된 삶이었다고 증언한다(막 10:45; 요 12:27; 히 2:14). 그분이 태어나서 이 땅에서 사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죽으심이 지닌 구원의 효력을 논하는 일은 그분이 사신 무죄한 삶의 절정이자 결론으로서, 그 죽으심이 과연 어떤 효력을 갖는지 논하는 일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마지막 순종은 무죄한 생애의 절정에서 이뤄진 행위로서 그 백성을 의롭다 하기에 충분하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이신 순종을 십자가에 이를 때까지 보이신 순종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과연 어느 시점에서 그 둘을 분리할 수 있겠는가? 그분이 십자가에 못이 박히도록 자신을 내어주신 시점에서인가? 아니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시던 시점에서인가? 마지막 만찬에서 자리를 떠나는 유다의 모습을 지켜보시던 시점이나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눅 9:51)하신 시점에서인가? 그도 아니면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라고 말씀하시며 세례를 받으시던 시점에서인가? 그 어떠한 시점에서도 예수님의 순종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인위적인 결과만 낳을 뿐이다.


따라서 바울이 칭의의 원인으로서 예수님의 순종에 관해 설명할 때도 그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보이신 순종만이 아니라 공생에 전체를 통해 보이신 순종의 절정으로서 십자가 사건을 언급했을 가능성이 높다. 빌립보서 2장 7-8절은 그와 같은 생각을 잘 보여 준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서 바울의 생각은 이렇게 진행된다. ‘그분은 사람이 되셨다. 즉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 그리하여 자기를 낮추셨다. - 자기를 낮추신 방법은 복종이었다. - 그 복종은 죽음도 기꺼이 감수할 만큼의 완전한 순종이었다. - 심지어 그 죽음은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사건인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이 사신 생애의 시작점에 일어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사건’과 그 생애의 종결점에 일어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 사이에는 자기를 낮추시어 순종하신 삶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 순종의 삶이 결국에는 가장 끔찍하면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십자가에서 정점을 이루었기 때문에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그분의 모든 순종이 지향한 절정이자 결론으로서 설명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몇 시간의 순종을 그 이전까지의 순종, 즉 처음부터 그 죽음의 시간을 향해 철저하게 계획된 삶을 살아오며 보이신 순종과 분리한다는 것은 바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을 그 이전의 모든 순종과 구분해서 말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여기서 아담의 경우에는 한 가지 죄로 인해 완전히 실패하게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생애 전체를 통해 완전히 승리하게 되셨다. 이런 방식으로 두 사람의 불순종과 순종은 대비된다.


바울이 아담의 “한 범죄”와 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위”를 비교할 때, 그는 아담이 금기의 열매를 먹은 행위에 상응하는 어느 한 가지 행위가 그리스도의 생애에 있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아담처럼 또다시 실패하지 않으려면 전 생애에 걸친 순종이 필요하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단 한 가지 범죄만으로도 아담처럼 실패하기에는 충분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둘째 아담이 되기 위해서는 생애 전체에 걸친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이 바울의 요지이다. 이처럼 완전한 순종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생애는 제자들로 하여금 ‘십자가’와 ‘죽음’이란 결코 그 이전의 삶과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그분이 보여 주신 순종의 절정이자 결론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한다.


이제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관한 교리는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데 십자가 사건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내용을 함축하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그렇지 않다’이다. 우리의 죄악을 처리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분이 완전하게 순종하신 삶과 동떨어져 이해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 완전한 순종의 삶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를 얻게 만드는 최상의 행위,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동떨어져 이해될 수 없다. 결국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완전한 순종으로 무죄한 삶을 사신 생애의 정점에서 이루어진 행위였기 때문에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한 충분한 근거가 된다. 또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는 칭의의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The Sufficiency of Christ’s Obedience in His Life and Death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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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John Piper

존 파이퍼는 desiringGod.org의 창립자이며, Bethlehem College & Seminary의 총장으로 33년 동안 미네소타에 위치한 Bethlehem Baptist Church의 담임목사로 섬겼다. 대표작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라’가 있으며, 최근 저술한 ‘내가 바울을 사랑하는 30가지 이유’​ 외에 5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