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필요한 문화 변증학
by Elliot Clark2021-01-04

이제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개연성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잘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활이 왜 중요한 문제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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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기 위해 교회는 오랫동안 변증학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왔다. 그런데 서구 문화가 기독교를 향해 던지는 물음이 급변함에 따라, 변증학의 대응도 바뀌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예컨대 최근에 일어나는 기독교에 대한 의문은 순수하게 이성적인 물음에 속한다고 분류할 만한 내용이 별로 없다. 이제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개연성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잘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활이 왜 중요한 문제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활의 소식이 왜 ‘좋은’ 소식인지도 당연히 알지 못한다.


이에 새로운 기독교 변증학자들은 합리성의 문제를 넘어서는 다른 접근을 통해 교회에 변증학을 가르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런 시도를 하는 학자들 가운데 한 명이 오클라호마 침례 대학에서 철학과 변증학을 가르치는 폴 굴드(Paul Gould)다. 그는 최근에 ‘문화 변증학: 환상으로부터 벗어난 세상에서 기독교인의 목소리와 양심과 상상력을 회복하는 법’(Cultural Apologetics: Renewing the Christian Voice, Conscience, and Imagination in a Disenchanted World)이라는 제목이 달린 유익한 책을 저술했다.


이 의미심장한 작품에서 굴드는 다양한 문화적인 질문을 다루며 그에 대해 깊이 있고 폭넓은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 한스 부르스마(Hans Boersma), 피터 크리프트(Peter Kreeft)를 비롯한 현대 신학자들의 주장을 많이 활용한다. 그러면서도 전통적인 교회 역사의 사상가들도 깊이 반영하여 어거스틴으로부터 아퀴나스를 거쳐 그의 논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C. S. 루이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설명을 제공한다.


아마도 ‘문화 변증학’에서 굴드의 접근 배후에 자리한 가장 중요한 사상은 바로 루이스가 자신의 에세이 ‘자전거에 관한 이야기’(Talking about Bicycles)에서 선보인 사색일 것이다. 이 에세이에서 루이스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게 되는 인생을, 환상에 빠질 수 없는 시기(Unenchantment), 환상에 빠지는 시기(Enchantment), 환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시기(Disenchantment), 그리고 간혹 이상적으로 경험하곤 하는, 환상에 다시 빠지는 시기(Re-enchantment)라는 네 단계로 구분해서 묘사했다. 굴드의 저술 목적은 신자들로 하여금 바로 그 ‘환상에 다시 빠지는 시기’를 경험하게 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경험이 효과적인 문화 변증학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굴드가 이해하는 ‘환상’이란, 평범한 일상을 영광스러운 선물로 받아들이며 그에 대해 예배로 반응할 줄 아는 상태를 일컫는다. 따라서 그 환상은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이 제시한 비전인 ‘선교적 충돌’ 즉 복음과 문화의 충돌이 이미 환상으로부터 벗어난 서구 문화에 다시금 일어날 수 있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


확장되는 카테고리


이와 같은 굴드의 시도는 ‘총체적인’(holistic)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기독교인의 목소리와 양심과 상상력을 다시 구축하려고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세상이 어떻게 우리의 메시지를 인식하는지에 관심을 가지면서, 동시에 세상이 어떻게 우리를 인식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 이런 관심이 책의 논조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의문을 관대하게 받아 주면서도 그에 대해 올바른 논증을 제시하는 접근을 취하는데, 이는 구체적인 변증학의 과정을 보여 준다. 이런 방식으로 굴드는 변증학의 카테고리를 명제 중심의 방법 너머로 확장시키고 있으며, 문화의 옷을 입은 실천적인 신앙의 필요성을 구체화하고 있다. 즉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할 뿐 아니라 그 복음을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굴드의 방법은 사실과 증거만을 취급하지 않는다. 그는 기독교의 매력을 중요하게 다룬다. 즉 그가 제시하는 문화 변증학은 하나의 체계로서 기독교의 진정성을 논증하되 어떻게 기독교가 존재해야 하는지만이 아니라 기독교가 과연 어떤 세계인지를 보여 주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따라서 그가 이해한 대로라면, 우리의 사명은 기독교 신앙을 이성적일 뿐 아니라 갈망할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제시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굴드의 논의에서 반복되는 주제가 있다면, 이러한 변증학적 접근은 상위문화와 대중문화 모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문화가 대규모로 소비되고 구현되는 대중문화에 참여해야 할 뿐 아니라, 사상과 창조 활동의 중심부로서 문화의 원류가 흘러나오는 상위문화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따라서 교회는 학계와 예술과 정치 모두에 대한 기독교인의 투자를 장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굴드는 이러한 포괄적인 접근이 세계적인 수준과 지역적인 수준에서 함께 일어나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굴드의 작품은 최근 등장한 더욱 총체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기독교 변증학의 틀에 속한다(이에 대한 또 다른 예로는 홀리 오드웨이[Holly Ordway]의 ‘변증학과 기독교인의 상상력’[Apologetics and the Christian Imagination]을 들 수 있다). 이 새로운 기독교 변증학의 주창자들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일어난 순전히 이성적인 접근에 반대한다. 그래서 변증학의 방법론에 그동안 자리해 온 ‘증거주의자’(evidentialists) 대 ‘전제주의자’(presuppositionalists)라는 대립과 그에 따른 논쟁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굴드는 그의 방법론이 인식론에 대한 여러 가지 접근들과 통합을 이룰 수 있을 만큼 그 어떠한 체계와도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굳이 성격을 규정한다면, 그는 문화 변증학이 근대 이후의 방법론보다 더욱 통합적인 형태를 갖춘 고전적인 방법론을 지향한다고 간주한다.


의문의 여지가 있는 전제


비록 굴드의 시도가 ‘기존의’ 접근과는 다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논증이라는 방법 자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와 달리, 책의 상당량은 갈망과 이성과 도덕성을 모티프로 삼아 (일반적으로는 유신론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는 삼위일체적 기독교 신앙에 대해) 변증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많은 논의가 정말 통찰력 있게 개진되며, 굴드 자신의 경험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아름답게 제시될 뿐만 아니라, 최근 학자들의 의견까지도 반영하고 있다. 사실 나는 굴드가 주장하는 내용에 거의 동의하기 때문에, 그의 논증을 여기서 비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을 형성하는 일부 전제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문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로, 서구 사회가 진정으로 환상에서 벗어난 세상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많다. 물론 세속적인 서구 문화가 이성주의(rationalism)와 자연주의(naturalism)의 영향으로 영적 실재에 무감각해졌다는 관찰은 일리가 있다. 게다가 유물론(materialism)이 여전히 득세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잘못된 영적 존재나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이교 사상이 또한 현대 문화 속에 확산되고 있다(개인적으로는 내가 사는 미니애폴리스 지역에도 그와 같은 이교 신앙이 침투했음을 작년에야 알게 되었다). 이는 굴드 자신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단순히 환상이라는 주제만으로는 변증을 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왜냐하면 거짓된 환상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추측하건대, 민간 설화나 신화와 같은 다양한 문화적 현상을 통해 이미 그런 환상은 우리 가운데 만연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교회가 ‘탑다운’ 즉 위에서 아래로 하달하는 방식으로 문화적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생각에 성경이 정말 동의하는지 의문이 든다. 나는 이 의문이 어쩌면 앞서 제기한 의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로드 드레허(Rod Dreher)의 ‘베네딕트 옵션’(Benedict Option)과 같이 세속 문화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대안을 옹호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굴드가 제안하는 방식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가장 우려가 되는 내용은, 굴드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부분으로서 바로 교회가 복음을 더욱 믿을 만하고 받아들이고 싶게끔 제시하기 위해 ‘반드시’ 상위 문화에 동참해서 그 문화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는 이런 주장이 그리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사도들의 전도에서도 그러한 접근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내가 이해하기로 신약성경은,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경험이 일종의 유배 생활과 같다는 관점을 가지고 복음을 선포하고 구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으로 복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힘써야겠지만(딛 2:10), 성경이 가르치는 사실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고] 미련”하게 보인다는 것이다(고전 1:18).


이 정도의 의문만 제외한다면, 나는 굴드의 작품이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지닌 신앙을 충실하게 변증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다른 변증학 방법들과 같이, 그의 논증 역시도 비기독교인에게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에게도 필요하고 유익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분명 복음의 메시지를 믿을 만하고 받아들이고 싶게끔 제시하는 일은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신자들은 다시금 진정한 환상을 보며 문화에 참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후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상 속으로 보냄 받아 복음과 문화의 충돌을 일으켜 내기 때문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It’s Time for a Holistic Apologetic

번역: 장성우

오늘날 신자들은 다시금 진정한 환상을 보며 문화에 참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후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상 속으로 보냄 받아 복음과 문화의 충돌을 일으켜 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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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Elliot Clark

엘리엇 클라크는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MDiv)를 졸업하고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며 다문화 교회 개척 사역을 했다. 현재 Training Leaders International에서 해외 교회 리더들을 훈련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