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감정이 끔찍한 신이 될 수도
by Greg Morse2019-12-04

우리는 지금 이모티콘 세상에서 살고 있다. 지금의 세상에서 나 자신을 표현하고 “진짜 내가 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그 어떤 누구도 우리에게 어떻게 느끼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때로는 자동 반사적으로 우리의 감정을 담은 웃는, 우는, 놀란 또는 화난 얼굴의 그림을 메시지 또는 댓글에 표현한다. 차마 바닥에서 뒹굴 수는 없다고 해도, 감정을 참는 ‘가짜’(fake)가 되기보다는 어떤 감정이라도 표현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다른 선택은 없다. 이제는 조금도 정제되지 않은 우리의 감정생활이 모든 사람에게로까지 확산된다. 배우자, 부모 그리고 심지어 모르는 사람들에게로까지. 화가 나서 하나님에게 소리치는 것도 잘 하는 것이라고 칭찬한다. 이 모든 것에는 하나의 가정(assumption)이 있다. 좋든 나쁘든 간에, 감정이 바로 너라는 것! 네 감정을 누르는 것은 곧 너 자신을 누르는 것이라는, 바로 그 가정이다.


그러나 그게 항상 맞는 건 아니다.


C. S. 루이스가 ‘인간 폐지’(The Abolition of Man)에서 기술하기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어거스틴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적 반응을 고착된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훈련될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마땅히 훈련되어야 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가슴이 머리를 지배하면 안 된다. 가슴은 머리에, 이성에 복종해야 한다.” 가슴속에서 가마솥이 끓기 시작할 때, 우리의 내적 양심은 이런 지시를 받아야만 한다. “내가 지금 느끼고 싶은 이 감정은 완전히 잘못된 거야.”


“잘못되었다”(out of line)는 말은 고대 사람들이 감정을 평가하고 재조정할 때 잣대로 사용한, 현실(reality)이라는 거대한 저울을 쉽게 풀어쓴 말이다. 바로 이 기준에 따라서, 감정은 적절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정당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 그리고 표현되어야 할 것과 억눌려야 할 것으로 구분되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슬픔은 당연히 표현되어야 하는 감정이다. 그러나 시기심에 의한 슬픔이라면, 다른 사람의 결혼식에서 축하하는 대신 고개를 숙이고 슬퍼한다면, 그건 잘못 표현된 슬픔이다.


교사가 학생들의 감정 훈련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고 활동하던 시대도 있었다. 단지 곱셈과 영문법을 교육하는 대신, 교사는 학생들이 미워해야 할 것을 미워하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도록 가르쳤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법을 가르쳤고, 선과 악에 각각 어떻게 대응할지도 가르쳤다. 감정적인 단어를 포함한 광고(emotional propaganda)에 회의를 품는 오늘날, 우리는 이런 감정적 선동을 하는 광고와는 거리를 두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 왜 전혀 검증되지 않은 감정을 광고에 마구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지를 궁금해한다. 이제는 어린 딸이 학교에서 어떤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하더라도, 부모가 아이에게 독단적인 분노의 감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감정을 어떻게 훈련할 것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감정을 훈련하길 원하실까? 그런 것 같다. 하나님은 그런 훈련을 명령하셨다.


하나님은 ‘마음으로’(롬 6:17) 하는 순종을 명령하셨다. 종종 우리는 마음을 통제가 안 되는 그 무엇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부모와 달리 하나님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지를(눅 12:4-5),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기뻐하지 말아야 할지를(빌 4:4), 무엇을 미워해야 할지를(롬 12:9), 우리가 어떻게 화를 내고 어떻게 안 낼 수 있는지를(엡 4:26), 그리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빌 4:6) 알려 주신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만을 다룰 때, 우리는 기독교가 아닌 도덕주의에 빠지게 된다. 내면은 더러운 감정으로 가득하면서, 겉으로만 그럴듯한 행동을 드러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마 23:27).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롬 8:27).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는 소녀도 어느 지점에서는 하나님이 그녀에서 단지 참으라고만 하지 않으신다는 좋은 소식을 들을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의 변화를 제안하신다. 하나님은 새로운 감정을 명령하신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자신이 명령한 그 감정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게 놀라운 소식이다. 우리는 더 이상 감정에 종속된 노예로 살지 않아도 된다.


어떻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고, 미워하고, 또 거룩함에 어울리는 감정을 느끼도록 가르치시는 걸까? 이는 최소한 다음 네 가지 도움을 통해서이다.


1. 그분의 아들


거룩을 위해서 가장 자주 거론되는 기초는 복음이다. 우리가 과거의 분노, 정욕 그리고 냉담함에 대해 여전히 정죄받고 있는 상태라면, 감정을 개혁하거나 감정을 조절하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조절되지 않는 악을 향한 열정, 또는 선을 향한 부족한 열정 때문에 고통을 겪는 모두에게 좋은 소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이다. 그분은 완벽한 감정 조절자이셨다. 그분은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감정적인 삶을 살았고, 우리를 위해 감정이 부서지는 진노를 대신 받으셨다. 그 모든 사역이 우리 안의 원초적 감정의 핵심까지 새롭게 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보다 감정적으로 더욱 고통에 찬 외침이 있을 수 있을까(마 27:46)?


2. 그분의 영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그분은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롬 8:9). 우리는 더 이상 혼자라고 느끼지 않는다. 모든 이해와 기대를 넘어서 하나님은 우리를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만드셨다(벧후 1:4). 거기에는 우리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실로 놀랍고도 새로운 감정이 포함되어 있다(고후 5:17). 감정 수여자로서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정을 느낄 뿐 아니라 감정을 다스리는 영을 부어 주셔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감정적인 열매도 맺도록 하셨다(갈 5:22-23). 미움이 아닌 사랑, 절망이 아닌 기쁨, 혼란이 아닌 평안, 분노가 아닌 인내, 단절이 아닌 친절, 악함이 아닌 선함, 일시적이지 않은 신실함, 가혹함이 아닌 자비로움, 열정에 휘둘리지 않는 자기 조절! 그분은 감정생활의 핵심, 바로 우리의 마음을 다루신다.


3. 그분의 백성


하나님은 감정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우리에게 자기 계발서, 토크쇼 또는 요가 클래스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그의 백성이다. 성화는 공동체 프로젝트라는 사실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공동체 안에서 늙은이가 젊은이를 지도하고, 각자가 다양한 은사로 서로를 섬기며, 함께 말씀을 듣고 함께 생활한다. 우리는 서로를 세우며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엡 4:15) 행한다. 건강한 정서적 상태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공동체 안에서의 건강한 정서 생활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가 하나님에게 중독되도록 도울 뿐 아니라, 감정에 대해서는 냉정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서로를 돕는다.


4. 그분의 말씀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믿음으로 받아야 하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대문자 “R”로 시작하는 진짜 현실(Reality)을 드러내신다(히 11:1).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거할 때, 그리스도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한다(골 3:15-16). 예를 들어, 다음 네 구절에 걸쳐, 바울은 믿음을 갖게 될 때 드러나는 현실, 즉 우리를 불안에서 해방시키고 참을 수 없는 기쁨으로 넘치게 할 진짜 현실의 한 측면을 언급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4-7).


그는 단지 “주 안에서 노래하라” 또는 “주 안에서 춤춰라” 또는 “주 안에서 웃어라”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한다. 우리는 그럼 언제 기뻐해야 할까? 항상이다. 언제 멈춰야 할까? 절대로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언제 염려해야 할까? 절대로 하면 안 된다. 왜? 하나님의 진짜 현실은 우리에게 염려할 이유를 아예 주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은 곧 다시 오신다. 이 세상의 허무한 현실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에 네가 독신이고, 속았고, 초조하고, 또 피해를 받았다면, 너는 충분히 불행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바울은 다르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고통을 앞에 놓고도 행복하게 회복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말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 4:5). 비극을 맞아 삶 자체에 절망해야 할 이유가 있을 때에도, 세상 앞에서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존재가 된다(고후 6:10).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듣기 위해 아주 가까이 계신다. 그분은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아주 가까이 계신다. 우리를 그분의 사랑에서 떨어뜨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롬 8:37-39). 슬픔이 바다 물결처럼 닥칠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노래할 수 있다. “내 영혼, 평안해!” 모든 고통 너머에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가 계신다.


이처럼 진짜 현실은 우리가 이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거부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감정이라는 신을 옥좌에서 끌어내리기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을 아름답게 색칠할 수 있는 감정을 선물로 주셨다. 하나님도 감정을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 그분의 형상을 닮은 우리는 로봇이 아니다. 그러나 감정은 훌륭한 종인 동시에 끔찍한 신이 될 수도 있다. 감정이 하나님의 영과 그분의 현실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마구 흐를 때, 감정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나 자신에게 위협이 되도록 만든다.


무자비한 감정과 냉담함에 함몰되어 버린 세상, 사소한 것들 때문에 무감각해지고 영원에 대한 느낌이 없어져 버린 세상에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의 합리성을 알릴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에서, 다음 세상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같이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같이 미워하며, 그렇게 살고, 웃고, 또 울면서 가장 높은 진짜 현실, 즉 하나님 자신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다. 그분의 재림이 우리에게 가깝다. 하나님은 감정에 휘둘리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마음을 고정한 사람들을 완전한 평화 속에서 지키신다(사 26:3).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Emotions Make Terrible Gods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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