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번 나눠 드리는 주일예배에 관해
by Kyle Schwahn2019-11-29

지금 사역하는 교회에서 목회한 지 12년이 넘었다. 주일 오전에는 항상 1부와 2부 예배를 따로 드렸는데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아니, 깊이 생각을 해 본 적이 ‘있긴 했지만,’ 별문제 없다고 결론 내렸다. 예배를 그런 식으로 드리는 것은 내게 있어 교회 성장의 표지이자 수단이었다. 주일예배를 여러 번에 나눠 드리는 것은 목회에 있어 더 큰 성공을 의미한다고 믿었다.  


두 번에 나눠 드리는 주일예배는 목회를 ‘성공’으로 인도해 주는 길이기도 했다. 심지어 어느 스탭 회의에서는 주일 오전 3부 예배를 추가해야 할지를 놓고 토론했던 기억이 난다. 교인 수가 늘고 있었다는 건 표면적인 이유였다. 진짜 이유는 예배 횟수를 늘리면 교인이 더 늘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 회의에서 누군가 “사람들은 예배 시간의 선택 범위가 넓은 교회를 선호할 겁니다”라고 얘기했던 것이 기억난다.


내가 섬기는 교회는 여전히 주일예배를 2회에 나눠 드리고 있다. 전 교인들이 한 번에 한자리에 모이기에는 교회 건물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우리 교회가 하나이므로 전체 예배를 한 번만 드리는 것은 어떨지 그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바꾸고자 하는 것일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교회는 전체 예배를 한 번만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한 것일까?


주일예배에 대한 우리의 교회론적 인식들이 바뀌게 된 이유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1. 한 교회의 교인됨의 본질 때문이다


지난주 주일에 캐롤(Carol)이 성경의 한 부분을 읽고 기도했다. 그때 많은 성도가 그녀의 열정과 확신에 감동을 받았다. 캐롤의 기도는 복음을 기반으로 했고 우리의 마음을 찬송으로, 죄의 고백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죄 용서하심을 받아들임으로 이끌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그려 냈듯이, 캐롤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었고 우리 모두 “아멘”(고전 14:16)으로 화답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두가’ “아멘”이라 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교인들의 반만 캐롤의 기도를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교인들의 반만 캐롤과 한마음으로 기도한 것이다. 우리 교인들의 반만 캐롤의 기도로 인한 영적 유익을 누렸다. 


캐롤의 이야기가 사소하고 단편적인 예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신약은 한 몸에 속한 신자들은 각자 옆의 지체들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회중이 함께 부르는 찬송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복음이 풍성히 거하게 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진리들을 가르치기도 하기 때문에(골 3:16),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면했다(엡 5:19–20). 


교회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한 좋은 것들을 나눔으로써 진정한 교제를 누리게 된다(행 2:42; 몬 6). 


교회는 안수함으로 장로와 집사를 선택하고 세운다(행 6; 딤전 5). 


교인들은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하는 예언의 말을 서로에게 줄 수 있다(고전 14:3). 


형제자매들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 그리고 인내를 가질 것을 격려한다(히 10:24–25). 


교인들은 서로의 영혼을 살펴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주의한다(히 3:12–13).


마지막으로, 회심과 교인됨에 성례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인식할 때(바비 제이미슨(Bobby Jamieson)이 쓴 ‘회중을 향해 고백하는 신앙’[Going Public]을 보라), 성도들은 새 회심자가 그들과 한 몸 안으로 세례를 받아 그들의 보살핌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또한 교인들은 십자가와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바라볼 뿐 아니라 성찬 테이블이 상징하는 바 그리스도의 몸의 남은 부분을 바라보며 성찬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잠시 멈추고, 간단한 질문 몇 가지를 던지고자 한다. 위에서 언급된 책임들은 모두 교인됨에 관한 것들인데 이를 그리스도의 몸의 반에 대해서만 수행해도 되는 것인가? 그리스도를 높이는 기도를 교인 중 일부만 듣고 회개와 기쁨을 누려도 되는가? 옆 지체들이 드리는 찬송과 감사를 양 떼의 일부만 듣고 격려를 받아도 되는가? 한 헌신된 성도가 옆 지체를 위해 기도해 주고, 권면해 주고, 함께 교제하고, 때론 그들의 상태를 상세히 살피고자 할 때, 이를 일부 형제나 자매들만 누려도 되는가? 예언의 말에 대한 당신의 견해를 막론하고, 격려와 세움을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교인들의 반만 들어도 되는가? 새신자가 세례를 받을 때 그를 보살펴 줄 교인들의 반만 세례식을 볼 수 있도록 막는 것이 옳은가?    


2. 성만찬의 본질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책임들을 우리 교회가 이해하기 시작할 즈음, 나는 40주에 걸쳐 고린도전서를 설교했다. 고린도전서를 읽으면 교인들의 하나됨과 서로를 향한 실천적 사랑이 증진될 것을 알긴 했지만, 주일에 여러 번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한 내 견해에 고린도전서가 결정타를 날릴 줄은 모르고 있었다.  


K.O. 펀치는 바울이 성만찬의 속성과 실제를 다루는 고린도전서 10–11장에 이르렀을 때 나왔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하길,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함(10:16)이라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성찬은 그것에 참여하는 이들의 연합도 의미하는데,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10:17)이기 때문이다.  


11장에 이르자 이 주제는 더욱 강렬해졌다. 이 장에서 바울은 교회의 모임을 다섯 번에 걸쳐 언급한다(17, 18, 20, 33, 34절). 더 놀라운 것은 11장에서 바울의 가르침은 성만찬의 본질 자체보다 성만찬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모일 때 ‘교회에’ 모였다고 했다(11:18). 10장에서도 바울이 보여주듯, 성만찬은 각 지역 회중을 이어주는 무형의 끈의 유형적 표식이다. 바울은 분쟁이나 불공평이 교회 안에 있다면 그들은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11:20)라고까지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인들은 성찬을 분별하고, 성찬을 보살피고, 심지어는 성찬을 기다리기까지 해야 한다. 마치 그 성례에 지역 교회의 경계를 설정해 주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서로를 향한 하나됨이 교인들의 반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옳은가? 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교회에’ 모이는 것이라면, 우리 교회가 1부와 2부로 나뉘어 성찬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성찬을 할 때마다 주위를 돌아보고 서로를 보살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주님의 양들이 양 떼의 반만 돌아보는 것이 합당한가?  


주일 오전예배를 여러 번에 나눠 드리는 모든 교회는 고린도전서의 텍스트를 읽고 그것이 시사하는 바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결론


방법론에는 신학이 담기기 마련이다. 신학적으로 얘기하자면, 내 목회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나는 지역교회의 예배 모임에 관해 고찰해 본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한 교회의 교인됨의 본질과 성만찬의 속성을 이해하기 시작하자, 한 교회 안에서 모두 모여 한 번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출처: www.9marks.org 

원제: Two Reasons a Church Shouldn’t Have Multiple Gatherings

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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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Kyle Schwahn

카일 쉬완은 워싱턴주 스포케인에 위치한 Indian Trail Church의 설교 목사이다. 그는 The Spurgeon Fellowship과 미국 TGC 인랜드 노스웨스트의 공동 이사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