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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전략을 바꾼 세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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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Darren Carlson ㆍ Elliot Clark  /  작성일 202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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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Lucas Sankey on Unsplash
1974년 서방의 거의 모든 선교 단체가 채택한 전략은 다음 세 개의 그리스 단어 때문에 바뀌었다. 그것은 판타 타 에스네(panta ta ethne)이다. 이 단어는 특히 마태복음 24장 14절과 28장 19절에 등장해서 유명해졌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pasin tois ethnesin)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panta ta ethne)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1974년 로잔 회의(Lausanne Conference)에서 랄프 윈터(Ralph Winter)와 도날드 맥가번(Donald MacGavern)은 “숨겨진 민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윈터는 언어적인 이유와 문화적인 장벽으로 인해 선교 사역에서 제외된 약 만 육천 개의 숨겨진 민족이(나중에 그는 만 칠천으로 바꾸었다) 있다고 추산했다. 그는 세계를 국가의 개념이 아니라 “민족 그룹”(people groups)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천 개의 독특한 민족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라며 참석자들의 생각에 도전장에 내밀었다. 랄프는 이렇게 썼다.

예수님이 “모든 민족”이라는 구절을 썼을 때 그는 국가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단어 (그리스어 ethne)는 다양한 민족과 언어, 그리고 지구의 모든 인류를 구성하는 확장된 가족을 가리킨다.

그래서 현대 선교 운동이 변화되었다. 최근에 존 파이퍼(John Piper)와 데이비드 플래트 (David Platt)와 같은 사람들의 사역은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그를 위한 신학적 근거로 모든 민족(panta ta ethne)을 제시한다. 언어가 다른 모든 민족(ethnolinguistic people)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선교의 전략적 우선순위가 이제는 복음주의 글로벌 선교 사업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선교적인 이해와 함께 이 땅의 마지막 날이 오기 전에 모든 민족이 다 복음을 접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그러한 기대는 다른 언어를 쓰는 모든 민족을 다 구분하고 그들에게 빠짐없이 복음을 전하여 “임무를 완수하라”는 독특한 선교 명령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해석으로 인해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하도록 하는 곳이거나 최소한 예수님의 재림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곳으로 인식되어 왔다. 또한 이러한 이해는 각각의 민족에게 언제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까지 정의하도록 했다. 크리스챠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의 최근 기사는 많은 선교 단체들이 취하고 있는 이런 식의 선교 접근이 내포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우리는 모든 민족(pasin tois ethnesin)에 대해 광범위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런 해석에 전혀 신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모든 민족(pasin tois ethnesin)을 “자기만의 독특한 언어를 쓰는 개별 민족”으로 정의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단순한 데 있다. 그건 성경 신학적 정의보다 현대 인류학적 정의를 더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50년 전, 맥가번과 윈터와 같은 선교 학자들은 민족(ethne)이라는 단어에 대한 순전히 지리학적이며 민족주의적인 이해로만 접근했다. 그러므로 현대에 들어와서 사용하게 된 사회과학적 정의로 성경의 단어를 이해하고 정의하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성경 저자들이 민족을 지리적, 문화적, 또는 언어적 범주의 국가들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민족(ethne)을 20세기에 들어서나 도입한 국가 또는 민족 그룹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에 1세기 예수를 따르던 유대인 추종자들은 주로 성경에 언급된 민족, 즉 성경 신학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가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했을 때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던 이방 나라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1세기 유대인들과 다른 동시대인들도 얼마든지 사회학적이고 지정학적인 구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에게 민족이라는 단어는 무엇보다 종교적인 범주를 말하는 것이었다. 다른 민족은 그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온, 그래서 언약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비유대민족이었다(엡 2:11-12; 막 11:17절에 나오는 만민(pasin tois ethne)은 비 유대민족을 의미한다). 예수가 그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 그는 언어학적 또는 사회과학적인 측면에서 인구 통계를 놓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이 구절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이 구절은 구약이 말하는 이방인에 대한 범주와 기대를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사 66:18-19참고).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사역 내내 많은 이방인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와서 아브라함의 유업에 동참할 것이라고 약속했다(마 8:11). 그의 말을 들었던 일부 유대인에게는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예수의 이런 약속은 그의 사역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되었다고 생각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바울도 나중에 같은 말을 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다. 모든 나라들(갈 3:8의 모든 이방인panta ta ethne; 창 12:3도 참조)이 그를 통해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은 이방인일지라도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의롭다 선언하심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나라에 관한 예수의 약속(마 24:14)과 사명(마 28:19)에 대한 마태복음 기록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민족에 관해서는 예언서, 특히 이사야서에 나오는 내용을 통해서 구약이 가지고 있던 모든 민족에 관한 것을 더 많이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 등장하는 여러 나라를 포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최초의 약속에 등장하는 모든 민족은 성경 신학적인 배경을 제공한다. 창세기 10장에서 11장에 등장하는 여러 나라와 오순절에 등장한 민족들 사이에서 문학적 연관성을 보아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다(행 2:1-11).

오순절 사건에 관한 누가의 기록은 모든 민족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에 또 다른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사도행전은 “천하각국”(pantos ethnous)에서 온 유대인들로 예루살렘이 넘쳤다고 말한다(행 2:5). 이러한 보편적인 언어(다른 사람도 아닌 주의 깊은 의사였던 누가가 이런 용어를 썼다는 점은 중요하다)는 용어에 대한 현대적 정의와 성경 기록의 차이를 강조한다. 우리는 오순절 그날 예루살렘에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왔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성경 저자들은 진실하게 글을 쓰지만, 반드시 사실 묘사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과장하여 기록할 수 있다. 바울은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말했다(골 1:23). 그는 디모데에게 쓴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어떻게 일하셨는지, 어떻게 모든 이방인(panta ta ethne)이 복음을 듣도록 하셨는지에 대하여 썼다(딤후 4:17).

이 정도만 살펴보아도 우리가 성경 구절을 해석하면서 과학적이고 세밀하게 그리고 인류학적인 정의만 가지고 접근할 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예수나 사도들이 모든 민족이라는 말을 썼을 때 그것이 당시에 존재하거나, 그 후에 존재하게 될 고유의 언어를 쓰는 모든 민족 집단으로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증거에 대한 부담을 안고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모든 민족에 관한 예수의 말씀이 현재 존재하는 고유한 언어를 쓰는 민족 집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적지 않은 민족은 복음이 도달하기도 전에 이미 멸종되었다. 다시 말해서, 지금 통용되는 모든 민족의 정의에 따르면 마태복음 24장 14절을 충족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점을 생각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정도 하기 전에 죽은 모든 아기는 다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며, 그들이야말로 미전도 종족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미전도 종족을 대표하는 아기들이 천국에 있기 때문에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필요 없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천사의 선포가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계 14:6). 그런 주장은 선교에 대한 동기 부여를 약화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마태복음 24장 14절이 말하는 모든 민족은 이 시대가 끝날 때 존재하는 모든 민족으로 제한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비약적인 주장으로 보인다.

우리는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1세기 당시에는 존재했으나 지금은 사라진 언어는 어떻게 되는가? 아니면 그때는 없었는데 지금 새로게 생긴 새로운 언어는 어떤가? 그리고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언어도 고려해야 하는가? 보좌 앞에서 고백하는 모든 언어는 중세 영어와 현대 영어를 동시에 다 포함해야 하는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 그룹은 한 번으로 계산해야 하나 아니면 두 번으로 계산해야 하나? 복잡한 요소가 한두 개가 아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모든 선교사와 연구 그룹이 세계에 존재하는 민족을 정의하고 계산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는 성서 신학적으로 모든 민족을 바라보면 바로 해결될 수 있다.

선교적으로 중요하다

열방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복음이 선포된 적 없는 지역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가? 그렇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직접 선교사로 가거나 아니면 보내야 하는 책임이 있는가? 그렇다! 지리적 또는 민족 언어 범주로 민족을 생각하는 것이 적절한가? 당연하다! 사도들 자신도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특정 국가(스페인) 또는 민족 그룹(스구디아)을 고려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민족 그룹에 중점을 두는 과정에서 우리는 선교 방법을 수정하느라 선교 사명 자체를 희생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것(복음전파, 세례, 교육, 교회 설립 및 지도자 양성)에 집중하지 않고 대신 사명을 마무리하는 것(마지막 한 사람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마태복음 24장이 마태복음 28장을 잡아먹어 버렸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전략적으로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생각되는 곳에서는 선교에 필요한 자재 및 인력, 자원이 빠져나갔다. 복음이 일단 “도달한” 국가에는 신학교 하나 세우고는 그냥 방치했다. 가장 힘들고 많은 손이 가는 일, 유능한 지도자를 키우는 사역은 그냥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졌다. 선교 연구는 이제 민족을 식별하고 분류하는 데에만 중점을 두게 되었다. 선교 보고는 이제 전도를 강조하고 우리의 방법은 속도에만 중점을 둔다. 빠르게 교회를 증식하는 접근 방식이 발전함으로 서구의 선교 방식을 장악했고 동시에 세계 교회를 약화시켰다.

이 모든 것이 다 “미전도 종족에게 다가가기를” 바라는 선의에서 시작한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슬픈 것은 복음이 도달했다고 여겨지는 선교 지역은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으로 그 지역에 사는 민족이 다시 미전도 상태로 되돌아갈 수도 있게 되었다. 우리는 자문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선교 사명을 완수하는 데 충실했는가?

핵심은 무엇인가?

당연히 우리는 미전도 종족에게 다가가야 한다. 맥가번과 윈터가 제기했던 선교에 대한 수정은 여러 면에서 필요하고 도움이 된다. 미전도 종족을 위해 삶과 사역을 다 바친 사람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또한 인류학을 선교 사역과 연구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는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이런 학문은 사탄을 상대로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핵심은 우리가 세상과 세상 속 민족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의미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선교 목표를 정해야지 성경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선교 노력을 하고, 선교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복음을 들어 본 적 없는 곳으로 선교사를 파송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진 후에도 오래 머무르도록 격려하는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가 모든 민족으로 분류하고,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으로 선교를 정의한다면, 우리에게 있는 사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더 큰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예수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만들어 그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우리를 보내신다.



원제: The 3 Words That Changed Missions Strategy—and Why We Might Be Wrong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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