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
by Albert Mohler2020-01-11


러시아의 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가 쓴 ‘백치’(The Idiot)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기독교적 취지와 신학을 깊이 반영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 이야기에서 다소 이상해 보이는 개념을 상정한다. 곧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개념이다. 흥미로운 아이디어이긴 한데, 기독교의 사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두 가지 성경 본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사야 53장과 시편 27편이다. 먼저 이사야 53장은 메시아를 묘사하며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말한다(사 53:2). 그런데 이 말은 시편 27편이 주님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있는 내용과는 좀 다르게 들린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이 두 구절을 병행시켜 묵상할 때, 우리는 어떤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일단 이사야 53장에서 메시아는 사람들이 지켜볼 만한 아름다움이 없는 분으로 그려진다. 그분은 매를 맞고 고통을 당하신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분으로부터 고개를 돌린다. 여기서 이사야는 메시아의 외모에 대해 말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메시아의 대속 사역과 그분의 위대한 사역을 통해 이루어질 죄에 대한 심판을 예견하고 있다. 이와 달리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살기를 간구한다. 그렇다면 그 아름다움이란 메시아의 사역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성경은 아름다움으로 시작해 아름다움으로 마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가 그분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한다(창 1:4, 10, 12, 18, 21, 25). 심지어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도 말한다(창 1:31). 그런데 이 좋다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보다 의미가 깊다. 히브리어에서 그 표현은 아름답다는 의미까지 내포한다.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는데 심히 아름다웠다는 내용을 전달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성경은 어떻게 마칠까?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사도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2-27).


이와 같은 새 예루살렘의 모습과(22장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생명수의 강은 아름다움의 회복을 증언한다.


결국 인간이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에 끌리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물관과 미술 전시회 또는 그랜드 캐니언에 간다. 그렇다면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바라보는 아름다움은 어떤 개념일까? 또한 구속 사건에서 그 아름다움은 어떻게 드러날까?


아름다움을 인식하지 못하는 세상


아름다움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인간이 아름다움을 봐도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 타락한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지각하는 우리의 감각이 죄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다른 무엇보다도, 마트의 계산대에 진열된 온갖 잡지들만 봐도 확연히 드러난다. 그 잡지들이 인위적으로 그려 내는 모델의 외관은 세상이 바라보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 혹 그들의 이미지가 좋아 보일지는 몰라도, 그런 이미지는 성경이 바라보는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기독교 세계관은 진실로 선한 아름다움이란 스스로 계실 뿐 아니라 전능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그 근원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은 초월적인 가치인 진(the true), 선(the good), 미(the beautiful)가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가르쳐 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시편 27편 기자가 말한 여호와의 아름다움에는 그분의 선하심과 진실하심까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타락한 상태에 있기에, 진실함과 선함과 아름다움을 서로 분리하려 한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인가가 진실하다면, 그 대상은 또한 선하고 아름답다고 가르쳐 준다. 마찬가지로 무엇인가가 선하다면, 그 대상은 또한 아름답고 진실하다고 가르쳐 준다. 그렇기 때문에 진열대의 잡지들이 언뜻 보기에는 좋은 이미지를 그려 낼지라도, 그런 이미지는 진실로 선한 모습을 전달하지 못하기에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기독교 세계관은 다운 증후군을 가진 아이의 얼굴이 전문 모델의 조작된 이미지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의 관점에서 매력적이지 않게 보이는 게 당연하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자신을 희생하면서 피를 쏟아내는 그 끔찍한 광경은 보기에 좋은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보기에는 좋지 않을지 몰라도, 십자가는 분명 아름답다. 예수님이 거기서 죄에 대한 형벌을 치르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십자가가 아름다운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거기서 함께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십자가 사건은 진실하고 선한 일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에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니 도스토옙스키가 옳았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아름다움이 그저 눈으로 보기에 좋은 상태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선재하는 아름다움


우리는 더 나아가 인간 내면에 있는 아름다움의 선재성(the priority of beauty)을 인식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진리에는 우리 모두가 진정한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심지어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세속주의자도 해가 지는 광경에 놀라곤 한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모든 인간의 마음은 아름다움에 끌린다고 이야기했다. 다만 아름답지 못한 대상에 사로잡힌다는 게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드러내는 문제이다. 물론 어거스틴은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갈망은 단지 감성의 작용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오히려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아름다움의 객관적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계시하며,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갈망 역시도 하나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우리의 상태를 드러낸다고 고백했다.


세상을 구원하는 아름다움


우리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역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역은 아름답기에 진실하다. 또한 그 희생은 진실하기에 선하다. 결국 예수님의 대속 사역은 진실하고 선하며 아름다운 모든 일의 중심에 있다. 그러므로 세상이 보기에 좋지 않은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는 아름답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Will Beauty Save the World?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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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Albert Mohler

앨버트 몰러는 켄터키주 루이스빌에 위치한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총장과 TGC의 이사로 섬기고 있으며, 'The Briefing'과 'Thinking in Public'의 진행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오늘 나에게 왜 사도신경인가?'를 포함하여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