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는 좋아도 결과는 나쁠 수 있다
by R. C. Sproul2020-02-10

좋은 의도로 포장된 길을 따라가다가 엉뚱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누구도 그런 목적지에 이르기를 원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의도는 선한데 결과는 비참한 경우가 우리 주변에 더러 있다. 최근 여러 교회에서 예배의 방식을 뜯어고치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그런 현상을 보며 좋은 의도로 포장은 되었으나 위험한 목적지로 향하는 도로를 떠올린다. 그와 같은 교회에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예배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데는 나름대로 목적이 있다. 전통적인 예배의 스타일을 거부하는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기 위한 목적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교회 생활이 시대에 부적합할 뿐 아니라 지루하다고 여긴다. 따라서 그런 이들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한 노력을 하다 보니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지난 수십 년에 걸쳐 그와 같은 예배의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 준 예를 꼽자면 ‘구도자 중심의 모델’(seeker-sensitive model)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도자란 교회 밖에 있는 비신자로서 특히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찾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구도자를 전도하려는 좋은 의도에서 주일 예배를 바꾸려는 시도가 사실상 성경이 가르치는 중요한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모습을 반영하기도 한다.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도 이 사실을 생각하며, 비신자란 하나님이나 그분의 나라를 찾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힘을 다해 그분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란 인생의 궁극적 의미나 목적, 죄책으로부터의 해방, 또는 참된 기쁨이나 행복과 같이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유익’을 추구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유익은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혜택으로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을 때만 주어지게 된다. 따라서 교회의 목회자들이 오직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유익을 사람들이 찾아 헤맨다고 해서 그들이 곧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는 큰 오산이다. 그들은 단지 혜택을 바랄 뿐 그 혜택의 수여자는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신자에게 맞추기 위해 예배의 방식을 바꾸려는 시도는, 그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상 잘못된 결과에 이를 수 있다. 하나님을 찾는 일은 회심을 통해서만 시작된다. 만일 우리가 구도자를 감안하여 예배를 개선해야 한다면, 오히려 신자를 위해 그 일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자만이 사실상 구도자이기 때문이다.


1세기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모여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며, 다 함께 기도하면서 떡을 떼는 데 집중했다(행 2:42). 이는 비신자의 모임이 아닌 신자로 이루어진 초대교회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보여 준다. 물론 주님의 경고와 같이, 신자의 모임에는 거짓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섞여 있을 수 있다. 좋은 곡식 사이에 가라지가 함께 섞여 자랄 수 있다(마 13:36-43). 그렇다고 해서 그 가라지의 욕구와 필요를 채워 주려고 밭을 갈아엎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 공동으로 모이는 목적은, 이미 구약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오직 그분께만 찬양과 경배를 올리기 위해서이다. 예배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식을 따라 그분을 예배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명하신 방식이 아니라 우리 편에서 원하는 방식대로 예배를 드렸을 때 어떠한 결과가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에 관한 가장 뚜렷한 사례는 레위기 10장에 소개된다. 거기서 아론의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불을 담아 그분 앞에 분향함으로써 현장에서 바로 심판을 받게 된다. 이 젊은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불편하게 여기시는 방식을 따라 한번 ‘시험 삼아’ 예배를 드려 본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레 10:3). 예배는 결코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세속적인 방식을 따라 드려져서는 안 된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혹 주일 아침에 스타벅스에 모여 신앙을 나누며, 기존의 예배를 대체하는 방식이 매력적으로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그런 모습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될 수 없다.


예배의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에는 잘못된 오류가 전제되어 있다. 말하자면 현세대가 최첨단 기기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 문화적으로나 상황적으로 격변의 과정을 거쳤기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성경만 해설하는 설교에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다는 전제이다. 20세기 초반에 자유주의 신학의 대변자였던 해리 에머슨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도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에 와서 저 옛날 사도나 선지자들이 남긴 메시지를 듣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 포스딕은 그런 메시지가 시대에 완전히 뒤처지기 때문에 설교의 초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도 현대 문화의 변화를 겪은 이들에게 다가가고자 할 때는 뭔가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는 지난 수십 년간 인간의 본성이 변화되어 더 이상 지성을 통해서는 그들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는 능력을 상실하여 뭔가 더 강력하고 역동적인 예배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다른 대체 수단이 필요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은 시도에 담긴 의도가 혹 선했을지라도 그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고 믿기에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Good Intentions Gone Bad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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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R. C. Sproul

R. C. 스프로울 박사는 Ligonier Ministries를 설립했으며, 플로리다 주 샌포드 시에 위치한 Saint Andrew’s Chapel의 창립목사로, Roformation Bible College의 초대총장으로 봉직했다. 평생 동안 ‘하나님의 거룩성’(The Holiness of God)을 비롯하여 백여 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