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가서 거기 머물라
by David Mathis2020-02-08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것만 찾는 시대에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던(행 17:21) 옛 아테네 사람들과 같아지고 있다. 어쩌면 이미 그들을 넘어섰는지도 모른다. IT와 디지털 혁명은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즉 문자 그대로 “뉴스”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오래된, 영광스럽도록 오래된 진리들을 붙든다. 이 진리는 뉴스에 탐닉하는 이 시대와는 맞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의 현위치를 파악하고 영적 판단력을 회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다.


1990년대 초반, D. A. 카슨(D. A. Carson)은 한 가지 위험을 감지한 바 있는데, 그 위험은 한 세대가 지난 현재도 여전히 시급한 문제로 남아있다. “상대적으로 비본질적인 생각들에 지나치게 주목한 나머지, 사람들이 십자가를 공개적으로 부인하지는 않더라도, 십자가가 응당 누려야 할 중심적 위치로부터 밀려날 위험에 늘 처해 있다”(‘십자가와 목회’[The Cross and Christian Ministry]). 동일한 경고가 더 오래 전에도 있었다. 목회자이며 시인이었던 호라티우스 보나르(Horatius Bonar, 1808–1889)는 그의 책 ‘거룩을 향한 하나님의 방도’(God’s way of Holiness)에서 이렇게 썼다.


성도의 거룩한 여정의 비밀은 그리스도의 피로 보증된 삶으로 계속 돌아가, 못 박히고 다시 사신 주님과의 교제에 매일 참여하는 것에 있다.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이 만들어내는 귀한 열매들, 죄 용서, 평강, 그리고 거룩함은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온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부터만 나오는 것이 아닌 공상의(fancied) 성화는 바리새주의와 다를 바 없다. 거룩해지고자 한다면 십자가로 가서 그 아래 머물러야 한다. 그리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수고와 노력, 금식, 기도, 선행 같은 행위에도 불구하고 참된 성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십자가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겸손하고 자비로운 성품을 얻을 수 없다.


보나르의 권면은 우리 시대의 흐름에 대한 처절한 도전이다. 또한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오래된 진리를 붙잡고자 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시각을 보나르의 오래된 언어에서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십자가로부터


모든 진실한 거룩함과 선행이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온다”라는 말의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께서 ‘못 박히셨다’라는 것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으로 이해되었고,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이기도 했다. 성자 하나님께서 못 박히셨을 때 모든 것이 변화된 것이다.


부활 직후 일어났던 사건에서 “못 박히심”은 우리 주님을 나타내주는 표현이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마 28:5–6; 또한 막 16:6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이라 표현한다). 그리고 오십일이 지난 후 행한 오순절 설교의 절정에서 베드로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라고 선포한다.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이를 고친 후에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혀 그 앞에 섰다. 그들이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 4:7)라고 묻자 베드로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행 4:10)라고 답한다. 예수님을 구별하여 보여주는 “못 박히심”이라는 표현은 사도 바울의 사역 안에서 그야말로 진가를 발휘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갈 3:1)이라 선포한다.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수께서 ‘못 박히셨다’라는 것은 우연하거나 부가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히 계시적인 사건이었다.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숨기지 않고 밝히 드러내었다. 하나님이 인간의 살과 피를 입고 오셨을 뿐 아니라 죄 없으신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이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그 마음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 된 것이다(롬 5:8). 카슨이 십자가에 대해 말한 것처럼, 이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행위 중 가장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대표적인 묵상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부터 2장 5절에 등장한다. 거기서 바울은 우리의 생각을 허물어버릴 만큼 놀라운 계시적인 십자가의 속성에 대해 말한다. “십자가의 도가,” 즉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메시지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고전 1:18)이라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할 때(고전 1:23)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다(고전 1:20). 새롭게 태어나지 않은 죄인들은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이나 미련한 것으로 여기고 거부한다(고전 1:23).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통해 십자가의 영광을 본다. 못 박히셨다가 다시 사신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 거룩함과 구원함이”(고전 1:30) 되신 분이라 믿는다.


십자가는 불신자들이 믿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는 데 쓰는, 복음 메시지를 구성하는 한 요소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하시는지(“지혜”), 우리는 하나님과 어떻게 화목하고(“의로움”) 거룩해질 수 있는지(“성화”), 이 세상에서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지를(“구속”) 보여준다. 바울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와 에베소뿐만 아니라 그가 간 모든 곳에서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행 20:27) 전하였다. 십자가가 지극히 중심적이고, 모든 분야에 연결되어 있으며, 지극히 계시적이어서 어떠한 주제를 이야기하든지 그가 말한 모든 것(“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20))은 보나르의 표현처럼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왔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대한 카슨의 주석처럼 “바울이 뜻하는 바는 그가 하는 모든 것이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쁨, 윤리, 교제, 하나님에 관한 교리, 또는 어떠한 것이라 해도 십자가와 연결하지 않고 논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바울은 복음 중심적이다. 그는 십자가 중심적이다.”


초기부터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빈 무덤보다 십자가가 그리기 쉬웠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가치를 축소하지 않고 부활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가볍게 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 신앙 전체를 대표한다. 세상의 지혜와 기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내세적인 힘을 보여주고, 십자가는 인간의 관점을 부끄럽게 만든다. 우리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기 전에는 부활에 나타난 능력을 볼 수 없다. 바로 이것 때문에 십자가는 특별히 구별되고 기독교 신앙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종교들도 부활을 꿈꾸기는 할 것이다. 자신들이 결코 이룰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오직 기독교에서만 하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다.


공상의 성화와 참된 성화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중략] ‘거룩함’ [중략] 이 되셨으니”라고 말한다. 이는 그리스어로 ‘하기아스모스’(hagiasmos)이다. 보나르는 공상적인 성화와 참된 성화라는 두 종류의 성화에 대해 논하는데 “공상의(fancied) 성화”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기반”하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존 오웬(John Owen)도 말한다. 시편 130편 4절(“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 이다”)을 주석하면서, 용서하심을 기반으로 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한다. “시편 기자는 이 경외함과 예배의 기반, 즉 죄인들이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경외하고 예배하고자 하는 유일한 동기가 바로 이것, 다시 말해 하나님의 죄 용서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어떠한 죄인도 그분을 경외하거나, 섬기거나, 예배할 수 없다”(‘존 오웬 전집’[Works of John Owen]).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참된 예배와 “참된 성화”는 십자가 구속으로부터 흘러나올 뿐 아니라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믿는 믿음으로 그 힘을 얻는다. 우리의 옛사람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롬 6:6).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라고 말한다. 우리도 똑같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거룩한 여정의 비밀


그렇다면 보나르의 권면처럼 어떻게 “십자가로 가서 거기 머물 것”인가? 보나르는 “성도의 거룩한 여정의 비밀은 그리스도의 피로 보증된 삶으로 계속 돌아가, 못 박히고 다시 사신 주님과의 교제에 매일 참여하는 것에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보증”이라 함은 객관적 사건과 사실로서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이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향해 드러내시는 은혜로운 마음이며, 그의 영원하신 호의를 보장해주는 것을 가리킨다. 보나르는 십자가로 “계속 돌아가” ‘못 박히시고’ 다시 사신 주님과의 교제에 매일 참여하라고 권면한다. 카슨 역시 바울의 십자가 중심의 시각을 분명히 보여주며 복음의 실제를, 그리고 무엇보다 십자가를 “지속적으로 자기 것으로 삼으라”고 권면한다.


바울과 보나르, 그리고 카슨도 “지속적으로” 또한 “계속하여”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십자가 앞에 머물기 위해 당신이 취하는 구체적 방식은 내 방식과는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정말로 십자가로 다가가고 있는가? 십자가 앞에서 머물고 있는가?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라고 항상 물어야 한다. 얼마나 ‘지속적으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다가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로가 다르겠지만, 우리는 “십자가로 가서 거기 머물든지” 아니면 세상 속에 머물든지 해야 한다. 우리의 성화는 진실한 것이든지 아니면 공상적(fancied)이든지 둘 중 하나일 뿐이다.


보나르는 “매일”이라는 다른 일반적 기준도 제시한다. 매일 그렇게 하는 것은 생각보다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못 박히신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 결코 피곤한 일이 아님을 하나님께서 알게 하실 것이다. 이렇게 오래된 진리와 더불어 살아온 지 어느덧 십오 년이 되었다. 이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진리는 날마다 새로운 진리라는 사실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Get to the Cross and Never Leave

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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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David Mathis

데이비드 마티스는 desiringGod.org의 주필이며,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Cities Church의 목사이다. '은혜받는 습관'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