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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그리고 성례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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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Bobby Jamieson /  작성일 202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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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ding Theologians of_the Middle Ages(1673년경)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복음으로부터 나오고 복음과 맞는 성례의 교리와 실천을 회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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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례의 회복이 왜 필요할까? 고해 성사, 연옥, 면죄부, 성인 숭배 같은 것들이 모두 더해져서 어떤 체계를 형성했는데, 이 시스템 안에서는 각 개인이 자기 자신 및 타인의 죄로 인해 짊어진 절망적이리만큼 거대한 빚을 조금씩이나마 갚아나가게끔 하는 수단이 바로 성례였다. 중세 후기의 미사(mass)는 평신도들이 그저 구경하는 것이었지 그들이 참예하는 성찬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복음으로부터 나오고 복음과 맞는 성례의 교리와 실천을 회복시켰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죗값을 완전히 치루셨기 때문에, 성례는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보여주고 약속해준다. 또한 복음은 성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역 교회의 한 몸 안으로 인도하고, 성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회중이 하나되었음을 구현하여 실제적으로 보여준다. 


이 글에서 나는 가장 핵심적인 종교개혁자들인 루터(Luther), 칼빈(Calvin), 그리고 크랜머(Cranmer)의 글들을 통해, 위에서 언급한 이중(二重) 회복을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아래에서 나는 세례가 아닌 성찬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몇 가지 면에 있어,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은 유아 세례보다 성찬과 미사에 있어 훨씬 큰 견해차를 보인다. 둘째, 당시 정치적 영향력도 행세하던 종교개혁가들(magisterial Reformers)이 세례에 대해서는 충분히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 침례교인으로서의 내 견해이다. 하지만,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내 의견은 잠시 내려놓고, 종교개혁자들은 유아세례에 있어서도 복음의 우위성과 회중의 참여를 회복하려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루터


루터가 성만찬에서 복음을 어떻게 회복했는지 살펴보자. ‘교회의 바벨론 유수’(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를 보면, 루터는 성찬을 로마 가톨릭과 매우 다르게 정의하지만, 여전히 성찬을 “미사”(mass)라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구성 요소들을 보면,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이전에 하신 말씀과 다름없다. 그리스도께서 “받아서 먹으라”(마 26:26)고 하신 것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죄로 저주 받은 인생이여, 너희 어떠한 공로나 소원과도 관계없이, 순전하고 거저 주는 사랑과 자비로우신 우리 아버지의 뜻으로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고후 1:3). 내가 이 말들로 네게 약속하노니, 네 모든 죄를 사하고 네게 영생을 줄 것이라. 네가 이 변개치 못할 내 약속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도록, 내가 네게 내 몸을 주고 내 피를 흘릴 것이라. 이로써 내 언약을 나의 죽음으로 확정하고, 그 약속에 대한 표지와 기념으로서 내 몸과 피를 네게 줄 것이라. 이에 참예할 때마다 나를 기억하고, 너를 향한 나의 사랑과 자비를 선포하고, 찬송하며, 감사하라”(‘교회의 바벨론 유수’[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성만찬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기에, 이를 받는 이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믿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미사를 제대로 드리기 위해서는 이 약속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진실됨을 믿고, 무한한 복이 그 약속 위에 주어졌음을 의심치 않는 믿음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 없음을 알 수 있다. … 측량 못할 그리스도의 약속이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기쁨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이가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으로 거의 혼미해지지 않을 이가 없다(‘교회의 바벨론 유수’).


루터는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참된 몸의 복된 성례에 관한 설교’(Sermon on the Blessed Sacrament of the Holy, True Body of Christ, 1519년)에서 회중이 떡과 잔 모두를 받아야 함을 주장한다. 그중 하나만 받을 경우 회중은 “성도들의 완전한 연합과 나뉘지 않은 교제”를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 표현은 Lutheran Theological Journal에 실린 딘 즈웩(Dean Zweck)의 2015년 논문 ‘루터의 1519년 설교 “거룩하고 참된 몸의 복된 성례”에 나타난 성도의 교제’에서 즈웩이 루터의 말을 요약한 부분에서 빌려온 것이다). 루터는 “성례에서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모든 성도들과 더불어 한 몸이 된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다”라 말했다(LW 35:58). 루터는, 복음이 보여주는 “달콤한 맞바꿈” 안에서 일어난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은 회중의 연합도 일으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의 복과 우리의 불행을 맞바꿈으로 인해 우리는 한 덩이의 떡, 한 몸, 같은 잔이 되고, 모든 것을 함께하게 된다”(LW 35:58).


칼빈


이제 복음과 성찬의 관계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살펴보자. 핵심은 아래 글의 초두에 등장한다. 하지만 인용문의 나머지 부분도 영혼의 양식 삼아 읽어보라.



“경건한 영혼들은 성례로부터 큰 확신과 기쁨을 얻는다. 성례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는 증거를 얻는다. 그리스도의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의 것이 된다. 그 결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유업인 영생이 우리의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거하고 계신 천국을 그리스도로부터 빼앗을 수 없듯, 우리 역시 천국을 빼앗기지 않을 것임을 확신케 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가 마치 자신의 죄인 것처럼 짊어지심으로 우리를 정죄로부터 해방시키셨기에,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해 더는 정죄당하지 않음을 확신케 된다. 이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분의 자비로 그가 우리를 초청하여 행하신 놀라운 맞바꿈이다. 즉, 그가 인자가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우리를 그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이다. 또한 그가 이 땅으로 내려오심으로 우리가 하늘로 올라갈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우리의 유한함을 취하심으로 자신의 무한함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또한 우리의 약함을 취하시고 우리를 그의 능력으로 강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의 가난을 짊어지심으로 우리에게 그의 부를 주신 것이다. 또한 우리를 짓누르던 죄의 무게를 짊어지심으로 우리를 그의 의로 옷 입혀 주신 것이다”(’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4권 17장 2절).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성도들 상호 간의 연합을 구현하는 성찬의 역할에 관해 가르칠 때, 칼빈은 고린도전서 10장 16–17절을 주석하며 그 둘을 연결시킨다. “말하자면, 우리가 서로 연합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께로 연합되어야 한다”(‘고린도서신 주석’[Commentary on the Epistles of Paul the Apostle to the Corinthians]). 또한 기독교강요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고, 그는 우리 모두를 그 몸의 지체로 만드신다. 그러므로 이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 필요하다. 성례에서 우리가 보는 떡이 바로 이 연합을 상징한다” (’기독교강요’, 4권 17장, 38절).


이러한 이중적 회복에는 어떤 실제적, 목회적 효과가 있을까? 성찬이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 그리고 우리 상호간의 연합을 확증해준다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 


다음과 같은 생각을 우리의 심비에 새기면 성례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첫째, 우리가 악을 행하여 그리스도를 상하게 하고, 멸시하고, 모욕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우리 형제 중 누구라도 상하게 하고, 멸시하고, 거절하고, 모욕해서는 안 된다. 둘째, 형제와 다투는 것은 그리스도와 다투는 것이다. 셋째, 형제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다. 넷째, 우리 자신의 몸을 돌보듯 형제들의 몸도 돌봐야 한다. 우리는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고통이 몸의 모든 부분으로 퍼져나가듯,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형제가 악에 의해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기독교강요’ 4권 17장 38절).   


크랜머


영국 종교개혁에 있어 예배 의식에 관한 대표적인 사상가였던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는 어떨까? 크랜머는 세례와 성찬 모두 복음을 회중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믿었다. 세례와 성찬에서 우리는 복음을 들을 뿐 아니라 그것을 보고, 만지고, 느끼고, 맛보기까지 한다.


“세례에서 물로 씻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 눈앞에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고, 우리의 감각이 그를 만지고 느끼는 것이며, 그의 몸에 손을 얹고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내적 믿음이 확신을 얻는 것이다. …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성례에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대표적인 음식인 떡과 포도주를 쓰도록 제정하신 것이다. 이는 우리가 떡과 포도주를 눈으로 확실히 보고, 코로 그 내음을 맡고, 우리 손으로 그것을 만지고, 우리의 입으로 그것을 맛보는 만큼이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인 삶이시고 우리 영혼을 위한 양식이심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다. … 그러므로 우리의 구주 그리스도는 … 우리에게 더 큰 힘을 주고 그를 향한 지속적인 믿음을 주시기 위해 눈에 보이는 표지와 표식을 제정하신 것이다"(‘성찬에 관한 토머스 크랜머의 저술 및 논쟁들’[Writings and Disputations of Thomas Cranmer Relative to the Lord’s Supper]. 이 글은 ‘성례에 관한 기독교 신학’[Christian Theologies of the Sacraments]에 실린 애쉴리 널(Ashley Null)의 글인 “로머스 크랜머”에서도 인용되었음).


크랜머가 이해하기로는, 분명 성례가 복음을 물리적으로 형상화하여 보여주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살찌울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크랜머는, 루터와 칼빈처럼, 성찬에서 함께 나누는 떡과 잔이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 뿐 아니라 성도들 상호간의 영적인 연합도 상징한다고 믿었다. “떡과 잔은 모든 신실한 백성들이 그리스도께 뿐 아니라 그들도 서로 영적으로 연합되고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가장 생생하게 나타내준다”(크랜머가 1551년에 스티븐 가디너[Stephen Gardiner]의 교묘하고도 현학적인 트집잡기에 대해 준 답변. 철자는 필자가 알맞게 고쳤음. 이 인용문 및 아래에 나오는 세례에 대한 크랜머의 신학에 관한 내용은2016년 Lightfoot Scholarship at Cambridge에 실린 내 동료 스티븐 통[Stephen Tong]의 탁월한 글인 ‘에드워드 4세 시대의 교회에서 행해진 실천적 교회론으로서의 성례: 1547–1553’[The Sacraments as Practical Ecclesiology in the Church of Edward VI, 1547–1553]에서 가져왔다).


마지막으로, 크랜머를 우리의 모본으로 삼아 유아세례에 대해 첨언하고자 한다. 일관성이 부족해 보이긴 하지만, 크랜머의 신앙고백과 예전(liturgy)은 세례의 전체적, 회중적 국면을 올바르게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성공회 39개조 신조 중 제 27조는 세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례는 고백의 표시,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받지 않은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구별됨의 표시일 뿐 아니라, 세례를 받는 이들은 그 세례를 통해 교회로 올바르게 접붙임 받게 되므로, 중생 또는 다시 태어남의 표시이기도 하다(‘성공회 39개조 신조’). 또한 ‘성공회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 1552년)에 의하면, “세례” 이후에는 사제가 “이 자녀를 그리스도의 양 떼인 회중의 일원으로 받나이다”라고 기도하게 되어있다. 약간의 문제가 있어 보이기는 하나, 배울 점도 분명히 있다. 세례는 개인적인 의식이라기 보다, 지역 교회의 회중 안으로 들어가는 정문 같은 것이고, 세상과 교회의 “구별됨의 표시”이다.


그리고 오늘날은?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종교개혁이 성례에 대한 복음의 승리인 것처럼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로마 가톨릭 교회는 문자 그대로 성례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복음을 잃어버렸고, 종교개혁자들이 성례를 다시 주변부로 밀어냄으로써 복음을 회복했다는 식이다. 글쎄, 과연 그럴까?


개혁자들은 말씀과 성례의 관계를 원수가 아니라 둘도 없는 친구로 이해했다. 말씀에 능력이 있고 말씀이 우선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살찌우고 자기 백성을 세상과 구별시키기 위해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성례를 지혜롭게 친히 말씀과 연결해주셨다. 종교개혁자들이 회복한 이신칭의는 우리의 소중한 유산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회복한 복음은 복음의 다스림을 받는 복음의 사람들을 내어놓는다. 복음의 사람들을 묶어주는 복음의 표식에 대한 개혁자들의 통찰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출처: www.9marks.org 

원제: The Reformation’s Restoration of the Sacraments

번역: 이정훈

개혁자들은 말씀과 성례의 관계를 원수가 아니라 둘도 없는 친구로 이해했다. 말씀에 능력이 있고 말씀이 우선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살찌우고 자기 백성을 세상과 구별시키기 위해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성례를 지혜롭게 친히 말씀과 연결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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