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진정한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by Kevin DeYoung2020-03-17

우리 교회는 이 지역에서 “신학을 강조하는 교회”로 알려져 있다. 자랑하고자 함이 아니다. 신학을 강조해도 영적으로 열매 맺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함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믿음, 소망, 사랑이 있는 교회로 알려지는 것이 신학적 박식함으로 명성을 얻는 것보다 더 안전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여전히 “환경 운동에 힘쓰는 교회”나 “최신 유행을 잘 수용해 중고등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교회,” 또는 “화려한 무대 장치로 유명한 교회”보다는 “신학을 강조하는 교회”를 택할 것이다.


건강한 신학에 뿌리를 내리고, 건강한 신학을 추구하는 교회를 세우는 일은 강단에서 시작된다. 2004년에 유니버시티개혁교회(University Reformed Church)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나는 그곳에서 강해 설교라는 확실하고 견고한 유산을 받았다. 이 전통을 지키기 위해 현재까지 긴 시리즈로 설교를 해왔다. 지금까지 해온 주요 시리즈를 소개하자면, 창세기, 레위기, 역대하, 에스라, 전도서, 소선지서, 마가복음, 사도행전 고린도후서, 에베소서, 디모데후서, 베드로후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이다.


주일 오전에 드리는 예배처럼 얕은 물에서만 수영한다면, 교회는 깊은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내가 초점을 맞추는 대상은 대학 신입생들이다. 이들 중에는 스스로 사고할 줄 알고 진지한 가르침에 대해 열려있는 이들도 있지만, 새로운 용어, 이름,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도 있다. 다시 말해 회중에게 학습 능력이 있을 것이라 가정하지만, 그들이 내가 말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내용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물어보면 내 설교가 신학적이라 말할 것이다. 그 말은 곧 주중에 본문을 열심히 연구했다는 게 느껴진다는 뜻이고, 내가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는 뜻이다. 교회사와 조직신학을 통합한 설교문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이따금 설교에서 아주 학문적인 용어를 쓴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설교자가 자신의 신학 지식을 뽐내는 설교를 좋은 설교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세계 수준의 신학자가 세계 수준의 신학을 설교하면서도, 회중에게 세계 수준의 지루함을 선사해 신학적 성찰을 어렵게 만드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좋은 내용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신학적으로 사고하는 성도를 길러내기 위한 신학적 설교에는 다음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다.


첫째, 열정이 있어야 한다. 성도들은 설교자가 하는 모든 말을 다 듣는 것은 아니다. 설교자가 열정적으로 전하는 말만 듣는다. 칼케톤 신조(The Chalcedon Definition)에 대해 전할 때도 “지적인 분들에게는 이 내용이 중요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별 관심이 없으시겠죠”라는 식으로 말하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정말 엄청난 걸 다룬다는 거 모르셨죠? 오늘 예배에 정말 잘 오신 겁니다”처럼 말할 수도 있다. 벤 프랭클린(Ben Franklin)과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의 이야기가 그런 것이다. 복음을 거부했던 프랭클린이 휫필드의 설교를 한 마디도 믿지 않으면서 왜 자꾸 그의 집회에 가서 설교를 듣는 것인지 누군가 물었다. 프랭클린은 “알아요. 근데 휫필드 저 사람은 믿잖아요”라고 답했다. 설교자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신학적 성찰은 성도들을 결코 움직일 수 없다.


둘째, 우리는 최고의 신학을 먼저 우리의 가슴으로 가지고 가야 하고, 다시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끌어올려야 한다. 만일 내가 요한복음 10장으로 확실한 속죄에 대해 매우 상세하고도 학구적인 설교를 하면, 헌신된 칼빈주의자들은 좋아하고 나머지는 거부감으로 몸을 뒤틀 것이다. 하지만 내 설교에서 그리스도께서 택자들을 위해서만 죽으셨다는 것이 자신의 양 떼에 대한 그의 특별한 사랑과 자기 신부를 향한 멈출 수 없는 사랑의 표현임을 보여줄 수 있다면,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받을만한 존재로 만드실 뿐 아니라 끝까지 구원하심으로써 그 자신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죽음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어떻게 완전히 종식되는지를 아름답게 표현해낼 수 있다면, 그리고 이 난해한 교리가 우리의 마음에 호소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으로까지 이어지게 할 수 있다면, 비로소 나는 성경의 풍부한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엄밀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성도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설교 이상의 것


교회 사역에 있어 설교 이외에도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다. 신학 교육과 신학적 반성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에 스며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삶, 우리가 함께하는 교회 생활을 신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찬송, 우리가 드리는 기도, 예배의 순서, 심지어 광고를 어디에 넣느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신학적으로 사고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목회자들이 자신의 사역에 신학적으로 묵상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성도들이 자신들의 직업에 신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신학적으로 사고하는 교회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학적 식별력과 소양을 기를 수 있겠는가? 하나님 말씀의 부요함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어찌 자랄 수 있겠는가? 어찌 하나님의 사고를 좇아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신학적인 백성이 될 수 있겠는가? 개혁주의를 고백하는 우리 상황에서는 새신자 교육 내용을 벨직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그리고 도르트 신경으로 구성할 필요가 있다. 우리 교회 대부분의 새신자들은 개혁교회의 일치를 위한 세 신조(The Three Forms of Unity)를 들어본 적이 없지만, 수 세기 동안 세계 각처에서 하나님 백성들의 신앙을 살찌게 했던 이 신학 문서들을 스스로 읽어보는 것을 항상 새신자 교육의 하이라이트로 생각한다. 최근 우리 교회에서는 1년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52회에 걸쳐 매 주일 저녁 예배 때 설교했다.


우리는 모두 신학자들이다


내가 위에서 말한 내용은 리더십 훈련, 장로와 집사를 세우기 위한 검증 과정, 대학부 사역, 소그룹, 주일학교 등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비정상적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일 말씀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신앙고백 전통에 뿌리를 내리는 것, 성도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것, 그리고 전적으로 신학을 강조하는 것 모두 비정상적인 일이 된다.


피상적인 것만 좇는 이 세상에는 뭔가를 줄 수 있는 교회가 필요하다. 얕디얕은 문화 속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의 예배는 깊이가 있어야 한다. 세속적인 우리 사회에는 선하고 거룩한 사고가 더욱 많이 필요하다. 목사로서 내 사역, 교회로서 사역은 우리 모두 신학자라는 전제, 그 전제가 맞는다면, 우리 모두 좋은 신학자가 되도록 애써야 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e Need Theologians, Not Smarty-Pants

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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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Kevin DeYoung

케빈 드영은 노스캐롤라이나주 마태에 위치한 Christ Covenant Church의 담임 목사이며, 미국 TGC의 이사로 섬기고 있다. University of Leicester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고, 현재 샬롯에 위치한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의 조직신학 부교수이다. Just Do Something을 비롯하여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