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재정의 한다고요?
by Joe Carter2021-07-20

결혼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제정하셨다. 즉 결혼은 사회적 관습이나 금기를 따지는 인간의 머리에서 임의로 나온 게 아니다. 결혼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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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링컨은 다음의 질문을 던지는 것을 좋아했다. “만약에 개의 꼬리를 다리라고 부른다면, 개 다리는 몇 개가 될까요?” 그의 질문을 들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다섯 개요”라고 외쳤다. 그러면 링컨은 정중하게 “아닙니다”라고 말하고는 이렇게 설명했다. “정답은 네 개에요. 꼬리를 다리라고 부른다고 해서 꼬리가 다리가 되는 게 아니니까요.”


링컨의 질문을 들은 사람들처럼, 요즘 기독교인을 포함한 일반 시민들은 어떤 단어의 정의를 바꿀 때 그 단어의 본질(essence)까지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속는 것 같다. 여기에 관한 가장 큰 사례가 동성 결혼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결혼의 정의를 바꾸는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성애자의 관계를 “동성 결혼”(gay marriages)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 결혼이 진짜 결혼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의 생각은 개의 꼬리를 다리라고 부르면 꼬리가 다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문제가 많다.


우리가 살펴본 꼬리/다리 사례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변화를 고려해보자. 개의 꼬리는 다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개는 꼬리를 가지고 달리거나 수영을 하거나 또 가려울 때 몸을 긁지도 못한다. 꼬리와 다리 모두를 다리라고 부르려면, 꼬리가 다리와 다른 모든 요소를 포기해야 한다. 다리에 관한 새로운 의미는 이제 개의 발이 다리 끝에 붙었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기존 개의 형태(form)도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 개가 다리를 사용해서 서 있다고도 말할 수 없으므로 기존 개의 기능(function)까지도 바꾸었다. 다른 말로 하면, 꼬리를 재정의함으로 기존 개의 다리가 가진 형태와 기능을 꼬리에게 새롭게 부여하는 게 아니라, 기존에 개의 다리가 가졌던 특정한 기능을 없애버리고 대신 다리를 그냥 몸통에 붙은 부속물로 일반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결혼을 재정의하려고 할 때 같은 일이 발생한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의 하나 됨이라는 특정한 형태가 필요하다(창 2:24). 그렇기에 이 용어를 동성의 하나 됨에 적용하려고 할 때 우리는 결혼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뿐만 아니라 결혼이 수행해야 할 기능까지 변경해야 한다.


예를 들면 동성애 파트너를 가진 사람 중 적지 않은 비율이 일부일처제 또는 성적 배타성을 결혼의 필요한 요소로 보지 않는다. 그 사람들이 여전히 일부일처제라는 용어를 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 단어조차 재정의해서 “모노가미쉬”(monogamish)의 의미로 받아들인다. 모노가미쉬는 정서적인 면에서는 오로지 한 사람하고만 친밀감을 나누지만, 성적인 관계에서는 다른 사람과 또는 그룹 섹스까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이다. 결혼의 정의를 바꾸어서 동성 연합까지 받아들이는 것은 결혼에 필수적인 것으로 여겼던 모든 기능(예: 정조를 지키는 것)을 오히려 배제하기 때문에 결혼을 더 포괄적인 것이 아닌 더 배타적인 것으로 만든다.


결혼의 재정의 때문에 일어나는 변화를 인식한 어떤 기독교인은 이제 결혼은 투 트랙으로, 그러니까 국가가 정의하는 결혼과 교회가 정의하는 결혼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시각은 결혼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국가와 교회는 결혼의 본질적 특성을 바꾸는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결혼이라는 제도는 애초에 국가나 교회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고, 또 거기에 속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R.C. 스프로울(R.C. Sproul) 박사는 2013년 6월 테이블토크(Tabletalk)에 이렇게 썼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제정하셨다. 즉 결혼은 사회적 관습이나 금기를 따지는 인간의 머리에서 임의로 나온 게 아니다. 결혼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발명되었다.

교회, 국가 그리고 결혼이라는 이 세 가지 기관은 독립적이지만 동시에 또 서로 의탁적인 관계이다. 서로의 적법성을 인정할지에 대한 여부를 결정할 수는 있지만, 서로의 경계에 정확하게 선을 그을 수는 없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 관계는 국가와 국가 사이와 비슷하다. 예를 들어 미국 정부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할 수는 있지만, 가자 지구(Gaza Strip)를 배제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국경을 좁히는 방식으로 국가를 재정의할 수는 없다. 미국은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정의한 대로 국가로 인정하거나 아니면 아예 그 나라의 정당성을 거부해야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국가가 결혼을 재정의할 권한이 없지만, 복음 증거를 위해서 동성 결혼을 인정하는 법률적인 허용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 주장을 하는 그리스도인의 의도가 나쁘지 않을지 몰라도, 그들은 사실상 지키고자 하는 복음 그 자체를 훼손하고 있다.


결혼을 재정의하라는 법에 굴복함으로 그들은 바로 우리 예수님이 하라고 한 일을 반대로 하는 셈이다. 그들은 도리어 게이와 레즈비언 친구를 비롯한 이웃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는 행동을 하라고 부추기는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시 5:4-5; 롬 1:18).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거룩하지 않은 행동에 오래 참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행동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도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이 된다. 이웃이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제외되기를 바라는 당신은 결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엡 5:5).


교회가 참된 복음을 말할 용기를 갖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동을 보고 참기만 하면서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멸망을 향해 가는 것을 알면서 “그냥 서로 어울리면서 사이좋게 사는 게 좋지”라는 마음으로 계속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야 하며(행 4:31), 타락한 사람은 어쩌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내가 섬길 주인을 결정해야 한다. 지혜의 하나님인가 아니면 동성 결혼이라는 어리석은 우상을 만든 세상인가?




원제: Defining Marriage

출처: www.ligonier.org

번역: 무제

복음 증거를 위해서 동성 결혼을 인정하는 법률적인 허용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 주장을 하는 그리스도인의 의도가 나쁘지 않을지 몰라도, 그들은 사실상 지키고자 하는 복음 그 자체를 훼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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