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by Marshall Segal2020-04-10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감당하신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한다.


빛이신 성자 하나님은 깨지고 캄캄한 어둠의 세계를 뚫고 들어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다. 하지만 그의 백성들은 어둠을 사랑하여 그를 거부했다. 이제 어둠이 골고다 언덕 위의 그에게 내렸다. 우리의 죄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셨다.


예수님은 이를 감당하기 위해 탄생했고, 대적자들은 생애 내내 그를 힘들게 했다. 걷기도 전에 그를 죽이려는 자들이 있었다(마 2:16). 광야에서 자신을 시험하는 악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마4:1)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았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고소했다(마 10:2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죄인 중에 거하였으나, 그들은 그를 잔혹하게 공격했다. 끊임없이 음모를 꾸몄고, 구타했으며, 죽음에 이를 때까지 조롱했다.


이제 십자가에서 그의 침묵은 그들의 반란에 따른 적대감을 증폭시킬 뿐이었다.


그는 마침내 시편 22편 1절 말씀으로 침묵을 깼다.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5-46).


사방으로 에워싸였다


못 박힌 손과 기능을 상실한 폐를 가지고 예수님은 시편 22편 말씀을 붙잡았다. 이 구절은 사방에서 공격을 당하는 죄 없는 사람의 절박한 말이었다. 이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은 에워쌈을 당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입이 찢어질 듯 부르짖는 힘센 황소처럼(시 22:12-13), 마지막까지 그를 괴롭혔다. 바리새인들은 독사가 피를 찾아 나서듯이 어떻게 그를 죽일까 강구했다(마 12:4). 그가 결코 매달려 있을 곳이 아닌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그들은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중략]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마 27:42-42)라고 희롱하였다. 이것은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라고 예언된 시편 22편 8절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었다.


날카로운 이를 가진 개들처럼(시 22:16), 무리는 그를 죽이고 싶어 들끓었다. 그들은 살기가 등등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소리 질렀다(마 27:22). 빌라도는 “어찜이냐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라고 물었지만, 그들은 더욱 크게 소리 지르며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했다(마 27:23). 무리는 격노한 아이들처럼 그들의 유일한 희망을 미움으로, 거대한 분노로 표출했다.


풀잎 뒤에서 웅크리고 있는 사자 무리나 먹이를 짓밟고 있는 야생 황소처럼(시 22:21),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멸시와 고통을 가했다. 그들은 가시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웠다(마 27:29). 죄 없으신 얼굴에 침을 뱉었다(마 27:30). 그들은 손과 발에 못을 박았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 시편에 적힌 그대로(시 22:18), 그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었다(마 27:35). 그의 고통을 즐거워했고, 해 같이 빛날 그의 얼굴을 비웃었다.


스스로 죄를 지어 심판에 직면하고 있는 행악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멸시하는 말을 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 23:39). 서기관과 무리, 로마 군병들과 강도들의 멸시와 비웃음으로도 불충분했는지,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도 그가 죽도록 놓아두고 떠났다. 베드로는 예수를 안다는 사실을 거듭하여 격렬하게 부인했다(마 26:70). 나머지 제자들은 두려움에 모두 도망쳤다(마 14:50).


예수님은 사방으로 에워싸였다. 이제 그는 들소와 개와 사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홀로 놓였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하지만 그를 둘러싼 모든 위협은 그가 감내해야 하는 진노, 위로부터 오는 진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다]”(사 53:10)고 쓰고 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은 다른 모든 슬픔을 삼켜버릴 만큼 너무나도 큰 슬픔이었다. 아버지 하나님은 수천 년 동안 타락한 인류의 잔학 행위를 싫어하셨는데, 이제 이에 대한 적대감이 마침내 아들에게 엄습했다. 우리를 위해서 말이다.


사도들은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7-28)라고 성부 하나님에게 기도했을 것이다. 창세 전에 이 참혹한 시간이 있을 것이 기록되었다(계 13:8). 역사의 모든 순간은 이 순간으로 이어졌다. 죄 없는 어린 양 학살의 순간으로 말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고난을 알고 있었지만(마 20:17-19), 그것이 고통을 줄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가 겪은 괴로움의 깊이를 결코 알지 못한다. 우리가 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십자가로 향하는 그의 모습을 그냥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 말씀


우리는 시편 22편을 예수님이 버림받는다는 선언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시편 22편 1절을 외치실 때, 그는 그 시편이 어떻게 끝나는지 잊지 않고 있었다. 다윗 왕도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았음을 느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시 22:24).


그리고 두 구절 뒤에,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시 22:26)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1절의 무게를 알고 있었지만,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볼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통치할 것을 말이다. 죄로 인해 죽었으나 다시 살아 아들로서 보좌에 앉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 이루었다


히브리서 저자가 피로 물든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이 받은 영광의 왕관을 보았을 때, 그는 시편 22편을 인용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히 2:10-12).


예수님이 시편 22편 1절을 외치며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때, 그는 그 노래를 언젠가 마저 부를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말했을 때는 영원한 왕국 건설을 막 시작했을 때다. 그때 그는 첫 열매를 맺기 전에 시작된 전쟁을 마치고 있었고, 그의 영원한 왕국을 위한 서문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그리고, 시편 22편이 예언했듯이(시 22:30-31), 그가 무엇을 이루셨는지 항상 이야기될 것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He Was Forsaken by the Father: The Horror of Good Friday

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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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arshall Segal

마샬 시걸은 작가이자 desiringGod.org의 책임 편집자이다. Bethlehem College & Seminary를 졸업했으며, 한국어로 번역된 '아직 결혼하지 않은 당신에게'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