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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는 데 시적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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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Jessica Hooten Wilson /  작성일 2021-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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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에 담긴 이런 다양한 시적 표현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시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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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들을 귀 있는 자가 듣게 하라” 예수님은 말했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씀하신다면, 만약에 우리가 그의 음성을 향해서 귀머거리가 되어 버렸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상황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이 만약에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만약에 비유적인 설교를 해석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듣지 못하는 상태라고 경고했다. 베일러 대학(Baylor University)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는 데이비드 라일 제프리(David Lyle Jeffrey)는 ‘성경과 영시의 시적 상상력’(Scripture and the English Poetic Imagination)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단서를 제공한다. 제프리는 이렇게 주장했다. “예수님이 굳이 허구적이고 비유적이며 또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한 이유는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드러내고 싶은 만큼 또 동시에 감추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간절하게 찾는 사람만이 그가 들려주는 말씀의 뜻을 볼 수 있도록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귀를 시에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은 시인이다”라고 제프리는 말한다. “그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뿐 아니라 그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는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듣는 이가 메시지의 형태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메시지 속 내용이 아예 상실될지도 모른다. 하나님 말씀에 대해 제프리는 이렇게 설명했다. “매우 자주… 하나님은 시인처럼 말씀하신다.” 성경을 펴고 제프리의 주장이 맞는지 확인해보라. 성경을 소리내어 읽을 때, 얼마나 자주 비유적인 언어를 만날 수 있는가? 창세기 속에 있는 히브리식 형태, 시편 속 시적 표현들, 그리고 잠언과 아가서를 보면 더 확실하다. 하나님은 이사야와 에스겔에게 시적으로 말씀하셨다. 또 예수님의 비유 등등 성경 속에 담긴 이런 다양한 시적 표현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시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높고 거룩한


제프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를 듣거나 또는 시를 즐기는 데 시간을 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30년도 더 전에 탁월한 시인이었던 다나 지오이아(Dana Gioia)는 이제는 더 이상 시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미국인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시가 여전히 중요할 수 있을까? 비록 시가 계속 쓰여지고 있지만, 시는 이제 문학 생활의 중심에서 뒤로 후퇴했다.” 시를 읽는 것은 이제 시대와 동떨어진 일이 되었다. 시는 이제 베레모를 쓴 뉴요커 또는 동부 오스틴의 힙스터(hipster, 1940년대 미국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속어로 유행 등 대중의 큰 흐름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패션과 음악 문화를 좇는 부류-역주)나 즐기는 것으로 여겨진다. 제프리는 시가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것이라는 느낌을 주는 지금 시대의 현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시를 읽겠다고 결심하도록 만들 만한 좋은 점이 시에 있다. 제프리의 시각에서 볼 때, 시가 가진 수준높은 스타일은 그 시가 담고 있는 내용의 거룩함을 더 강화시킨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시를 가지고 일상의 대화를 할 수는 없지만, 시는 얼마든지 미스터리를 담아낼 수 있고, 또 시를 듣는 이는 그 시가 담고 있는 내용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제프리는 충고한다. “하나님 왕국에서 우리가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치중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거룩함에 더 잘 나아가게 하는 시라는 예술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시는 바로 믿음으로 나아가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다.” 주일이 거룩한 시간으로 다른 날과 구분되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원한 본성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처럼, 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중요함과 경외로움을 다시금 알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지금 현재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인터넷 중독이라는 집단적 마취 상태가 끝나고 그나마 상상의 힘이 남아있는 미래의 삶을 가능하게 하려면,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채우는 싸구려 대체품에 의해서 시가 완전히 소멸되기 전에, “그 옛날에는 세상이 어땠지?”라는 질문에 대답할 정도의 기억은 우리에게 남아있어야 한다.


종교개혁 이후의 시


제프리는 책의 후반부에서 ‘종교개혁 이후’와 ‘나 자신(self)을 도덕적 의무의 권위자 및 중재인’으로 상향시키려던 종교개혁 속 인본주의자들의 경향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것은 물론 종교개혁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였다. 그럼에도 그런 경향은 낭만주의와 계몽주의 작가들로부터 시작해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들의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초기 종교개혁 당시 영국 시인인 존 돈(John Donne)과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의 작품은 신실한 기독교인의 글이지만, 또 동시에 시는 대단히 개인적인 면을 치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돈은 고백과 회개, 구원에 대한 열망을 시로 썼지만 허버트는 기도문을 쓰고 그 글을 목양의 방법으로 사용하여 그의 집에 모이는 회중들에게 읽어주었다. 신학과 정치 그리고 교회라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던 단테(Dante) 또는 초서(Chaucher)의 시적 서사는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내적 성찰을 다룬 시로 대체되었다.


낭만주의 시가 가진 이단성을 논하는 데 시간을 쓰는 대신(이것은 그냥 내 생각이지, 저자인 제프리의 의도는 아닐 수도 있다), 제프리는 17세기를 지나 자기 참조적 시(self-referential poetry)라는 거짓된 생각을 그대로 계승한 근대로 넘어온다. 그는 1953-1954년에 있었던 기포드 강연(Gifford Lectures, 1887년부터 시작한 영국 신학계의 강연-역주)에서 있었던 존 맥머레이(John MacMurray)의 경고를 인용한다.


“가장 먼저 근대 철학은 나(self)를 시작점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나는 이제 고립된 개인이다… 그렇게 전제가 된 자아는 이제 지식, 그러니까 유용한 정보를 찾는 사상가다.”


나에 대해서 이런 가정을 하는 이상, 굳이 뭐하러 시를 읽어야 할까? 더 나쁜 것은, 이런 식의 사고, 고립된 개인의 본성을 전제로 한 사람이 쓰는 시는 필연적으로 모호하고, 표현은 거창할지 몰라도 넌센스로 가득할 뿐이다. 제프리는 이런 근대성의 모토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의미가 무엇인지는 당신이 정하기 나름이다.”


아마도 이런 현실은 왜 시가 더 이상 인기가 없는지에 대한 설명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제프리는 이렇게 썼다. “현대 시인은 필연적으로 눈에 보이는 공공 시각 영역 밖에서 느낀다.” 만약에 우리가 의미라는 면에서 동떨어진 소리만 한다면, 우리는 독자에게 책임감을 느낄 필요도 없고, 우리가 생각하는 생각의 틀 외의 어떤 것을 표현하는 데 굳이 열정을 가질 필요도 없으며, 또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지배하는 그 어떤 권위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제프리는 이렇게 한탄했다. “현대 시인이 가진 몇 안 되는 딜레마 중 하나는 독자들이 아는 단어가 점점 더 적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더 나아가 과거와의 대화가 단절되도록 만든다.”


그러나 현대 시인들과 현대 영어시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 “관계 속에서의 개인의 형태”를 표현함으로써 “개인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공유된 기억”을 불러 일으키는 시는 우리에게 “공통 비전의 일부를 돌려줄 뿐 아니라 집으로 가는 길이 된다.”


시의 급박성


이미지의 한 조각으로서, ‘종교와 예술의 저널’(Journal of Religion and the Arts)에서 캐서린 윌리스 퍼쉬(Katherine Willis Pershey)는 이렇게 주장했다. “전쟁 범죄와 자동차 광고가 범람하는 이 세상에서, 시는 평범한 아름다움과 궁극적인 중요성에 우리의 관심을 기울이라고 조용하지만 확고하게 외치고 있다.”


시는 이해불가한 수수께끼에 이름을 붙여준다. 과열된 모니터에서 쏟아져 나오는 평범한 단어가 둔탁한 소리처럼 느껴질 때, 시는 신적 개입처럼 그런 소음을 부수고 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며 또 우리는 누구인지를 다시 들을 수 있도록 한다. 시가 없으면 우리는 컴퓨터의 코드처럼 말하는 운명으로 전락할 것이다. 의미 없는 슬로건으로 가득찬 광고처럼 말하거나 또는 짖거나 우는 동물 소리나 내는 존재로 전락할 것이다. 시는 우리를 창조 질서 속에서 창조된 바른 피조물의 위치로 승격시킨다. 


제프리의 말처럼, 만약에 하나님이 ‘최초의 시인, 이 세상이라는 최초의 시를 쓴 존재’라면, 우리는 그 시를 들을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경고한대로 우리는 눈은 가지고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는 가지고 있으나 듣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원제: Why Christians Need a Poetic Imagination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제프리의 말처럼, 만약에 하나님이 '최초의 시인, 이 세상이라는 최초의 시를 쓴 존재'라면, 우리는 그 시를 들을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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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Jessica Hooten Wilson

제시카 후튼 윌슨은 University of Dallas의 인문학 및 고전 교육 대학원 프로그램에서 연구하는 학자이다. 그녀는 예술과 문화 부문에서 Christianity Today 도서상을 수상한 'Giving the Devil His Due'를 포함하여 세 권의 책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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