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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무덤, 다시 살아나신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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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Chris Donato  /  작성일 20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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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Bruno van der Kraan on Unsplash

많은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그냥 십자가에 매달아 놓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 같다. 그래서 부활을 소홀하게 다루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이 많은 관심을 받아야 하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다.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도록” 만든 “한 의로운 행위”이기에(롬 5:18) 그렇다. 다른 말로 해서, 예수님의 삶 전체에 걸친 아버지의 뜻과 목적을 향한 순종은 그가 자신의 생명을 그의 백성을 위해서 내어놓았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그게 바로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이다. 이것을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까지는 십자가가 상징하는 공적인 부끄러움과 분노 아래에서 사는 것을 더 자연스럽게 여길 것 같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 생각을 조금 더 발전시키면 우리는 고통의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십자가야말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공감을 드러내는 완벽한 계시가 된다는 것이다. 한 의로운 행위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이가 이뤄낸 확실한 승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아직도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면 도대체 그는 어떤 승리를 이뤄낼 수 있을까?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데에 실패한, 환상에서 깨어난 어느 한 갈릴리 출신 청년의 이야기 속에서 승리를 찾을 수 있을까? 아니다. 전혀 아니다.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는 말 그대로 어리석음일 뿐이다.


십자가는 결코 역사 속의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오순절 성령의 부어주심. 이 모든 것이 합하여 전선을 이룸으로 죄와 죽음의 시대와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 부활절 아침만큼 죄와 죽음이라는 끔찍함의 패배를 더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은 없다. 부활은 인간 예수님이야말로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고” 또한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 선언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고 또한 그를 “주와 하나님”(행 2:36)으로 높이셨을 때, 예수님과 그의 놀라운 사역은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만약에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다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고전 15:19)가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만약에 그리스도가 다시 살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세상이 여태까지 목격한 가장 저주받고, 불행하고, 가여운 운명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실상 죄와 잡초, 그리고 죽음에 불과한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사기극을 영광스러운 구원이라는 희망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부활은 일어났고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바로 이것이야말로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쓴 이유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1절).


부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주는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 여기에는 양보(협상)의 여지가 없다. 나사렛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결코 자신을 ‘사도적 기독교’(Apostolic Christianity)에 속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이것은 신약 전체의 메시지이며 무엇보다 로마서 10장 9절에 명확하게 나온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 사실을 부인하면서도 ‘친절과 존경’(벧전 3:16)으로 대접받는 사람들과는 친교의 식탁을 같이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고백하는 ‘기독교’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대면해야 하는 질문은 부활의 증거가 아니다. 부활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이 가지는 중요성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해서, 부활은 타락이 가져다준 저주(죄, 잡초, 그리고 죽음)를 뒤집었다. 물론 그건 부활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으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고, 부활까지 이어진 다른 모든 사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바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예수님(종종 ‘적극적’인 순종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의 순종(‘소극적’ 순종)이다. 전자의 형태로 볼 때 두 번째 아담으로서 예수님의 역할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는 완전한 순종으로 아담이 범한 불순종의 죄를 물리쳤는데, 이는 언약을 지키지 않은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를 극복한 것이기도 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복음의 빛을 이 세상에 비추려고 했다(사 41:8-9; 49:3-6). 그리고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왔다. 오로지 그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로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 또는 왕은 국가를 향해서 하나님이 선택한 대리자라는 의미 외에 하나님을 향한 국가를 의미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삼하 19:43; 20:1). 그렇기에 이스라엘의 경우에(사 63:16), 왕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삼하 7:14; 또는 시 2:6-7). 물론 이스라엘의 왕은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신성시되지는 않았다(물론 우리 예수님은 예외이다. 그분은 하나님도 되고 사람도 된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경우,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그의 정체성이 그의 백성과 하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관한 모든 것은 최소한 원칙적인 의미에서 그의 백성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에게(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롬 9:4-8)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이 그랬듯이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 약속의 상속자가 되고, 또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충실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롬 6:1-14)라고 했을 때, 그가 말하고자 한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완전한 신실성(fidelity)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선물은 바로 생명 그 자체이다(“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5).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한다.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죽음까지 감내한 예수님의 순종이야말로 처음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의 차이를 극명하게 가르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롬 5:15). 참으로 이 은사는 훨씬 더 위대하다.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는 아담의 범죄를 가리고도 남는다. 그럼 그 은혜는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맡긴 책임은 위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따라서 살아감으로 아담의 타락이 초래한 저주와 멸망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점에 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이것은 바로 아담이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남아 있는 한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선’은 언제나 율법을 어기고 싶은 ‘악’에게 자리를 내어준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죄가 정복되고 오래된 아담의 모습이 구원받으려면 주님의 할 일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사 53:11). 누가 우리를 이 죽음의 몸에서 구원할 수 있을까? 대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 예수님이 오셔서 죽음을 포함한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게 순종하셨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아담의 믿음 없음을 뒤집었다. 그리고 이 타락하고 더러운 세상이 회복의 길에 들어서도록 했다(롬 8:21-22).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중요한 점이 있다.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결국 우리도 그의 승리와 높이 되심을 같이 누린다는 것이다(롬 6:1). 완전한 순종으로 인해서 죄가 패배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죄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는 마치 죽음을 받치고 있던 양탄자를 빼버린 것처럼, 죽음은 예수님을 무덤에 가두어 놓을 힘을 잃었다. 바로 이런 사실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이라면 한 번은 죽어도 다시는 죽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게 된다.


다시 말해 이 탁월한 부활은 다가올 위대한 부활의 ‘첫 열매’였다(고전 15:12-33; 51-57 참조). 예수님의 피값으로 살게 된 그리스도인은 이제 하나님과 율법에 따라 그리스도의 높이심에 참여하고 거룩한 재판관 앞에서 의로운 존재로 간주한다.

그렇기에 세 번째 날, 그러니까 부활절 아침은 새로운 날을 목격하는 새벽이다. 그 전에 있었던 다른 날들과 전혀 다른 의미의 새로운 날이다. 이날은 앞으로 나아갈 미래를 그 속에 품고 있다. 오래된 전쟁을 비유로 한 말이 떠오른다. 승리는 이미 선언되었다. 비록 죄와 죽음은 아직도 그 소식을 들어야 하지만 전쟁은 끝에 다다르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죄와 죽음을 대항해서 싸우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더 이상 그것들의 노예가 아니다. 승리자 예수님이 죄와 죽음의 멍에를 감당함으로 파괴했다. 말 그대로 진짜 비어버린 예수님의 빈 무덤은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희망이 뭔지를 가르쳐준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앞으로 겪을 미래의 부활을 바라보게 한다. 이 세상이 주는 불확실성과 혼돈은 종종 무서울 정도지만 우리는 거기에 절망해서는 안 된다. 하늘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룬 하나님의 승리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런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슬픔과 비극 속에서 아무리 힘이 들어도 우리는 새로운 창조와 이 땅에 이루어질 천국의 약속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일이면 반복해서 믿음으로 선언한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달콤한 포도 덩굴에 의해 잡초가 사라지는 날이 올 것이다. 진정한 정의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며, 한때 감금된 죄인들은 전능자 앞에서 완벽하고 겸손하게 부활한 몸으로 살게 될 것이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He is Not Here, He is Risen

번역: 무제

작가 Chris Donato

크리스 도나투는 트리니티 인터내셔널 대학의 커뮤니케이션 이사로 ligonier Tabletalk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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