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고백서들로 읽는 '코로나19'의 정국
by 장대선2020-03-10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관련하여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 특히 신천지 집단의 일방적이고도 맹목적인 신앙의 태도에서 발생한 급격한 바이러스의 전파는 급기야 경기도지사의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을 고려하는 단계에 이르게 했다. 국회에서도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채택하는 등 파장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모든 종교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안타까운 것은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을 고려하고 있는 경기도지사 또한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는 점이다. 아울러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채택한 국회의원의 상당수도 기독교 신자이다. 즉 기독교 관원이라 할 그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그리스도께서 확립하신 신앙과 양심의 자유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혹은 거의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 중에도 현 정권에 대한 반대와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주도하는 일부 급진적 성향의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대정부 차원의 반대와 퇴진 운동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과 같은 대책을 신학적인 비평과 국가 권세와 교회의 적절한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 이해하는 관점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정교분리’(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전혀 별개로서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존재와 구성원들이 모두 국가라는 제도적인 영역 안에 포함된 이상,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완전히 별개일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서로 교차하는 영역을 얼마만큼으로 할 것인가, 혹은 서로 교차할 수 없는 영역을 얼마만큼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와 규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교회의 문제에 국가의 공권력이 관여해서는 안 되고, 세속정치에 교회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철저한 정교분리가 교회의 바람직한 입장이라고 한다면, 미군정 하에서 교회가 받았던 적산가옥의 활용이나 군사정권 하에서 반공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역할로 받은 수많은 혜택은 전부 불법이며 정당하지 못한 것이다.


사실 장로교회는 교회와 국가권력 사이의 적절한 영역설정에 성경적인 지침을 이미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대로부터 17세기 개혁신학이 융성했었던 시기에 이미 충분한 경험과 신학적 검증 가운데서 적절한 영역을 설정한 것이다. 16세기에 이미 융성한 장로교단을 형성하고 있었던 프랑스 위그노들의 신앙고백(1559)에서부터 17세기 장로교회의 신앙 표준을 완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에 이르기까지, 장로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 교회와 국가 사이의 적절한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충분히 입증하는 신조와 교회 정치의 원리들을 산출해 둔 것이다.


예컨대 프랑스 신앙고백 제39조를 보면, 관원의 역할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무질서와 정욕을 억제할 굴레로 세상에 세속정부와 법률을 세우셨다고 믿는다. [중략]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만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 만이 아니라 첫 번째 돌판을 거스르는 범죄까지 억제하시기 위하여 관원들의 손에 검을 쥐어 주신 것이다.”라고 했다. 제40조에서도 관원에 대한 복종에 관하여 “우리는 관원들의 법률과 규칙에 따르며, 세금, 조세, 그 밖의 의무를 수행하고, 비록 그들이 불신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침해받지 않는 한 자율적이고 기꺼운 마음으로 복종하는 멍에를 메야 한다.”고 했다.


벨기에 신앙고백(1561)에서는 제36조에서 위정자들에 관하여 “그들의 직책은 단지 국가의 복지에 관심을 두고 감시할 뿐 아니라, 거룩한 목회사역을 보호하며, 모든 우상숭배와 거짓된 예배를 제거하며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위정자들은 어디서든지 복음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을 장려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령하신 대로 모든 사람에게서 존귀와 예배를 받으시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에서도 제23장 국가의 관원에 관하여 서술하는 과정 중 3항에서 이르기를 “관원은 말씀과 성례의 집행도, 천국 열쇠의 권세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관원은 교회에 일치와 평화가 유지되도록, 또한 하나님의 진리가 순결하고 온전한 상태로 간직되도록, 그리고 모든 신성모독과 이단들의 활동을 금지하도록, 아울러 예배와 권징에서 생기는 모든 부패와 악습을 예방하거나 개혁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규례가 정당하게 확립되고 시행되며 준수되도록 적절한 수단을 강구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관원의 의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이미 언급한 프랑스 신앙고백과 벨기에 신앙고백,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만 하더라도 교회와 국가의 위정자 혹은 관원들에 대한 분명한 역할과 한계를 규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개혁된 교회들의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에서 동일한 맥락의 문구를 찾아볼 수 있을 만큼 교회들은 이미 그에 관한 입장을 충분히 정리했다.


물론 현대사회의 관원들이 모두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다종교국가로 존재하는 실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교회의 신자는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얼마든지 적절한 실천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더욱이 교회의 신앙을 가진 관원들의 경우라면 더더욱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자신이 감당해야 할 적절한 실천이 무엇인지를 알고서 행해야 마땅한데, 안타깝게도 한국의 교회들에 출석하는 관원들의 대부분은 그렇게 행하는 경우가 극히 드문 현실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0장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관한 일련의 항목은, 작금의 ‘코로나19’ 바이러스 정국 가운데 엮여 있는 신천지 이단이나 무분별한 정치적 선동을 일삼는 일부 단체들에게, 그리고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채택하고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을 고려하는 현 실정에 대해 분명하고도 성경적인 판단과 조언을 할 수 있는 지침들을 서술하고 있다.


선동을 주도하는 일부 세속정치 지향의 사역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자유는 서로 파괴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 간에 서로를 지지하고 보존하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핑계로 국가적인 권세든지 교회적인 권세든지 간에 어떤 합법적인 권세나 그 권세의 합법적인 행사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라고 한 4항 초반부의 신앙고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채택하고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을 고려하고 있는 가운데 그 역할을 적극적으로 실행해야 할 기독교 관원들에게는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시며, 따라서 믿음의 문제이거나 예배의 문제이거나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벗어난 ‘사람의 가르침이나 명령’에 양심을 얽매이지 않게 하셨다. 그러므로 양심 때문에 그런 가르침을 믿거나 그런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참 자유를 저버리는 것이다.”라고 한 2항 초반의 신앙고백을 살펴보아야 한다.


작금의 ‘코로나19’ 정국 가운데 깊이 엮여 있는 신천지 이단과 그들에게 빠진 자들에게는 “그리고 ‘맹목적인 양심’과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며, 이성도 역시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한 2항 후반부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분명하고도 성경적인 판단과 조언을 들어야 한다.


교회의 사역자들과 신앙인들 가운데 이러한 신앙고백의 문맥을 특정한 시대, 곧 16세기와 17세기 유럽 지역의 종교․사회적인 특수성으로 이해하고 고려해야지 오늘 우리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하는 견해를 흔히 볼 수 있다. 신앙고백은 단순히 그 시대의 영주들이나 관원들의 견해나 입김을 의식하여 작성한 것이 아니며,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에 근거하여 작성한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그러한 견해를 결코 섣부르게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자유는 서로 파괴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 간에 서로를 지지하고 보존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핑계로 국가적인 권세든지 교회적인 권세든지 간에 어떤 합법적인 권세나 그 권세의 합법적인 행사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라고 한 4항 초반부의 신앙고백이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중략]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한 벧전 2:13-16절 말씀을 근거로 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시며, 따라서 믿음의 문제이거나 예배의 문제이거나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벗어난 ‘사람의 가르침이나 명령’에 양심을 얽매이지 않게 하셨다. 그러므로 양심 때문에 그런 가르침을 믿거나 그런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참 자유를 저버리는 것이다.”라고 한 2항 초반의 신앙고백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한 행 4:19절 말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아울러 “그리고 ‘맹목적인 양심’과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며, 이성도 역시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한 2항 후반부의 신앙고백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한 롬 10:17절의 말씀과 그 외의 수많은 성경 구절들에 근거하여 정리하며 고백한 것이라는 사실을 살펴본다고 한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비롯한 역사적 신조와 신앙고백의 문구들을 그처럼 쉽게 시대적인 산물로 간주할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일들 가운데서, 많은 신앙인이 의외로 간단하게 자신들의 신앙적 밑바닥을 보이는 것 같다. 즉 국가 위정자들에 관하여, 이단들에 대하여, 그리고 예배에 관하여 너무도 쉽게 자신들의 오류와 불신앙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한 일련의 일들이 결코 간단하고 짧은 생각 가운데서만 이뤄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속에 있는 믿음과 신앙의 기초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이 시대의 변화가 제시하고 있는 질문에 대하여 과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올바른 답을 줄 수 있는지를 스스로 통찰하는 의미로서, 이미 역사를 통해 충분히 논의되고 검증되었던 신앙고백서와 신조들을 깊이 있게 탐구해 보는 차분하고 건전한 열정이 절실히 요구되는 대목이다. 섣부른 답변을 남발하기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행 17:11-12)았던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과 같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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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장대선

장대선 목사는 도서출판 고백과문답 대표와 장로교회정치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교리 연구가로 활동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스터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제2치리서’ 등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