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에서 지금 배울 것들
by Robert Gonzales Jr.2020-03-20

기독교인들도 종종 서로 간에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곤 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 복음주의 진영 속 수많은 교단들의 난립만 봐도, 또 교단적 또는 신학적 노선 사이에서 벌어지는 날카로운 논쟁들만 보아도 이 사실은 잘 알 수 있다. 성경적으로 “사회적 정의(justice)”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지금의 논쟁은 불일치에 대한 하나의 좋은 예이다. 이런 종류의 분열은 사실 우리를 낙망하게 하고 고통을 주며 종종 믿음을 흔들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안에서의 불일치가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같은 마음”(빌 2:2)을 품으라고 강하게 권고했던 사도 바울 본인조차도 항상 다른 이들과 같은 마음을 품었던 건 아니다.


사도행전 15장 36-41절은 바울과 그의 가까운 동료 바나바 사이에서 있었던 날카로운 불일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을 다음 선교 여행에 꼭 데리고 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마가가 예전에 자신들을 저버렸다는 이유로(행 13:13) 바울이 반대했다. 이 두 사람 사이의 대립이 특히 더 가슴 아픈 것은 그로 인한 결과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슬픈 현실까지 성경이 굳이 드러내는 이유는 우리를 절망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훈을 주기 위해서이다.   


일단 이 사건을 간단하게 살펴보고 그 다음에 교훈을 찾아보자.


누가 옳은가?


먼저 두 사람이 서로 갖고 있는 생각을 살펴보자. 바울의 논리는 이것이다. 마가가 전에 떠났다는 것. 그런 식의 이탈은 사실상 심각한 일이다(눅 9:62; 잠 25:19). 이 세상 그 어떤 대장이 전투 초기에 진영을 이탈한 군인을 데리고 전투를 벌이고 싶겠는가? 겉으로 보기에 바울은 성경적인 원칙을 따르는 것 같다.


그러나 판단을 내리기 전에 우리는 바나바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잠 18:17). 이 구절에서 바나바의 논리는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기존에 알고 있던 그의 성격에 근거해서(행 4:36; 9:26-27) 유추하는 길 밖에 없다. 나는 바나바가 마가의 과거 행동을 감싸고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나바 또한 복음을 전하는 자는 신실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또 다른 성경적 원칙을 바울에게 제시하지 않았을까 싶다. 과거의 죄와 실수가 꼭 미래의 신실함과 성공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사도 베드로를 생각해보자.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여전히 사용했다. 나는 바나바가 바울에게 이렇게 말했을 거 같다. “아니, 그럼 베드로는? 왜 베드로는 되는데 마가는 안 된다는 거야?”


누구 편을 들기 전에 한 가지 기억할 점이 있다. 불일치가 항상 이단 또는 부도덕과 같이 심각한 문제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두 사람은 지금 예수님의 신성과 같은 근본적인 믿음의 문제를 놓고 다투는 게 아니다. 또는 사역자가 간통을 해도 되는가 여부를 놓고 싸우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헌신한 경건한 두 사람이 성경적 원칙의 적용 문제를 놓고 다투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이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은 이들이 각각 다른 성경적 원칙을 강조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만약에 이들이 조금만 더 균형을 가지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원칙을 바라보았다면 이 다툼은 그리 오래지 않아 끝났을 것이다.


나는 사도행전을 쓴 누가가 그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누가가 바울이 실라를 선택하고 다른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한다고 썼다고 해서(행 15:40), 반드시 당시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바울의 편을 들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이건 단지 바울과 바나바와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관계를 끊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그리고 행여 그들이 바울의 편을 들었다고 해도, 그게 그들이 옳았다는 의미도 아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가 더 옳았고, 누가 더 틀렸는지에 관심을 갖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배울 점은 무엇인가?


자,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날 많은 불일치를 경험하는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 네 가지가 있다.


1. 편들고 싶은 마음을 버리라


종종 우리는 한쪽을 선택하고, 또 나름의 강한 의견을 고수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꼭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나름의 고민과 의심스런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문제를 주님의 손에 맡기는 게 가장 지혜로운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종종 보면 왜 두 명의 훌륭한 기독교 지도자가 각기 다른 영역에서 사역하는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 그 두 사람은 같은 도시에 있고 또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같이 사역하지 않고 따로 하는 걸까?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나 어느 한쪽 편을 들기 원하는 분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싶은 유혹과 싸우라. 그리도 양쪽을 다 주님께 일임하라(빌 3:15). 


2. 지금 시대에는 언제나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종종 우리는 교회를 너무도 이상적으로 바라본다. 교회나 목회자가 실망을 주었을 때, 복음의 능력에 대해서 회의를 갖고 더 나아가서 아예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까지 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적인 현실주의자가 되라고 하신다. 어차피 인간은 유한하고 또 우리 안에 죄가 여전하기에, 성경 속 두 명의 거룩한 사도들까지 서로 싸우게 만들 정도라면, 아무리 경건한 사람들이라도 서로 강하게 대립할 수도 있고 때로는 갈라설 수도 있는 법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전체가 다 드러나지는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고전 13:9-10). 그건 마치 그림 퍼즐의 전체 모양이 뭔지 알 수 있는 것 같지만 중간 중간 몇 조각이 빠져있는 것과 비슷하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진실한 기독교인들조차 성경적 원칙을 적용하려고 할 때, 모두가 다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청교도인 매튜 헨리(Puritan Matthew Henry)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든 빛과 사랑이 완벽한 천국에 가기 전까지는 결코 이 땅에서는 다 같은 마음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3. 모든 불일치를 선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안식을 누리라


사탄은 아마도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으로 뭔가 이득을 얻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이 도모하는 악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꾼다(창 5:20; 롬 8:28).


이 점을 생각해보라. 이 둘의 갈등 덕분에 선교 사역에 투입된 인원은 두 배가 되었다. 더 많은 사역이 가능해졌다. 새로운 교회들이 더 많이 세워졌다. 바울이 애초에 바나바에게 했던 제안은 그들이 이미 세운 교회를 다시 방문하는 것이었지만(행 15:36), 하나님의 계획은 다른 데 있었다. 하나님은 선교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까지 뻗기를 원했다.


또 하나님께서 이 갈등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유익을 끼쳤는지도 한번 생각해보라. 마가를 회복시키려는 바나바의 노력은 아마도 마가에게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바울의 완고함은 마가로 하여금 다시는 실수를 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하도록 했을 것이다. 또 바울의 태도 덕분에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있으면서 좀 더 주의 깊게 그를 관찰하고 더 엄격했을 것이다. 또한 은혜를 강조하는 바나바를 통해 바울은 보다 더 예민하게 인내심을 가진 사람으로 그의 후반기 선교사역을 진행했을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바울이 그의 말년에 이르러서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노예에게 어떻게 했는지 알고 있다. 바울의 태도가 바나바가 마가에게 보였던 바로 그 모습이 아닌가!(몬 1장)


자,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 있는 불일치과 분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위한 선, 우리를 위한 선, 그리고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만들어 가시는지 살펴보자.


4. 다름이 사랑을 파괴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기억하라


날카로운 불일치와 심지어 분열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두 사람이 서로를 신실한 형제로 보았고 또 서로의 사역을 지원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계속해서 바나바를 그리스도의 사도 그리고 왕국을 위한 신실한 동역자(고전 9:5-6)라고 부르고 있다. 다른 형제들에게 “여러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한(엡 6:18) 바울은 자신부터 그렇게 했을 것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바나바와 마가를 위해서 기도했다. 그리고 바나바와 마가 역시 바울을 위해서 기도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게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당신을 반대하는 사람을 기도 목록에서 지우지 말라. 그 사람이 틀리다고 생각한다면,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해달라고 기도하라. 그리고 당신과 그 사람이 같은 믿음을 길을 걷고 있다면, 하나님께 그를 축복해달라고 간구하라.


서로간의 불일치가 너무도 깊어서 도저히 화해가 불가능한 상황으로까지 사태를 끌고 가지 말라. 바울은 나중에 마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돌이켰고, 심지어 마가에게 찾아가 도와달라고 말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 되었다(딤전 4:11). 한 때 자신의 신실함을 믿지 않았던 바울이 곁에 와서 도와달라는 말을 했을 때, 마가가 느꼈을 기쁨을 한번 상상해보라.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도 바울처럼 내가 지금 갖고 있는 판단을 바꿀 수도 있다는 의지를 갖도록 하자. 분명한 교리와 성경적 윤리에 대한 확신은 결코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적 원칙을 적용하는 문제라면, 최소한 나의 기존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서로 간에 형제의 사랑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랑이 오래 참는 사랑, 온유한 사랑, 무례히 행하지 않는 사랑, 모든 것을 참는 사랑, 모든 것을 믿는 사랑, 그리고 모든 것을 바라는 사랑이라면, 나를 바꾸겠다는 생각은 그렇게까지 힘든 게 아닐 것이다(고전 13:4-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넓은 마음과 깊은 헤아림을 가진 사랑을 허락하시길 바란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en Godly People Disagree: Lessons from Acts 15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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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Robert Gonzales Jr.

로버트 곤잘레스는 Bob Jones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으며, Reformed Baptist Theological Review와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에 글을 기고하는 작가이다. 대표 저서로 'Where Sin Abounds'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