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퍼 통신 2: 위기의 시대, 참된 리더십을 바라며
by 김은득2020-04-09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어느덧 한국은 선거철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위기의 시대에는 더욱더 탁월한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그런 리더십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잘 알려진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Seminary, PA)의 설립자, 그레샴 메이첸(J. G. Machen)은 미국에도 아브라함 카이퍼와 같은 참된 기독 정치인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We pray God that he would give us an American Abraham Kuyper – a true Christian statesman…”). 정통 장로교회 교인들(Orthodox Presbyterians)이 메이첸을 미국의 아브라함 카이퍼로 여긴 것은 어쩌면 그의 기도가 실제로 응답된 측면이 있다 할 것입니다. 사실 메이첸과 저는 교회와 사회 전반에 만연한 모더니즘(modernism)에 대항하여 새로운 교단과 학교를 세웠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메이첸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설립식에서 제 ‘칼빈주의 강연’(Lectures on Calvinism)을 인용한 것은 우리 둘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저와 메이첸의 차이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가 받아들인 카이퍼는 사실 제 본연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미국형 아브라함 카이퍼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또 무엇보다 작금의 한국 교회에 시급한 것은 교리적 순수함(dogmatic purity)이 아니라 공공성(publicity) 회복이라는 것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한국 교회에는 웨스트민스터 출신 신학자와 목회자가 즐비하다고 들었습니다. 메이첸이 제 강연의 일부를 인용했을 때 무엇을 강조했는지 아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저의 책, 칼빈주의 강연을 읽어보신 분들의 예상과 달리, 혹은 너무나 실망스럽게도 메이첸은 제가 그토록 강조했던 세계관으로서의 칼빈주의(Calvinism as Worldview)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메이첸은 자신과 팔로워들의 상황에 걸맞게 정통 칼빈주의 교리를 방어하기 위한 새로운 개혁주의 교단과 신학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바로 이 역사적인 장면은 제 본연의 모습과 다른 미국식 아브라함 카이퍼를, 더 나아가 미국식 개혁주의의 특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칼빈주의는 그저 교단이나 신학의 영역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일종의 세계관입니다. 여기서 세계관(Weltanschauung, world-and-life view)이라는 것은 사실 제가 창안한 것이 아니라, 칸트가 착안하고 독일 관념론자들에 의해 유행하게 된 용어입니다. 계몽주의 시대 이전의 유럽은 개개인의 신앙이 무엇이든지 간에 초월적 세계관이 우세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기독교는 유럽 전체를 하나 되게 하는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이성의 자율성을 원칙으로 세워진 모더니즘의 세계관은 정치의 영역에서 프랑스 혁명을, 학문의 영역에서 자연과학 혁명을, 사회의 영역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끌어내면서 유럽인들의 삶과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지배적인 시스템이 됩니다. 또한, 세속화 과정(secularization process), 즉 현대성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분화 과정(social differentiation)은 공적 영역(public spheres), 특히 정치와 학문의 영역에서 더 이상 유신론적 사고를 할 필요가 없으며, 그저 신앙과 종교는 사적인 영역에서 개인의 신념과 견해로서 기능할 뿐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아니, 유신론적으로 삶의 영역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만큼 구시대적이며 미신적인 것도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이런 사회적 발달은 종교라는 미몽에서 현대인들을 깨어나게 하고, 종교 자체를 없애야 할 것이라는 과격한 주장도 있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가운데, 저는 기독교적 관점으로 세상을 설명하고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를 한 것입니다.


소위 세계관이라는 프레임을 통해서 우리 각자의 주체적인 삶과 객관적인 세상의 실재들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은 모더니스트들의 방법론입니다. 모더니스트들은 다양한 삶과 세상의 실재들을 유기적이든 혹은 기계적이든 하나 되게 연결하는 원칙으로 조직화하기를 선호했습니다. 이 세상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원칙으로 발달(development) 개념이 있는데,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진화(evolution)로,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진보(progress)로 통용되었습니다. 물론 세계관적 방법론이 가지는 환원주의적 경향성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의 다양성을 다치게 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들 너머의 무언가를 추구하게 되어 있다는 면에서, 모더니스트들의 기획은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현대인들이 경험한 세상의 변화들, 아니 혁명(Revolution)으로 묘사되는 급진적 변화들(그것이 산업 혁명, 과학 혁명, 프랑스 혁명, 사회주의 혁명 등 무엇이든지 간에)은 누군가의 설명과 해석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세계관이라는 용어가 왜 그토록 유행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세상에 대한 설명과 해석이 세계관이라는 정의에 해당할까요? 세계관에 해당한다면 적어도 인간이 경험하는 근본적인 관계들의 문제(예를 들어,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세상과의 관계, 인간과 신과의 관계)나 다양한 삶의 영역에 포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일관성을 가진 설명이 가능해야만 합니다. 모더니즘은 인간의 이성이라는 원칙을 통해 위의 설명들이 가능하다고 하는 측면에서 세계관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 맹위를 떨친 모더니즘은 제 모국 네덜란드에서도 신학(종교)에서부터 정치, 학문, 예술 등 전체 삶의 영역을 아우르는 강력한 세계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더니즘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정책들, 특히 무신론적인 교육 정책(예를 들어, 가치 중립을 근거로 무신론적 교육을 제공하는 학교에만 국가가 재정지원을 하는 정책)은 유신론적 관점을 가진 학부모들과 그런 가정에서 자라난 학생들의 양심에 큰 불편함을 주었습니다. 저는 인간이 어떤 정체성을 가지든지 간에, 인간으로서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침해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종교적 신자라는 정체성이 어떤 성이나 인종, 지위, 민족 등에서 획득하는 정체성보다 더 강력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제 모국에서는 대다수의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개혁주의 성향의 민중들이 부유한 엘리트 중심의 모더니즘 신봉자들에게 무시당하고, 이렇다 할 사회 정책적 보호를 받지 못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 인생의 두 번째 회심은 제가 첫 번째로 사역했던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네덜란드 최고의 대학에서 모더니즘 신학을 배운 제가 사회와 경제적으로 별 볼 일 없는 발투스(Baltus)라는 한 여성의 삶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는 개혁주의 세계관이 얼마나 강력하게 표현되는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녀는 그 세계관을 체계화할 수 있는 학문적 소양을 갖추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저는 그 회심을 기반으로 철저하게 개혁주의 성향의 대중들을 대변하기 위해 칼빈주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하부문화의 소셜 네트워킹(언론 기관과 정당, 대학교, 교단, 교원/노동조합 등)을 조직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칼빈주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개혁파 민중 해방운동은 제 모국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제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제시한 칼빈주의는 기존의 교리나 교단의 신학이 아니라, 세계관으로서 모더니즘에 대항하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시작부터 반정립적(antithetical)이며, 전투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제가 모더니즘을 비판한 가장 큰 이유는 다양성을 부정하고, 획일성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꿈꾸는 네덜란드는 일렬종대로 획일적으로 심은 튤립만 있는 꽃밭이 아니라, 다양한 꽃들이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경쟁하는 꽃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구조화된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자체의 확신으로 경쟁에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제가 제시한 칼빈주의는 기존의 신학적 범주를 따라 구성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저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God’s sovereignty over all spheres of life)을 칼빈주의의 중심 원리로 삼았습니다. 그 중심 원리 위에 몇몇 신학적 원칙(영역 주권, 예정, 일반은총 등)들을 가지고 삶의 다양한 영역들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각각의 삶의 영역에서 영역 주권(sphere sovereignty)을 통해 행사됩니다. 가령 학문의 영역에서는 진리가, 예술의 영역에서는 아름다움이, 정치의 영역에서는 정의로움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존의 예정 교리(doctrine of predestination)는 신론이나 구원론에 속했다면, 저는 예정 교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중재자 없이 어떻게 한 개인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시는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동등하고, 각자가 가진 양심의 자유를 따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에 확장된 정치적 자유의 기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성경과 칼빈에게서 발견한 일반은총 교리를 통해 신자들이 학문이나 예술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도왔습니다.


최근 몇몇 학자들이 공공신학을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거나 공적 이슈들에 대한 참여로 해석한다면, 바로 제가 세계관으로 제시한 칼빈주의가 일종의 공공신학이 되는 셈입니다. 저는 모더니즘에 대항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모더니즘의 방법론, 즉 세계관을 활용하였습니다. 사실 이런 방법론의 활용으로 인해 등장한 신칼빈주의라는 용어는 기존의 칼빈주의와 다르다고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반 대중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세계관으로서의 칼빈주의를 통해, 적극적으로 개혁파 대중들이 공적 영역에 참여하고, 다양한 세계관과 경쟁하며, 특히 획일적인 세속성을 강조하는 모더니즘에 대항해 싸우도록 독려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주의는 제가 네덜란드에서 성취한 개혁파 민중 해방운동의 성공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메이첸과 미국식 개혁주의와의 비교는 지면 관계상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만일 저와 같은 리더십을 한국 교회에, 그리고 한국 정치에 허락하신다면 그 리더십은 무엇보다도 팔로워들이 세상을 등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은 세계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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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은득

김은득 목사(PhD., Calvin Theological Seminary)는 신칼빈주의, 특히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공공신학을 한국적 문맥에 맞게 상황화하길 원하는 신학자로서 현재 미국 애리조나 투산에서 드림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