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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다 어린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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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Jeremy Pierre  /  작성일 20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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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I 기사는 검사실에 들어선 나를 한 번 더 유심히 봤다. 나는 말 그대로 걸어다니는 발암물질이었다. 내 얼굴엔 재가 묻어 있었고, 안경은 그을음으로 얼룩져 있었으며, 평소 같으면 하얬을 와이셔츠의 칼라와 어깨 부분은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내 몸에서는 시큼한 냄새까지 나고 있었다.


이 날 예정된 뇌 촬영은 사실 내가 조금 전에 막 탈출한 시큼한 냄새가 나던 현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지난 몇 달간 두통으로 시달렸던 나는 여러 의사들에게 갔었고, 뻔한 원인들을 배제하고 남은 것은 정밀 검사였다. MRI 기사는 이제 진짜 심각한 문제가 뇌에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볼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위협에 가까운 그의 말도 내게는 별로 심각하게 들리지 않았다. 정작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진짜 위협은 바로 그날 아침 우리 가족이 겪은 일이었다.


통상적인 사전 건강 질문 몇 개를 채 던지지도 않아서, 기사는 내 마음이 지금 얼마나 다른 곳에 가 있는지를 알아챈 거 같았다. 내가 멍하니 손에 들고 있던 질문지를 다시 가져가면서 그는 이건 나중에 작성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가 내게 말하는 어투는 영락없이 여덟 살 난 막내딸 베씨가 하라는 것을 제대로 못할 때 내가 베씨에게 말하는 바로 그 어투였다. 


기사는 검사복으로 갈아입게 하고는 나를 테이블 위에 눕혔다. 검사실 천장에는 푸른 하늘과 구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기사가 내 위치를 잡는 동안 나는 천장만 보고 있었다. 유모차에 누운 것 같은 편한 자세를 잡아서 그런 건지, 잠옷 비슷한 옷으로 갈아입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기계에서 들리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마치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외국어 대화를 듣는 것 같아서 그런 건지 몰라도, 어른이 된 이후로 나는 그 때처럼 어린 아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을 가진 적이 없었다. 


두려운 때에 우리는 누구나 다 어린 아이가 된다. 그리고 그런 절망감은 어떤 의미에서 선물이기도 하다. 


공포와 불


그날 아침에 있었던 위협에 대해서 좀 이야기하도록 하자.


여느 화요일 아침과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우리 가족은 평소와 같이 하루의 시작을 준비했는데, 일곱 식구가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옷을 입고 밥을 먹고 또 짐을 싸서 현관문을 나설 참이었다. 다섯 아이는 학교로, 두 어른은 직장으로 그리고 개는 개집으로.

 

과거에 들은 적 없던 날카로운 비명, 식구 모두를 얼어붙게 만든 그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침실에 있었다. 처음에는 유괴당한 아이를 찾아달라는, 빨리 나가서 용의자의 차량 번호 몇 번이 보이는지 보라는 식의 앰버 얼러트(Amber Alert, 정부가 국민의 핸드폰에 문자를 보내는 것)라고 생각했다. 그런 거라면 터치 한 번으로 핸드폰의 소음을 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불이야”를 외치는 내 아내, 사라의 목소리였다. 아내는 보통 두 가지의 목소리 볼륨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평상시 대화 때 나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거미를 보거나 아니면 아이들 중 누가 다쳤을 때 나오는 소리였다. 그런데 그날 아침의 비명은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것이었다. 


침실 옆에 있는 세탁실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건조기에서 진한 오렌지 빛의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는데, 우리 집의 분위기와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느낌을 주는 오렌지 빛깔이었다. 나와 사라는 소화기를 가지러 1층으로 뛰어내려갔고, 아이들에게 빨리 나가서 119를 부르라고 소리쳤다. 2분 후, 다시 이 층으로 올라온 나는 과거에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는 소화기를 가지고 씨름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소화기를 작동시키고 끝까지 분사했지만 이미 번지기 시작한 불길을 잡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나는 내 앞에서 춤추는 오렌지 빛깔을 노려보았고, 내 손에는 텅빈 소화기만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더이상 없었다. 


이제 연기는 기름 같은 검은색이 되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빨리 집 밖으로 나가라고 사라가 내게 소리쳤다. 층계를 반 쯤 내려갔을 때,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분명히 네 명의 큰 아이들이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만, 막내 베씨가 나가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다시 층계를 뛰어 올라가며 베씨의 이름을 비명처럼 부른 내 목소리에 정작 내가 깜짝 놀란 기억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내게서 터져 나온 소리는 동물의 울부짖음이었다. 그건 정말로 사랑하는 대상을 앞에 놓고도 도무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너무도 황당한 상황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때에만 터져나올 수 있는 통곡 같은 소리였다. 


두려움은 우리를 어린 아이로 만든다


내가 베씨를 찾던 순간들이 MRI 검사를 받는 내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베씨가 옆집에 있다고 사라가 소리칠 때까지, 베씨를 부르는 절망적인 나의 발버둥은 약 15초 정도 계속되었던 거 같다. 그러나 그 15초가 내 안에서 뭔가를 바꿔놓았다. 그 15초는 내가 그 전까지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었던 어떤 절망감을 알게 만들었다. 진한 오렌지 빛깔과 위압적인 검은 색의 연기는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조차도 결코 내 힘으로 지킬 수 없다는, 나는 그 정도로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나로 하여금 생생하게 깨닫도록 했다. 나는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우리는 두려운 순간에 누구나 다 어린 아이가 된다.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은 우리가 누군가를 의지해야 하는 존재임을 알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는 스스로의 안전도 지킬 수 없는 존재다. 우리는 내 자신의 운명을 책임질 수 없다. 이런 생각은 참으로 우리를 힘들게 만든다. 


그렇기에 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의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진정한 위로를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달콤하고 낭만적으로 들리는 이 말씀은 사실 예수님의 말씀 중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다. 예수님은 여기서 어른이 된 우리가 결코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 어린 아이의 어떤 특징을 콕 짚어서 말하고 있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7). 

 

어린 아이들은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항상 뭔가를 달라고 요구한다. 이 말씀의 핵심은 어린 아이와 같이 받는 것, 바로 이 점이다. 누가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과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조하는 일련의 이야기와 함께 이 구절을 배치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필요한 마음 상태는 다름 아니라 우리가 필요를 인정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절망의 순간 보다 우리의 필요를 더 잘 인식하는 때는 없다. 그러므로 절망은 왕국으로 가는 관문이 될 수도 있다.


이 사실에 놀랄 필요는 없다. 예수님 자신도 절망을 알았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위협을 당해야만 했다고 말한다. 예수님도 동일한 상실, 동일한 유혹, 그리고 동일한 고통을 받았다. 인간으로서 예수님은 통곡하기도 했다. 그의 통곡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고통보다도 더 깊은 고통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가 차마 상상도 못하는 위협을 받으면서도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했다(히 4:14–16; 5:7–10). 예수님은 절망이 무엇인지 알았다. 


신앙은 평안할 때가 아니라 절망 속에서 증명된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향한 자신의 믿음을 다름 아닌 위험한 때에 증명해 보였다. 사실상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 속 노래를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시 2:13).


우리가 바로 그 자녀들이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절망이 무엇인지 알기에 우리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비춰주시는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두려움 가운데서의 평안


내가 지금까지 말한 이런 생각을 다 제대로 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MRI 기계 속에 누워 있었고, 입술은 마치 불을 끄는 소화기가 된 거 같이 느껴졌다. 나는 지금도 MRI 기계 안에 누워서 머릿속에서 울리는 이상한 소음이 뭔지 알려고 하지 않았던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날 아침 15초간 동물이 되어 딸의 이름을 부르던 그 절망의 순간과 집이 타 버린 우리 가족이 그날 밤 어디서 잠을 자야 할 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MRI 기계 안에 누워있던 그 시간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내가 그 날 찾아낸 게 무엇인지 아는가? 그걸 알기 위해 노력했다는 게 아니다. 일생을 살면서 오로지 몇 번만 만날 수 있는 순간을 내가 경험했을 뿐이다. 내 마음에 하나의 생각이, 그 무엇도 움직일 수 없는 한 가지 생각이 자리잡았다. 그 하나의 생각은 마치 다른 어떤 생각도 발을 들이지 못하게 머릿속 나의 모든 생각을 다 장악한 것 같았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바로 이 생각이다. 이건 계획한 적도 없었고, 의지로 되는 것도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간증을 듣고 깨달아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이건 음성이었다. 전혀 기대한 적 없지만 너무도 익숙한, 돕는 자로서의 성령님이 역사하신 것이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그의 위로는 너무도 강력하고 압도적이어서 나는 이 생각이 어쩌면 MRI 결과지에 찍혀서 나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나님 자녀가 누리는 특권은 바로 평안이다. 이 평안은 절망의 시간에 더 강해진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녀에게 더 자애롭다.


당신은 누구의 자녀인가?


그 날 저녁 우리 가족은 샤워를 하고 호텔 침대에서 뒹굴면서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불리는, 이 이상한 게 퍼지는 바람에 더 강력해진 제한 조치를 발표하는 주지사의 회견을 들었다. 아내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루 사이에 닥치는 이 여러 번의 위협에 우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3월의 어느 화요일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날 우리는 코로나19가 지금 우리에게 주고 있는 교훈을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없다.


가장 뛰어난 의사들도 치료제를 만들지 못하고 있고, 세계적인 통계도 이 전파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고, 일류 기업도 당장 필요한 의료 물품을 제 때 만들지 못하고 있으며, 세계 경제는 하락 곡선을 가파르게 그리고 있다. 우리가 가장 신뢰하는 전문가들도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연하다고 여기던 일자리와 자유를 잃어버리고 있다. 화장실 휴지와 빵이 귀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몇 달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기본적인 일상 용품에 대한 걱정은 우리가 의존하는 게 얼마나 하찮은 허상에 불과한 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는 다 어린 아이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누구의 자녀인가? 어느 누구의 자녀도 아닐 수 있다. 그러니까 당신은 고아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당신은 누군가의 자녀다. 하나님의 아들 아니면 딸이다. 절망의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이 차이를 제대로 바라보도록 만든다.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킨 죄와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적 때문에 생긴 나 자신의 필요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절망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누군가를 의지하도록 자극한다. 절망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기에 자신의 필요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지옥이 주는 현실을 깨닫게 하기도 한다. 절망은 또한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누리는, 안전함이 주는 말할 수 없는 가치를 알도록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절망은 하나의 선물이다. 


우리는 언제나 어린 아이다


대부분의 절망은 결국은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절망을 느끼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이내 당시의 절망감을 떠올리며 부끄러워 하기도 한다. 


집에 불이 났을 때 느낀 절망감 때문에 나는 부끄러울 수도 있다. 소방관은 상황이 훨씬 더 안 좋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집은 그래도 무너지지는 않았다. 베씨는 지금 임대한 집 뒷뜰에서 다른 자녀들과 함께 신나게, 또 안전하게 놀고 있다. 아마도 그날 아침 내가 절망감을 느낀 건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MRI 검사를 받으면서 내가 느낀 절망감도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울 수 있다. 검사 결과는 나쁜 게 아니었고, 지인들에게 농담 삼아 말하듯이 내 머리가 너무 좋아서 생긴 일이었다. 두통의 원인이 무엇이든 중요한 건 종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때의 절망도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지금의 전염병 때문에 느꼈던 절망감을 되돌아보면서 부끄러워할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결국 이 전염병도 이겨낼 것이다. 코로나19에 걸린 대부분의 환자들은 회복할 것이다. 경제도 다시 살아날 것이고 사업장은 또 힘차게 움직이며 고용을 창출할 것이다. 우리는 다시 안정감을 회복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절망감은 어리석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의 사태는 어쩌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를 평상시와 달리 좀 더 정확하게 보도록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두려운 때를 만나면 우리 모두는 다 어린 아이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고 싶다. 우리는 언제나 어린 아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e’re All Children Now

번역: 무제




작가 Jeremy Pierre

제레미 피어는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성경적 상담을 가르치는 부교수로 Clifton Baptist Church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The Dynamic Heart in Daily Life: Connecting Christ to Human Experience'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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