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으로 기꺼이 불편해지기
by 김돈영2020-04-25

신분의 변화가 일어난다


“입대를 축하합니다”
현수막이 걸린 위병소를 지나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뀐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새롭고 불편해진다’. 자고 일어나는 것, 밥 먹는 것과 화장실 가는 것 등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해오던 것, 일상적인 일들도 배워야 한다. 심지어 말하는 것과 쉬는 것까지도 새롭게 배우고 적응해야 한다. 이제 민간인과 구별되는 군인이 된 것이다.


처음 교회에 가면 많은 것이 낯설다. 예배하는 모습을 제외하고도 호칭이나 물건의 이름, 용어들도 다르다. 군대에 입대했을 때처럼 많은 부분을 새롭게 배워야 한다.


거룩하다는 말은 교회에서 너무나 자주 듣는 말이다. 거룩한 땅(출 3:5), 거룩한 모임인 성회(출 12:16), 거룩한 안식일(출 12:23), 거룩한 민족(출 19:6), 거룩한 장소인 성소(출 29:31) 등 많은 것을 거룩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거룩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그의 소유는 모두 거룩하다. 나는 누구에게 속했는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면, 하나님의 소유인 것을 인정한다면 나 또한 거룩한 것이다. 나의 어떤 능력이나 노력,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셨기에 신분이 바뀐 것이다. 거룩한 것으로 구별된 것이다.


방향을 잡았는가?


지금껏 해온 일상적인 생활도 군인이 되면 새롭게 배운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모든 생활의 방향성, 목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군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누구나 안다.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다. 그래서 부대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군인이 하는 모든 행동은 나라를 지키는 것, 즉 전투력과 관련되어 있다. 훈련하거나 장비를 만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축구나 족구 같은 운동을 하더라도 그것은 그냥 운동이 아니다. ‘전투 체육’이라 부른다. 운동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운동을 통하여 체력을 기르고 전우애를 다지는 것이다. 운동은 전투력 향상을 위한 도구이자 방법일 뿐이다. 밥을 먹는 것도 그렇다. 군대에서는 다이어트를 위해 밥을 굶을 수 없다. 전투력에 지장을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모든 행동은 전투력, 더 나아가 국방력과 연관되어 있다.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다르게 말하면 무엇을 위해 사는 사람인가?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는 말은 참으로 추상적으로 들린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 것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렇게 인식하고 행동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고 말하지만, 다스림을 받는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말해야 하는가?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이 바로 성경 말씀이다. 좀 더 압축하면 율법이다. 거룩한 사람,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인정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구별되었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인 것이다.


주를 위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삶의 방향성은 오직 하나님만을 향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주를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주를 위해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사실 좀 머뭇거린다. 주를 위해 사는 것은 알겠지만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를 위해 산다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주신 명령, 곧 통치하시는 법을 따르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명령과 율법의 핵심, 법이 말하는 방향성은 모두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 22:3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안경을 주고 있다. 즉 구별된 사람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을 내보이기 위해 남을 돕는 것이 아니다. 직장 동료와 부하직원은 승진을 위한 발판이 아니다. 전도하는 이유와 전도 왕이 되려는 목적도 달라져야 한다.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하는 것은 물론이고, 직장에서 일하는 것, 운동하고, 여행하는 것, 심지어 밥을 먹는 것조차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의 궁극적인 목적과 방향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야만 한다. 병사의 모든 일상이 전투력 향상과 관련된 것처럼 말이다.


구별된 것은 드러난다


구별된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드러난다. 말투와 행동, 생각하는 방향 등 독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휴가 중에 있는 군인이 사복을 입고 다닌다고 해도, 짧은 머리를 감추려고 모자를 썼다고 해도 우리는 알아본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금방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가까이에서 그의 말투나 행동을 보면 군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외모가 아니라 그가 하는 모든 것이 군인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왜냐면 모두가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데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드러나는가? 친구들 사이에서, 학교나 모임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드러나는가 생각해 봐야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조금만 속이면 큰 이익을 볼 수 있지만 솔직하게 말하고 손해나는 편을 선택할 수 있는가? 하기 싫은 뒷정리나 청소, 아무도 칭찬하지 않는 일, 드러나지 않는 일이지만 그것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할 수 있는가? ‘아니요’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구별된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소속이 어디인지 잊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거룩한 것, 익숙한 것과 싸움


거룩하다는 것, 구별된다는 것은 날마다 익숙한 것과 전투를 치르는 것이다. 우리는 입대 하기 전,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마음대로 살았던 생활에 익숙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품 안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내 기준에 맞춰 마음대로 사는 것이 더 편하고 익숙하다. 무엇을 배울 필요도 없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을 탈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늘 신경 쓰고 긴장해야 한다.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거나 긴장이 풀어지면 나도 모르게 예전의 습관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긴장의 끈을 놓치면 대대장님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초유의 사태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경을 써야 한다. 긴장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는 어디인지 자꾸 되뇌어야 한다. 날마다 자신의 내면과 싸워야만 하는 것이다. 익숙하고 편안한 나의 기준을 버리고,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게 느껴질지라도, 구별된 사람으로서 말씀의 옷을 입고 행동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마 16:24)하라고 말씀하셨고,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했다.


거룩함에 참여하다


우리는 왜 이렇게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히 12:10)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것이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누군가가 나의 것을 빼앗으려는 데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물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우리를 사신 하나님은 어떻겠는가? 사업이 부도 나는 순간에,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순간에, 몸이 아파 누워있어야 하는 순간에, 밀린 공과금과 부족한 생활비를 걱정하는 순간에, 그리고 요즘 같이 어지러운 팬데믹 상황에 하나님은 가만히 보고 계시겠는가?


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한다. 다시 말하면 무기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거나, 밥을 먹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행정보급관이 필요한 때 필요한 물품을 전달한다. 하나님은 어떠하시겠는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행정보급관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행정보급관 밑에 있는 것보다 더 불안하고 염려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구별된 사람, 하나님의 소유된 사람이라면 염려하지 말자. 불안해하지 말고 내 방법을 찾지 말자. 우리에게 있는 문제쯤은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고, 충분히 해결하실 수 있다. 물론 그 방법이 내 생각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하나님의 ‘빅픽처’를 우리가 다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주인이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 된다. 그것이 최선이다.


불편함이 익숙해지다


구별되어 불편한 삶, 우리가 익숙해져야 하는 삶이다. 세상과 구별된 삶이기에 우리는 언제나 부딪칠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다른 방향을 가는 이 세상에 익숙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거룩한 모습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완성되지 못한다.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한 죄의 찌꺼기가 항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조금씩 비워가는 것이다. 내 몸에 쌓여 있는 죄, 하나님을 거부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악한 본성의 찌꺼기를 하나씩 벗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는 때 완전하게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엡 4:24)을 회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평생 불편해야 한다. 불편한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불편한 것이 편하게 느껴져야 한다. 그것이 구별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것이 거룩한 삶일 것이다.


불편함을 편하게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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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돈영

김돈영 목사는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CTS라디오조이 ‘찬양의자리’ 진행자와 BASE성경교육원 공동대표로 섬기고 있다. ‘직장선교아카데미’와 ‘군세움프로젝트’를 통해 성경을 강의하며, 다양한 집필 활동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