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중의 피난처 되신 하나님
by Neil C. Stewart2020-05-17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내면 깊이 고통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안전함을 바라는 갈망이 있다. 우리 인간은 낙원을 위해서 창조된 존재이지 결코 바이러스, 박테리아, 그리고 생명을 위협하는 각종 병으로 고통 받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좋아하든지 아니면 참아내든지 간에, 현실은 여전히 고단하고 인생이라는 게임이 시작되면 사냥이 시작되는데, 확률은 결코 인간 편이 아니다. 각종 건강 보험 그리고 의학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사망률은 전 세계에 걸쳐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동일하다. 한 사람에게는 한 번의 죽음이 찾아온다. 


영원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영혼에게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통계다. “아마도 내일, 내일 죽을 지는 모르지. 하지만 내가 오늘 죽을 리는 없어. 어떤 경우라도 가장 끔찍한 두려움이 현실로 닥치는 경우는 드물어. 겉으로 보기 보다 현실은 그나마 괜찮은 경우가 많지 않아? 게다가 난 아직 상대적으로 젊고 몸 상태도 괜찮아.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별 문제가 없지 않을까?” 누구나 다 이렇게 생각한다. 상황이 좋을 때만 곁에 있는 친구처럼. 그러나 이런 생각은 힘든 상황이 실제로 닥치기 전까지만 유효하다. 음악이 멈추고 바닥이 내려 앉기 시작하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바로 그런 순간을 맞았을 때 우리가 불러야 할 많은 노래를 주셨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 믿음을 노래하는 오래된 많은 노래 중에서도 시편 46편을 따라갈 노래는 없다. 많은 시간을 거쳐서 이 찬송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죽음, 귀신 그리고 어둠에 고통받은 수많은 영혼들에게 안식처가 되었다. 코로나19의 열병에 시달리는 이 세상에서, 이 전염병이라는 폭풍우 속에서도 당신이 편히 머리를 뉘고 잠을 잘 수 있게 하는 베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편 46편은 상상할 수 없는 혼란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 산들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부터 존재했고 앞으로도 항상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랜드마크의 역할을 하는 바로 그 산들이 지금 바닷물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시46:2–3). 소용돌이를 한번 상상해 보라. 세상이 지금 무너지고 있다. 인간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도, 인간이 겪은 그 어떤 경험도 이것 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 이런 시간을 만나면,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묻는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두려움에 함몰되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시 46:1–2). 


시편 저자의 자신감은 다름 아닌 그의 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히브리어의 배열을 고려할 때, 시편 46편 가장 처음에 나오는 두 단어에 비밀이 담겨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이 생각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도록 하자.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 편이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당신을 돕는다. 그 분이 가진 모든 지혜, 능력, 거룩함, 공의, 선함 그리고 진리가 다 당신을 돕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온전하심을 동원하여 당신의 편에 서서 당신의 유익을 위해 일하신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시편 저자는 지금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관계를 맺을 때 드러나는 세 가지 독특한 측면을 규명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우리가 위험에 처했을 때 달려갈 수 있는 분이 되심으로 우리를 돕는다(피난처). 

2. 하나님은 우리보다 강한 분이시기에 우리를 돕는다(능력). 

3. 하나님은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 때 가까이 계심으로 우리를 돕는다. 말 그대로 그는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된다(시 46:1).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어떤 환난을 가져다주든지, 기독교인이라면 그 어려움을 결코 혼자 맞지 않는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신다. 위험이 더 가까울수록, 우리의 목자는 더 가까이 있다. 당신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바로 그 분은 결코 당신을 버리지 않는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슬픔에 함몰되지 말라


두 번째 구절에서 시편 저자는 우리를 시온산으로 데리고 간다. 그곳의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라. 산에 무슨 일이 생기고 있었는지 기억하라. 누구라도 패닉 상태가 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땅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다. 사방의 벽은 무너지고 사람들은 사방팔방으로 뛰고 어미들은 멀리 도망가기 위해서 아이들을 부르고 있다. 그러나 거룩한 도시의 분위기는 패닉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오히려 평화롭고 기쁨에 차 있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4–5).


시내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명이 공급되는 곳이다(시 46:4-5). 시온에 사는 성도들은 특별한 부류다. 그들은 가장 끔찍한 재난 가운데서도 기쁨이 무엇인지 안다. 그건 그들이 생각이 없거나 고통에 무감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하나 없지만, 어떤 환경에서도 침착하고 집중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흔들리지 않는 관계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야말로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들을 안전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다. 하나님은 구약 속 인물들이나 우리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가장 깊고 어두운 밤에도 또는 동 트기 직전이라도, 우리가 적의 공격을 받아 가장 약해졌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신다(시 46:5). 세상 나라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상대로 다 일어나더라도 하나님이 한마디만 하면 온 세상은 바로 녹는다(시 46:6). 하나님에 대항해서 일어난 세상 나라들은 더이상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는 그 임재의 가치를 아는 모든 이에게 다 열려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그 가치를 보고 있는가? 하나님은 결코 자신을 옛날 이야기에나 나오는 신비한 요정처럼 감추어 놓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야곱, 선천적으로 불안하고, 힘들고, 변덕스럽고 이기적이며 또 방황하고 또 잘 속이는 그런 야곱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신다(시 46:7). 야곱과 같은 사람에게도 손을 뻗는(물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기 전) 분이 하나님이라면, 그가 당신을 돕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 4:8). 


진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놓치지 말라


힘든 시대를 맞아 고통이 점점 더 커질 때, 우리는 작은 나무만을 보느라 큰 그림을 놓치기 쉽다. 고통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따라서 우리의 모든 생각을 다 집어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자기 연민과 같은 감정은 필연적으로 고통에 빠졌을 때 가장 쉽게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점도 다 알고 계신다. 그렇기에 그는 고통받는 그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눈을 높이 들라고 말씀하신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시 46:8). 하나님은 역사의 장면 뒤에서 일하시는 자신의 모습을 우리가 보기 원하신다. 그는 세상 나라들이 하나님을 상대로 일으키는 오만한 반란을 제압하시고(시 46:9; cf. 시 2), 또 그의 이름을 이 땅에서 높이시며(시 46:10),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백성을 안전하게 지키신다(시 46:11). 


지난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 예술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는 이 명령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를 잘못 인도해왔다. 나는 이 말씀을 읽고 버몬트 주에서 있었던 어느 눈 덮인 크리스마스가 생각났다. 차 뒷자리에서 아이들이 서로 싸우고 있다. 이성, 친절함, 그리고 사랑은 이미 차창 밖으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이들의 머리에 든 생각이라고는 자기들의 영역을 지키겠다는 것, 어떤 경우라도 손해보지 않겠다는 게 다였다. 바로 그때,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친절하지만 엄하게 말한다. “조용히 해!” 바로 이 동사가 지금 시편 저자가 쓴 단어이다. 하나님은 지금 그의 백성이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꾸짖고 계신다. 바로 이런 실수야말로 재난을 만났을 때 우리가 가장 잘 저지르는 게 아니던가? 그 재난이 아픈 자녀든, 비정상적인 병원 검사 결과든, 추락하는 시장이든 아니면 무섭게 다가오는 감염병의 위협이든지 간에 말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작은 것에 연연하는 바람에 큰 그림을 놓치고, 이 모든 어려움 뒤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곤 하는가? 


로얄벨파스트 어린이병원(Royal Belfast Hospital for Sick Children)에서 소아과 의사로 일하던 때에 나는 아픈 자녀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보지 못하는 많은 부모를 만났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참으로 종종 하나님은 영적 거인을 병원에 보내주셨다. 그런 영적 거인은 대부분의 경우 낭포성 섬유증과 같은 만성적이고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의 부모였다. 그들은 오랜시간 실망을 통해서 훈련을 받았기에 사실 그리 심각하지 않은 병 때문에 병원에 온 부모가 결코 얻지 못하는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또한 위기를 겪으면서 다른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그들의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그런 고통의 강을 건너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고통과는 비교도 안되는, 풍성하고 진정한 실재를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위기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그들은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를 볼 수 있었고, 그들의 자녀가 은혜 속에서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또한 그들 스스로 구세주를 증거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우리가 “환난”(시 46:1) 속에서 살아갈 때, 나는 온 세상의 선한 것과 완전한 선물을 주시는 이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이런 환난 속에서도 결국은 모든 것이 다 그분의 영광을 향한 역사의 금빛 수를 놓는 과정임을 볼 수 있는 용기와 기쁨으로 가득한 믿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길 기도한다.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수없이 반복했듯이, “하늘에” 보좌가 서 있다(계 4:2).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다 주관하고 계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본성을 아시고 또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도 다 아신다(시 103:14), 그리고 그는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히 2:11). 마리아의 아들은 인간의 약함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약함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히 4:15). 팬토크레이터(Pantokrator), 즉 모든 것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순간을 다 그의 손에 모으고, 그 모든 것이 다 그의 영광을 위해 쓰이도록 지금도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 기독교인이여, 오늘밤 베개에 편히 머리를 누이고 쉬도록 하라. 그 어떠한 폭풍이 불어도 당신은 영혼의 평화를 주는 쉼터를 예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Psalm 46: God, Our Storm Shelter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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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Neil C. Stewart

닐 스튜어트는 노스캐롤라이나 그린스보로에 위치한 Christ Covenant Church의 담임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