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분별의 종교다
by 김형익2020-05-07

요즘처럼 많은 영역에서 혼란스러운 시대가 있을까 싶다. 정치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종교적으로도 온갖 이단과 사이비들이 이렇게 기승을 부린 시절이 있었던가. 가짜 뉴스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 요즘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분별은 필수 덕목이다. 세상에서야 우리가 무얼 그리 기대하겠는가? 정말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들을 들을 때 이게 같은 기독교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든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프로테스탄트가 해석의 개별성을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편향되고 종교적으로 치우친, 진리가 아닌 메시지에 휘둘리는 교인들을 보고, 주님의 몸이 이리저리 찢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무너진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어제 오늘의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일은 이미 에덴동산에도 있었고, 성경이 기록되던 대부분의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진리가 있기 때문에 진리를 가장한 거짓도 존재하고, 진리가 있는 그 곳에 유사 진리도 자리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행하는 일이다.


아합이 다스리던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시드기야처럼 악한 거짓 선지자들이 넘쳐났고(왕상 22), 멸망하기 전 남왕국 유다에는 하나냐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득세했다(렘 28). 거짓 선지자들은 영적으로 중병이 든 나라와 백성에게 ‘샬롬!’의 거짓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회개의 길을 막아섰다(렘 6:14; 8:11). 이들에게 현혹된 왕과 백성들은 참 선지자였던 미가야와 예레미야를 거절하고 핍박했다.


사도들이 살아있던 초대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울 사도는 왜 저주를 언급하면서까지 강한 어조로 갈라디아서를 시작해야 했을까?(갈 1:6-9) 고린도 교회는 왜 그들의 영적 아버지인 바울을 그토록 거부했던 것일까? 거짓 사도,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되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 36-43)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그대로 경험해야 했다. 주님이 말씀하신 가라지인 독보리는, 성장 초기에는 그 외형이 밀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잘 때 가만히 와서 가라지를 뿌린 원수 마귀는 이 일을 쉬지 않고 지금까지 행한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과 세상 끝에 대해서 여쭈었을 때,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었다(마 24:4). 많은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와서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라고 주님이 친히 경고하셨고(마 24:5), 요한 사도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고 말씀하였다(요일 4:1). 


성경 시대에 이러하였다면, 교회 역사에서 나타났던 유사 복음-거짓 진리의 문제는 다 헤아릴 수도 없다. 2천 년의 교회 역사에서는 진리의 싸움이 그칠 새가 없었다. 그리고 이 진리의 싸움에서 중요한 무기는 성경의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에 근거한 분별력이었다. 다신론이나 미신적 신앙들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나를 위하는 신이고 그 신이 어떤 존재이든 나에게 유익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유일한 절대 진리를 주장하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진리와 유사 진리, 참과 거짓을 분별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출 20:3).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상상과 필요와 목적으로 만들어 낸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을 분별하여 섬길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이것이 먹히는가?(Does it work?)’가 아니라, ‘이것이 진리인가?(Is this the truth?)’ 또는 ‘이것이 성경적인가?(Is this biblical?)’를 물어야 한다.


나는 오늘날 분별력 향상을 위한 진리의 훈련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다는 점을 우려한다. 주님께서 직접적으로 주의를 주셨고, 그토록 많은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들의 미혹으로 교회가 큰 위기들을 경험한 사례들을 성경에 기록하여 경고하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진리를 분별할 수 있도록 성도들을 구비시키는 것 같지 않다. 진리의 교육과 훈련을 통한 분별력이 갖추어지지 않을 때, 교회 안에는 모호함의 영역이 확장되고, 모호함의 영역은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 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되고 만다.


그 결과를 우리 한국 교회는 고스란히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신천지의 기승이 그 한 사례다. 단순히 교회 문 앞에 “신천지 출입금지”라고 쓰인 포스터를 붙여 놓는 것이 교회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신천지와 같은 이단, 사이비의 가르침을 분별할 줄 아는 견고한 신자들을 길러내는 진리의 훈련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일평생 교회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믿는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그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면, 이건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이런 현실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분별을 하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분별을 목사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의 몫으로 돌리게 되었다. 주님은 교회 지도자들에게만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또, 요한 사도는 “영들을 분별하라”는 메시지를 목사들에게만 준 것이 아니었다. 모든 성도들이 진리와 유사 진리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한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그것은 신학의 실종이고 교리의 실종이다.


데이비드 웰스(David Wells)가 ‘신학실종’(부흥과개혁사, 2006)에서 오늘날의 복음주의 교회가 현대 세속주의 앞에 굴복하게 된 원인을 진리가 설 자리를 잃어버린 현상, 즉 신학의 실종이라고 분석한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를 지적하여 한 말이지만,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지난 삼사십 년의 한국 교회는 교회 성장을 지상 목표처럼 강조하는 동안, 너무나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 목회와 설교에서는 신학 무용론이 고개를 들었고, 신학과 진리의 자리를 ‘꿩 잡는 게 매’라는 실용주의가 대체해버렸다. 그리고 교회와 목회에서 교리 교육은 실종되었고 그 자리를 다양하고 세련된 프로그램들이 대체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십 년 어간에 한국 교회에서 교리에 대한 관심이 일부 목회자들과 교회들에서 급증했다는 것은 정말 고무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신학교를 다니던 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우리말로 번역되거나 한국 저자들에 의해 쓰여진 교리 교육에 대한 자료들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교리 교육 서적의 홍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교리 교육 서적들이 우리말로 번역이 될 뿐 아니라 한국 교회의 저자들에 의해 쓰여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전체적으로 보자면, 기본적인 교리 교육이 시행되는 교회들은 미미하기만 하고, 혹 교리를 가르친다 하더라도 삶에서 유리된 딱딱한 이론처럼 가르치는 미숙함도 많이 보이지만, 현재의 흐름으로 보자면 희망적이다. 교회의 목회에서 실종되었던 교리 교육이 오래 입어 왔던 옷처럼 교회에 잘 어울리도록 정착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한국 교회의 한구석에서 섬기는 한 사람의 목사로서, 내가 한국 교회에 바라는 것은 단순히 이단과 사이비에 휘둘리지 않는 기독교가 아니다. 자기가 만들어 낸 하나님으로부터 성경에 계시된 대로의 하나님을 분별하고, 율법으로부터 복음을 분별하며, 번영 신학과 같은 유사 복음으로부터 복음을 분별하는 성도들이 가득한 한국 교회를 보는 것이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김형익

김형익 목사는 건국대에서 역사와 철학을, 총신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 GP(Global Partners)선교회 한국 대표 등을 거쳐 지금은 광주의 벧샬롬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 ‘율법과 복음’, ‘참신앙과 거짓신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