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인생 베이직

죽음에 관하여

저자명 Tim Ke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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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고상섭 목사(그 사랑교회) /  작성일 20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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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죽음에 관하여’는 인생 베이직 시리즈(태어남, 결혼, 죽음)의 세 번째 책이다. ‘죽음에 관하여’는 죽음에 대한 두 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과 그것을 극복하는 믿음을 소개하는 설교이고 2장 ‘죽음의 파열(종식)’(The Repture of Death)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가진 가족들을 향한 설교이다.


1장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이란 것은 아무도 피해갈 수 없고, 우리 인생을 단절로 이끄는 가장 불행한 사건이지만 오늘날 현대인들은 그 확실하고 거대한 단절인 죽음에 대해 전혀 준비되지 못한 상태라고 진단한다.

 
그 이유는 네 가지인데 첫째, 현대 의술의 발달로 죽음이 사람들의 죽음을 눈으로 보는 경우는 극히 짧고, 또 주변에 죽음을 맞이해도 눈에 띄지 않게 병원과 호스피스에서 사망하기 때문에 점점 죽음은 인간의 삶에서 멀어지고 때문이다. 둘째, 이 땅의 행복에만 집중하는 세속적 세계관 때문이며 셋째, 죽음을 회피하다가 결국 깊은 무의미감(sense of insignificance) 에 빠졌기 때문이며 넷째, 죄책과 용서라는 범주가 현대 문화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팀 켈러는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 세속 세계관의 네 가지 원인과 그것의 모순을 드러내면서 세속 세계관으로는 죽음을 대비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며, 자연스럽게 성경의 관점을 소개한다. 히브리서 2장 14절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셨다고 선언하고 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히 2:14)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신 이유는 그분이 바로 구원의 ‘창시자’가 되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2장 10절에 나오는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라는 말은 헬라어 ‘아르케고스’이고 이것은 시작, 기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팀 켈러는 윌리엄 레인의 주석을 빌려서 ‘챔피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신 우리의 챔피언이시기 때문에 죽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영적 후자극제 (Smelling salts)가 된다. 결국 죽음이란 우리를 흔들어 깨워 이 세상이 영원하리라는 착각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고, 하나님의 품속에 있다는 확신을 통해 두려워하지 않는 안정감을 심어준다. 챔피언은 단순히 승리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대리전을 치르는 선수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승리했듯이, 우리의 챔피언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음의 세력인 마귀와 싸워 승리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더 이상 다른 종교에서처럼 극락에 도달하기 위해 선행을 쌓아야 하거나, 내가 열심히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신 것을 믿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확신 때문에 바울은 사망의 쏘는 것과 사망이 이기는 것을 조롱할 수 있었다.


현대인들이 죽음을 부정하는 이유는 죽음을 생각하기만 하면 두렵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어떤 그 무엇으로도 그 죽음의 두려움을 해결할 길이 없기 때문에 자꾸 회피할 뿐이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죽음을 직면할 용기를 준다. 그리고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이 땅에서 소망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이 주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2장 ‘죽음의 파열(종식)’(The rupture of Death)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교하고 있다. 이 말씀은 이중부정이기에 결국 ‘소망을 품고 슬퍼하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비통히 여기사’(요 11:38)라는 단어 ‘엠브리마오마이’는  ‘snorting with rage’로 화가 나서 씩씩 거리며 걸어가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이 이렇게 분노하신 이유는 죽음이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침입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래의 계획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죽음을 보는 우리의 관점이 되어야 한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죽음은 단절이며 슬퍼해야 하고 분노해야 하는 대상이다. 세상의 학문이나. 문화를 통해 죽음을 아무리 자연스러운 것이며,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 말해도 인간은 본성적으로 죽음이 내키지 않는 이유는 죽음은 비정상이며 아군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단순히 슬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슬퍼하라’고 권면한다. 예수님이 죽음에 대해 분노하신 것은 단순히 분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종식시키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예수님 스스로 무덤으로 가시면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다. 이 소망을 품고 슬퍼하면 단순히 절망할 때보다 더욱 마음껏 애통할 수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도대체 어떤 소망이기에 이토록 죽음 앞에서 슬퍼하면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그 소망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그 소망은 인격적인 소망이다. 단순히 천국에 가고 가지 않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 가운데 이루어지는 소망이다. 둘째, 이 소망은 물리적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으로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걷고, 먹고, 포옹하며 사랑할 것이다. 사랑의 관계가 지속되는 실제적인 곳이다. 셋째, 이 소망은 기쁨으로 충만한 소망이다. 이 땅에서 그 토록 소원하던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고 헤어지기 싫을 때 결혼을 생각하듯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주님과 결혼을 통해 영원히 살기 때문이다. 넷째. 이 소망은 확실한 소망이다. 내가 행위를 통해 공로를 쌓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를 위해 행하신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루어지는 소망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소망이 되는 이유는 나의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무엇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이기 때문이다.


결국 마지막 죽음을 이기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취하는 두 가지, 즉 너무 절망하거나, 또 마땅히 죽음에서 배워야 할 바를 배우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결국 소망가운데 슬퍼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결국 웃고 노래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 날엔 모든 눈물이 씻어지는 날이며, 모든 나무와 하늘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