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ority of Preaching

좌절된 설교의 치유

저자명 Christopher 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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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김병완 목사(우리가꿈꾸는교회) /  작성일 2021-08-01

본문

설교가로서 나의 삶을 생각해보면, 팀 켈러의 '일과 영성'에 소개 된 이야기 '니글의 이파리'가 생각난다. 상당히 많은 시간을 들여 설교를 준비하지만, 이런 저런 일로 방해 받기 일쑤이고, 토요일 자정을 넘겨가며 겨우 탈고를 마치고 회중 앞에 설 때는 이파리 하나 완성한 기분으로 설교를 하고 내려온다. 매주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고, 회중들의 반응도 그리 특별치가 않다. 마치 다년간 준비했던 경기가 취소되어, 빈손으로 돌아서는 기분이랄까.


그와 같은 고민을 수년 째 반복하고 있을 때, 이 책을 만났다. 본 책은 세 편의 신명기 본문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1. 설교 말씀의 권위(신 18:9-22)


나를 비롯해서 많은 설교가들이 가진 마음 속 고민 중 하나는 ‘회중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설교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예배의 대상과 유일한 청중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현대 교회 문화 속에 설교가들은 ‘우리 설교가’가 아니라, ‘여러 설교가 중 한 명’이기 때문에, 설교가 평가를 받는다는 생각에서 자유롭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현실적으로 주변에만 보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출석하는 교회가 있음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설교가가 따로 있으며, 이를 통해 매주 연명하고 있다고 말을 전해온다. 그런 상황 속에 내가 온 힘으로 준비한 설교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또한 웬만한 설교 보다, 소그룹이나 1:1 성경공부가, 평범한 소그룹 보다 개인 경건생활이 오히려 났다는 시대의 조류 속에 설교자의 자리는 과연 어느 정도 차지할 것인가? 저자는 성경에서 설교가 갖는 대체 불가능한 위치를 확인시켜줌으로서 설교의 권위를 되찾아준다.


모세의 임종 후, 가장 큰 화두 중 하나는 “언약의 중보자가 사라진 이후에 언약 백성이 어떻게 자신들의 삶을 이어갈 수 있는가?”였다. 신명기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을 그분의 ‘선포되는 언약의 말씀 아래’ 모으심으로 언약을 이어가신다 였다. 하나님은 옛 언약 아래에서 선지자들이 선포한 기록된 말씀으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셨다. 언약의 말씀은 돌판에 새겨졌지만, 기록된 말씀은 반드시 선포(설교)되어야 했다. 하나님이 ‘손으로’ 기록하신 십계명은(신 9:10), 모세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다. 율법이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지만, 그 율법은 역시 선지자들에 의해 모든 세대에 읽히고 선포되어야 했다. 백성들이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여부는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지를 확인하는 기준이 되었다.


새 언약 아래에서도 마찬가지다. 궁극의 선지자이신 그리스도는 여기에 계시지 않음으로, 선지자들의 선포 사역을 계승할 설교자들이 필요하며 예수님은 그들을 통해 자기 백성을 다스리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기록된 말씀 자체가 아니라, 그 기록된 말씀을 전파하는 설교자들의 입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다스려 오셨다. 이처럼 설교자로서 우리가 갖게 되는 위치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다스리는 방편에 의해 결정되어왔다.


2. 교회를 변화시키는 설교(신 30:11-20)


설교가들은 대부분 경험하게 되지만, 설교 중 청중들의 마음이 다른 곳에 가있을 때가 있다. 열심히 준비한 설교가 허공에서 연기처럼 사라지는 경험을 할 때면 계속 설교를 전개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물론 설교를 멈추거나 표현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저자는 2장에서, 신명기 30장에 나타난 모세의 설교를 살펴본다. 그는 모세의 설교에서 네 가지 주제를 발견한다.


1) 하나님의 실존


모세는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설교했다. 오늘 이 시대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우리는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설교를 전하는 가운데 그와 같은 거룩한 긴장을 끌어안고 설교를 전하고 있는가?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시고, 이 회중들의 삶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하나님은 이 본문을 통해서 그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일까?


저자는 멜빈 팅커의 말을 인용하며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인식이 결여된 강해설교는 효력이 없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단순히 선포된 말씀과 세상 사이에서 아무런 연결성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라고 말한다. 회중들의 마음 속 자리잡은 문화 내러티브를 찾아내야 하나님이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2) 백성들의 완악함


모세는 백성들이 결국 듣고도 하나님께로부터 고개를 돌릴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신 8:17) 라는 식의 표현을 반복한 것은 이를 전제해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더욱 회중을 자신의 대화에 참여시키려고 한다. 그의 회중을 잘 알았고, 이에 '무언의 대화식 설교'를 한다. 이것은 직접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이 이 단락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반응할지를 알아서 그에 따른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다. 존 오웬은 자기 양 떼의 형편을 잘 아는 것이 목자의 의무라면서, “그들이 경험하는 주된 유혹, 마주하는 장애물, 그들이 힘을 얻는 동력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설교는 과녁을 맞히지 못한 채 빗나가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3) 믿음의 절실함


모세의 설교는 ‘오늘’과 ‘이날’이라는 단어가 반복된다. 그의 설교는 청중에게 ‘오늘’의 회개와 ‘이 시간’의 결단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된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언약 갱신을 하는 장면을 보자.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는 말은, “… 어제 내린 너희의 선택이 진짜인지 분별하는 방법은 너희가 과연 오늘도 어제와 동일한 선택을 내릴 것인지에 달렸다.”는 의미다. 이처럼 설교자는 ‘지금’ 회중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자리에 선다. 저자는 이를 위해 “절실하고도 열정적인 명료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명료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으며, 절실하지 않으면 이해되어도, 내일로 미루고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복음은 변화되는 행동을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잠자는 자를 깨우듯 열정이 필요하다. 설교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설교자의 떨리는 음성”으로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


4) 경이로운 은혜다.


예수님은 모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고 말씀하셨다(요 5:46). 그는 장차 있을 일을 기대하게 했다는 점에서, 은혜의 설교자였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자였다. 모세의 명료함과 절실함, 열정을 가진 설교에도 회중들은 결국 변화되지 않았다. 이사야의 설교나, 우리 주님의 설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이에 절실함을 담을 설교란 “그저 광적인 설교가 아니라,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이루실 것이라는 고요한 확신에 뿌리 내린 설교”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그분에게로 헛되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3. 무너진 세상을 회복시키는 설교(신 4:5-14)


대부분의 시간을 본문과 씨름하면서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하는 설교자들에게는 이따금씩 회의가 찾아온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는데, 다급한 그들의 손길을 먼저 잡아야하지 않을까? 많은 시간을 설교준비로 보내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저자는 깨어진 세상을 재건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설교자들을 통해 선포된 말씀 아래 모이는 백성”이라고 말한다. 복음은 ‘세상을 다시 일으킬 씨앗’이며, 우리가 매주하는 설교를 통해서 뿌려진다. “지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도움은” 무엇인가?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하는 설교를 성심 것 준비해 교회의 성도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마치며


사실 이 책의 내용은 설교자에 대한 위로 보다 실제적인 조언들로 가득차다(미쳐 다 소개하지 못했다). 영어 제목은 ‘The Priority of Preaching(설교의 우선순위)’다. 설교의 중요성과,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늘 회중 앞에 설교를 해야 하는 의미 등에 대해서 짧지만 밀도 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저자는 강해설교학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뚜벅뚜벅 바른 설교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 속 치유가 일어난다. 우리가 어렵지만 고집하고, 걸어가는 설교의 정도를 응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출판사에서 <좌절된 설교의 ‘치유’>라고 번역한 것은 매우 적절했다.


설교를 하면 할수록, 설교가 어렵다. 공부를 할수록, 더욱 마음이 무거워진다. 예전에는 어떻게 설교를 준비했는지 모를 정도로, 설교를 준비함에 그야말로 진액을 짜낸다. 그런데 설교의 정도를 말하는 저자를 통해서 한 가지 위로가 왔다. 그것은 “이렇게 가는 길이 결국 맞구나”하는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은 일차적으로 회중의 반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방편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며, 이 일을 위해 나를 택하신 부르심에 달려 있다. 그러기에 부르신 자리고 있고, 책에서 열거한 대로 성심껏 설교를 강해하고 있다면, 괜찮다. 그의 말처럼 “다가오는 주일에 주님의 양떼에 당신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할 수 있는 특별한 자리에 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일을 당신에게 맡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