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드러난 하늘나라

더이상 ‘희미한 장소’ 아니다

저자명 폴라 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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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김병완 목사(우리가꿈꾸는교회) /  작성일 2021-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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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 구더(Paula Gooder), 개인적으로는 낯선 신학자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영국에서 떠오르는 구약신학자로 제2의 톰 라이트(N. T. Wright)로 불리고 있다고 하는데, 번역된 책의 제목도 톰 라이트를 연상시키듯 ‘마침내 드러난 하늘나라’다(톰 라이트는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Surprised by Hope)라는 책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다). 원제는 ‘Heaven’이다. ‘하늘-천국(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책을 쓴 목적에 대해, 천국에 대한 대중의 막연한 이미지(무한한 자유와 행복이 있는 사후 세계)를 걷어내고, 성경 속 인물들이 갖고 있었던 시각을 갖게 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하늘나라와 관련된 용어들(하늘나라, 보좌,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 천사)을 언급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제부터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 보자.


하늘과 땅의 창조 목적


우리는 ‘하늘나라’를 떠올릴 때, 언제가 ‘우리와 관련 있는 곳’으로 연상하나, 성경은 지금 ‘하나님과 관련 있는 곳’으로 묘사한다고 한다. 하늘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될까? 성경에서 ‘하늘(샤마임)’은 ‘창공(sky)’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계신 곳(heaven)’으로도 표현된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나오는 궁창(라키아)라는 단어를 물과 물 사이를 나눈 공간 정도로 주목해왔는데, 저자는 해당 단어가 사용된 다른 용례들을 통해 본래의 의미를 발견한다. 히브리어 ‘라키아’는 반죽을 눌러 펼친 ‘얇은 면’과 같은 개념이다. 에스겔 1장과 10장에서 사용된 ‘라키아’는, 날개 달리 생물들 머리 위에 펼쳐져 있으면서, 동시에 하나님 보좌가 놓이는 발판으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창세기에서 사용된 ‘라키아’ 위에도 하나님의 보좌가 놓여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한편 이것은 비단 ‘하늘’이라는 공간에만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노아의 홍수 사건으로 파괴된 물리적인 ‘라키아’(궁창)와는 별개로, 그것의 개념은 하나님의 발아래 늘 존재한다(출 24:10, 계 4:6, 욥 22:14절 참고)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라키아’는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땅 위의 지붕이며, 하나님에게는 하늘의 바닥이란 개념”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늘’을 생각해보자. 저자는 울리히 사이먼(Ulrich Simon)의 말을 인용하면서, “성경은 하늘나라와 땅을 하나의 세계로 보며, 땅이 공간적이라면 하늘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땅에 거주가 가능하다면 하늘나라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땅을 창조하신 목적이 ‘인간’을 그곳에 두기 위함이었다면, 하늘을 함께 창조하신 목적 또한 ‘하나님’ 자신이 그곳에 거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곳을 만드셨을까?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땅과 먼 개념이 아니라, 땅과 가장 가까운 영역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길 원하셨다. 그분은 심지어 하늘조차 멀어, 인간의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다. “하늘(나라)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함께 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열망을 드러낸다.”


하늘은 “하나님이 지금 거하시는 땅 위의 장소”이다.


하늘과 땅의 소통: 다양한 시도


하나님은 땅과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관계하시기를 원하신다. 성경에서 등장하는 두 가지 유형의 천사들 중 하나는 “하나님을 밤낮으로 경배하는 하늘의 존재들”이지만, 또 하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땅에 전달하는 메신저”이다. ‘천사’들은 하늘과 땅이 소통하는 주요 채널 중 하나였다. 뿐만 아니라 땅 아래 사람들이 보게 되는 ‘환상’도 있다. 폴라 구더는 환상이 “인간이 땅에서 하늘의 무언가를 보는 방식”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바울은 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이처럼 다양한 채널을 통한 하늘과 땅의 대화의 간극은 계시록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면, 하늘과 땅의 경계선은 사라지고 온전히 하나가 된다.” 하나님의 우리와 온전히 함께하고 싶으신 열망이 이뤄지는 순간이다.


하늘과 땅의 연합: 예배


그리스도인들은 오래 전 부터 ‘하나님의 임재’라는 개념을 가리켜 ‘쉐키나’라는 명사를 즐겨 사용해왔다. 히브리어 ‘샤칸’이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자리잡다, 거주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머무신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임마누엘’이라는 개념으로 연결된다. 하나님의 오래 전부터의 열망은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다.


오래 전 유대인들은 ‘성전’에 하나님이 머무신다고 믿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가? 켈트족의 전통에는 ‘희미한 장소’라는 개념이 있다고 한다. “특정 장소가 다른 장소보다 하나님의 임재가 (왠지) 더 잘 느껴진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일종의 ‘쉐키나’이다. 야곱에 있어 벧엘이 ‘쉐키나’이고, ‘희미한 장소’이다. 저자는 요한복음 1장 51절에 예수님의 사다리 예고를 통해, “이제 하늘의 문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되었다”며, 예수님이 하늘에 직접 닿는 길이 되셨다고 말한다.


하늘을 통해 우리를 만나기 원하신 하나님은, 성전으로 가까이 오셨고, 예수님으로 우리 곁에 계셨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그의 말처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켈트족이 말하듯 각자의 “희미한 장소”를 갖고 있고, 그렇게 되길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예배 환경과 설교자에 영향을 많이 받기도 하고, 교회 안에서의 공간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 예배라고 생각하는데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삶이 괴로울 때, 예배당 안으로만 도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미한 장소”가 더 이상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세상의 모든 장소가 하늘의 문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끔찍한 장소에서도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하늘나라를 향한 믿음은,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곳은 이 땅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의 친밀함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무엇인가? 저자는 ‘예배’라고 말한다. 저자는 계시록 4장의 천사들의 노래를 이야기하며 우리가 그 노래에 합류함으로서 미래에 있을 하늘과 땅의 하나됨을 현재 일부 경험한다고 말한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그러한 느낌을 갖는 것이 예배의 목적처럼 자칫 비춰질 수 있다는 점이다. 도리어 “예배의 핵심은 그러한 느낌을 전달하는데 있지 않고, 하늘에 계신 분과 함께함에 있다.”


결론


톰 라이트의 글이 명료함으로 무릎을 치게 한다면, 폴라 구더의 글은 고개를 끄덕이게도 하고, 갸우뚱하게도 했다. 그는 성경의 정경만이 아니라 외경과 기타 고대 문헌들을 넘나들며 하늘과 관련된 주제들을 들쑤셔 놓는다. 개인적으로는 책의 서문과 1장, 2장, 6장에서 유익을 얻었고, 본 책의 핵심된 내용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벌려놓은 주제들에 비해 정리가 잘 안 되는 느낌이 있다. 그의 말처럼 학문성과 대중성 사이를 가로지르는 포지션 때문인지 학문적으로는 아쉽고, 대중적으로는 난해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특히 4-5장에 이어지는 각종 ‘천사들’에 대한 설명들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할 수 있다’는 저자의 결론과 시각들은 보수적인 개혁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신비한 영역을 인정하는 오순절주의자들에게도 크게 환영받지 못할 것 같다.


그녀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소통에 있어서 계속해서 외면 받으시는 이유는 … 말씀하시는 통로(예를 들면 부지중의 천사들)를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기록된 최종적인 계시, 성경이라는 채널에 대해서 우리가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목적을 드러내고, 일관성 있게 풀어낸 저자의 학문적 성과와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우리에게 크다. 누가 창조 속에 담긴 하나님의 열망의 크기를 상상이나 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