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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

존 비비어의 광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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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명 John Bevere
작성자 박두진 목사(예수다솜교회) / 작성일 2019-06-18

본문

존 비비어는 자신이 겪은 광야를 성경 말씀과 연결하여 친근하게 풀어놓는다. 그렇지만 마냥 부드럽지는 않다. 그가 말씀이 요구하는 방향대로 메스를 들이대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삶에서 어영부영하는 부분을 말씀으로 무섭게 파헤친 후, 다시 말씀으로 봉합한다. 책을 읽은 내내 마치 사정없이 마음을 얻어 맞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책을 덮을 즈음, 그 쓰라림이 영혼의 큰 기쁨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혹시 지금 광야를 걷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 책에서 길을 찾기를 바란다.


1. 메마른 삶​의 한복판: ‘하나님이 나를 잊어버리신 것 같다’


우리는 인생의 여정에서 광야에 설 때가 있다. 딱히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지 않기에 “제가 도대체 어떤 끔찍한 죄를 지었기에 이곳으로 보내시나요?”라며 시름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존 비비어는 본 저서에서 그 방향을 제시한다. 아이가 커갈수록 부모가 도움의 손길을 줄여야 하듯이, 하나님도 우리의 성장을 위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많은 이들이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인생의 메마름을 인생의 낙오, 회복할 수 없는 절망, 혹은 하나님의 말도 안되는 시험으로 생각하고는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생각의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 다시 말해 광야는 궁극적으로 위험한 곳 혹은 나쁜 경험이 아닐 수 있다. 예수님 역시 광야에서 우리보다 먼저 시험받으셨음을 떠올려 보라. 광야는 뒤쳐짐을 경험하는 곳이 아니라,  온전한 크리스천으로 빚어지는 과정의 중간 지점과 같은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야로 들어갈 때 이 길이 내게 주어진 의미를 잘 해석해야 한다. 훈련을 형벌로 오해하지 말라. 광야의 시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한 이유는 그 시간 동안 하나님의 역사가 내게서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광야를 걸을 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손을 붙잡아야 한다. 광야는 실패의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신 자리이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그 자리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마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2. 믿음의 동행자들: ‘모두가 광야를 걸었고 경험했다’


아마도 광야를 환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광야를 통과한 사람의 만나게 된다면, 기피하려고만 하는 그 마음이 바뀔 것이다. 욥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요셉도, 다윗왕도, 세례요한도, 사도 요한도, 그리고 예수님도 광야를 통과했다. 광야는 하나님이 중요하게 사용하는 곳이자 그분을 보여 주시는 곳이다. 하나님은 광야를 통해 우리를 낮추고 가난하게 하셔서 비로소 그분을 발견하게 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기도 전에 포기한다는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망하고 말았다. 갈증과 불만에 처할 때마다 그들의 시선이 애굽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광야가 길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을 찾다가도 세상을 향한 굳은 마음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상상하는 것,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라. 그것이 곧 자신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대상이다. 놀랍게도 다윗은 그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고 살았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는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마 10:37).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제거하여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아가야 한다.


3. 꼭 필요한 시간: ‘성숙을 위해 이보다 좋은 곳은 없다’


존 비비어의 인생에서 첫 번째 광야는 대형교회 부목사로 사역하던 시기에 찾아왔다. 처음에는 유명한 목사들을 접할 수 있어 설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천국이라고 생각되던 그곳에서 존은 광야를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 그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이 광야로 이끄실 때에는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하여 겸손하게 다듬어지기를 원하신다. 비록 쉽게 이해되지 않지만 그 방식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시는 방법과 동일하다. 만약 하나님이 그들을 괴롭히고자 작정하셨다면 아예 굶겨서 더 피폐하게 만들 수도 있을텐데, 그분은 4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동일한 만나를 먹이셨다. 왜일까? 만나가 그만큼 맛있기 때문이 아니다. 어찌 사람이 매일 같은 음식과 옷, 똑같은 경치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던 이유는 만나를 먹으면서 여전히 내 안에 에굽에서의 습성, 즉 고기와 부추를 찾는 습성이 살아있음을 깨닫기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그들이 비록 하나님을 믿었을지라도, 그분을 그저 자신의 욕망을 위한 신으로만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광야는 풍족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적으로 경험하는 장소이기에 일용할 양식만 필요한 것이다. 즉 광야는 내 욕망이 채워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가득 채워져야 하는 곳이다. 바로 그 경험이 있을 때, 우리는 번영의 시기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자 하는 겸손한 모습을 지킬 수 있다. 그러므로 광야는 진정 강해지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친밀한 관계: ‘더 깊은 관계로 데려가시다’


광야가 유익한 곳임을 깨닫게 되더라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우리를 광야로 데려가실 때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얻으실까? 그것은 친밀함이다. 신혼 때는 아내의 말이 꿀송이같이 달콤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배우자는 일과 취미보다 못한 위치로 밀려나게 된다. 그러나 결국 파리가 손을 비비듯 아내를 향해 용서를 빌어야 할 때가 온다. 사랑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다시 타오른다.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바라보느라 그분과의 친밀함을 잃을 때, 광야를 통해 그 모든 것을 회복하게 하신다. 예수님은 군중들이 기적을 원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궁금해하지 않는 모습에 안타까워 하셨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은 늘상 불평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들은 욕심이 채워지면 하나님의 간섭을 바라지 않았고, 하나님이 없어도 되는 상태로 돌아가고는 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도 그것을 지키는 행위 자체보다 그분의 마음을 아는 것과 친밀함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하나님과의 관계를 도식화하여 자아 성취감을 느끼고, 자기 계발과 신앙을 동일시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중심에 그분이 없음을 잘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나’를 위한 기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향한 기도의 차이를 너무나 분명하게 알고 계신다. 우리는 기도로 귀신을 내쫓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능력은 가룟 유다도 가졌던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길을 가는 것이다. 목회자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으로 쓰임 받느냐 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친밀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존 비비어는 “‘창조된’(나 자신)을 구하지 말고, ‘창조주’(하나님)를 구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부부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아이가 탄생하는 것처럼, 친밀한 관계에서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이를 모른다면 광야는 무익해진다.


5. 새 포도주를 담는 부대: ‘성령의 능력을 덧입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변화’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에 닫혀있기 때문에 광야를 어려운 시간으로만 생각한다. 하나님은 그 의도를 우리에게 실현하시고자 광야를 허락하시고 변화를 이끌어 가신다. 변화가 쉽지 않은 이유는 어릴 적부터 삶에 배인 습관이 종교가 되어 기계적으로만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종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일하심과는 관련이 없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 이런 모습을 거부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세례요한이다. 그는 가문의 후광을 뒤로하고 광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따라 변화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는 역사적 사건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역은 예수님의 광야 사역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만 몰리는 것을 보고 위기감을 느껴 하나님의 사역 방향과는 좀 멀어지고 만다. 그들은 금식을 통해 하나님의 복이 임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눅 5:34). 그들은 이것으로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굳어진 양가죽부대와 같다. 양가죽부대는 탄성이 사라져서 터지기 때문에 물에 집어넣고 올리브유로 문질러서 탄성을 재생시켜야 한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의 삶의 방식과 습관에 길들여지면 거기에 갇혀 버리고 만다. 이런 신앙생활을 통해서는 지금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급기야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으면서 전통에 안주해 버리고 만다. 교리는 있지만 내면은 텅 비어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낡은 가죽부대여서는 안된다. 새 포도주를 담아내려면, 낡은 가죽부대는 변화가 절실하다. 우리의 광야는 다가올 변화를 위해 허락된 곳이다. 낡은 가죽부대가 마르게 되는 것은 너무 이상한 일이 아니다.


6. 하늘의 상: ‘물든 세상 사고방식을 벗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첫째는 계속된 변화와 성장이며, 둘째는 지나간 것을 잊는 것이다. 우리는 성공과 실패의 기억에 지배당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라고 말한다(고전 13:11-12). 나이 들어 이전의 장난감을 계속 가지고 놀기는 어려운 일이다. 온전한 변화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이유는 사탄이 그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이며 사탄은 그렇게 사는 것을 끝까지 막고 저항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은 더 풍성한 삶으로까지 우리를 인도한다. 대부분 고난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고난은 고통당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5장 7-8절은 예수님이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고난은 인간과 상반된 하나님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었다. 우리는 고난에 대해 이를 악물고 견뎌야하는 상황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짙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고난의 잔을 들이키셨다. 어쩌면 고난은 세상 흐름을 역행하는 길로 인도하는 방법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정탐꾼을 통해 받은 소식은 악평이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세상의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고 하였는데도 가나안으로 나아가려고 하였다. 그것이 순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지나간 성공과 업적에 눌러앉고 싶은 경향이 있다. 그것이 심지어 광야생활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순종은 진정한 행복을 가져온다. 그것이 진정한 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7. 하나님의 대로: ‘새로운 생명과 비전으로 불타오르다’


광야는 주님이 만들어 놓으신 대로이다. 그러나 역사상 대다수 사람들은 이 길을 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자기 꿈을 따르고 하나님의 꿈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존 비비어는 전 세계적으로 전도와 치유 사역을 하는 오스본 박사와 같이 일하는 것이 꿈이었다. 하나님도 그 길을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길이 열렸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내도 그렇고 주변도 만류했다. 결국 오스본 박사를 만나서 상황을 설명하였고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일하던 교회는 사역을 그만한다고 했기 때문에 갈 곳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결국 일하던 교회의 배려로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되었지만 그는 왜 이런 혼란한 상황이 생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하나님이 오스본 박사와 일하는 것을 기뻐하셨지만, 그 일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은 비비어의 꿈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꿈과는 상관없는 자신의 꿈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생각지 않은 고통을 겪게 된 것이다. 광야가 주는 것은 마음을 순결하게 하여 하나님의 길을 가게 하는 것이다. 광야는 우리의 의도와 생각을 정화시키는 영적 도가니와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셔서 깨끗한 그릇에 담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성전의 정화도 이런 맥락과 연결된다. 금을 단련하기 위해 불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은 세상의 모습들이 우리 신앙 속에, 교회 속에 들어오기 때문에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광야로 이끄시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이 순결함 속에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될 때 세상이 예수님을 바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단련의 시간을 잘 받아들여야 한다.


8. 탄탄한 기도: ‘빠르고 쉬운 길로 가려는 유혹 뿌리치기’


광야는 인격을 형성시킨다. 하나님의 사람은 기름부음으로 되지 않고 인격을 통해 세워지기 때문이다. 광야는 인격이 연마되는 곳이다. 하나님이 다윗을 연마하기 위해 보낸 곳이 광야였다. 만약 하나님이 꿈과 비전을 보여주셨다면 하나님은 그 꿈이 더 멀어지는 것 같은 현실을 경험하게 하실 것이다. 요셉이 그랬다. 꿈은 사라져만 갔다. 자신을 괴롭혔던 형들은 평안한 삶을 살고 있었다.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이런 때 우리는 ‘순종이 대수냐?’라고 불평하기 십상이다. ‘하나님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실 유산보다 엉뚱한 것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3장 10-13절은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 조심할지니라’고 말씀하신다. 다 타버릴 것으로 지을 것인지 아니면 영원히 남을 것으로 지을 것인지를 잘 선택해야 한다. 잘못하면 하나님을 찾으면서 하나님과 멀어지는 끔찍한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높이 올라가기 전에 터를 다지는 일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터를 다지기 위해 광야를 허락하시고 기초를 만들어 가신다. 하나님을 위한 꿈이라고 해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 자기기만이나 속임수로 기다릴 때는 위험한 결과가 초래되기 마련이다. 존 비비어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힘으로 지은 것은 연단을 견디지 못한다.” 육신의 힘으로 탄생한 모든 결과물은 아브라함이 낳은 이스마엘과 같다. 반면 성령으로 일한 사람은 자신이 한 일이 없지만, 이삭을 낳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창 2:10)” 그러므로 이스마엘을 낳는 시도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과 은혜로 약속을 받고 태어난 것’만이 끝까지 남게 될 것을 믿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9. 믿음의 강화: '영적 근육 키우기'


하나님은 광야를 통해 영적 근육을 키워 주신다. 그만큼 광야는 영혼이 건강해지는 곳이다. 많은 사람이 시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더 큰 시련을 감당할 근육을 키우지 않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1장 29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다. 이 말씀은 고난을 감당할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이다. 고난을 이길 근력을 제공해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이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 근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략적인 고난을 주신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시험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약 1:13). 도리어 갑옷(벧전 4:1)을 입히신다. 그러므로 시험은 근육 강화훈련이다. 그래서 난관을 도리어 기뻐해야 한다(약 1:2).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 못 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60kg밖에 들어 올릴 수 없다면 더 높은 레벨의 도전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훈련과정을 허락하셔서 더 높은 레벨로 가게 하신다. 그러므로 광야는 힘을 키워주는 곳이다. 세례요한도 광야에서 심령이 강해졌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 근육을 키우도록 광야로 초청하신다.


10. 인내하는 연습: ‘물이 솟아날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말라’


광야는 물이 없어 메말라 버린 곳이지만 예수님은 솟아나는 물이 되어주신다. 우리는 “우물물아, 솟아나라!”고 노래했던 이스라엘처럼 믿음으로 선포해야 한다. 요한복음 7장 37-39절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우리가 광야에서 먹을 물은 하늘의 단비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길어 올려야 할 물이다. 그리고 그 생수는 성령이다. 존 비비어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이런 우물이 있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길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목말라하지만 기도를 멈추어 버린다. 힘들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느 8:10)이고,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기쁨을 느낌이나 기분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고, 그것이 없다고 하나님께 거부당한 것이라 생각지 말라. 하나님이 구원의 우물로 우리를 인도하심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메마르다고 해서 허둥지둥 빠져나가려고만 하지 말아야 한다. 기근의 시기에 하나님은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그곳에 거주하라고 하셨다(창 26:1-3). 현대인들의 문제는 이동이 빈번해져서 안락에 익숙하고 애굽으로 가려고만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삭에게 그곳에 거주하라고 하셨고 그 땅에서 백 배나 얻게 하셨다. 이삭은 아버지의 우물을 다시 파서 물을 얻었다. 놀라운 장면은 세상을 상징하는 블레셋은 계속 우물을 메워버렸다는 사실이다. 세상의 가치는 우물을 막혀버리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물 댄 동산”(사 58:11-12)으로 바꾸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메마른 자리에서 우물을 다시 파야 한다. 비록 그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말이다. 주변을 보라. 얼마나 우물이 막힌 사람들이 많은지를! 하지만 성령은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물을 파야만 한다.


11.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라: ‘하나님은 시간낭비를 하지 않으신다’


광야는 입구와 출구가 이어지는 직선로가 아니라 우회로와 정지신호가 가득한 길이다. 존 비비어가 목회를 결심하였지만 하나님은 곧바로 신학교로 보내시기보다 학교를 마치기까지 기다리게 하셨다. 그의 생각은 학교를 중간에 마치고 헌신하는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뿐만 아니라 7년 동안 평신도로만 봉사하게 하셨다. 왜냐하면 영적 상승에는 그 수준에 맞는 선행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그는 ‘자신의 권위’로 일하려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에 조급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너 자신에게 보냄을 받으면 네 권위로 사역하겠지만 내게 보냄을 받으면 내 권위로 사역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사역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하는 일은 아무 가치가 없다. 예수님도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 5:19)라고 하셨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으셔야 했다. 나사로가 잠들었을 때에도 죽은 이후에 갈 것을 하나님이 명령하셨기에 멈추셔야 했다. 예수님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셨다. 베드로와 요한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앉은뱅이를 치료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인도하심이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 광야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최적의 훈련장소이다. 하나님은 제멋대로 가는 선지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렘 23:21, 32). 모세도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았을 때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40년 광야 생활이 지나자 새로운 모세가 탄생했다. 세례요한도 30년 광야 생활로 훈련을 받고 6개월을 사역했다. 하지만 6개월 사역은 자기 힘으로 수십 년을 일한 사람보다 비교할 수 없이 컸다. 예수님이 ‘여자에게서 태어난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그래서 광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없이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하려는 의도는 모두 부질없는 것임을 가르쳐주는 곳이다. 존 비비어는 이렇게 말한다. “광야의 본질은 준비이고, 광야는 약속의 완성으로 가는 과정이다.”


12. 광야의 면류관: ‘예수의 형상을 본받게 되다’


광야는 잠시 방문하는 곳이지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우리는 광야를 통해 하나님이 목적이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열심히 경주하고 결승선을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교제다. 교제를 통해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다. 하지만 광야를 통과할 때는 누구도 ‘순간’처럼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 세상이 주는 안락의 복음을 조심해야 한다. 전투 없이는 승리를 거둘 수 없는 곳이 광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뜻대로 해버리려는 함정을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비전을 주목해야 한다. 찬양도 중요하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 무거운 것들이 벗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삶의 저항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추구하고 약속을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기쁨이 샘솟는다. 광야는 무기를 내려놓고 포기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해야 할 장소이다. 우리가 지금 광야에 있다면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임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사랑은 끊을 수 없고, 궁극적으로 승리를 주실 것이고, 그러기에 감사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러므로 광야는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시험을 참으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셨던 예수님처럼 나아가야 하는 곳이다. 그러면 우리도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