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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아진 자아, 하나님을 거부하다

팀 켈러의 방탕한 선지자

페이지 정보

저자명 Timothy J. Keller
작성자 이광현 목사(의정부뉴시티교회) / 작성일 2019-07-15

본문

아는 지인 목사가 요즘 요나서를 연구하고 있는데 무척 재미있다고 전해 왔다. 그리고 막연하게 동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피노키오가 고래 뱃속에서 자신을 만들어준 할아버지를 만나는 장면이다. 서로 연관성은 없지만 피노키오 이야기와 요나서가 상상력 속에서 오버랩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 피노키오의 작가는 분명 요나서를 읽었을 것이다. 물고기 뱃속에서 진짜 하나님을 만난 요나.


언제부터인가 요나서를 읽고 싶었다. 그러나 본문 연구에 대한 부담이 있어서 ‘조금만,’ ‘조금만’ 하다가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팀 켈러의 ‘방탕한 선지자’(Prodigal Prophet)를 만나고 참 반가웠다. 요나서에 대한 부담은 줄어들고, 요나서에 대한 흥미는 배가되었기 때문이다. 팀 켈러 목사의 요나서 이야기를 통해 대강의 이해와 여러 각도에서의 탁월한 관점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이 책을 읽은 것은 사실 독서모임에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대강 읽었는데, 읽고 나서 얻은 것이 너무 많다. 그러나 전체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보다 몇 가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가지고 마당에 펼쳐놓듯 끄적여 보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 공감하면 좋겠다. 


방탕한 요나


제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역시 ‘팀 켈러’라는 생각을 했다. 요나서에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어버린 두 아들 비유를 만나게 될 줄이야.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읽으면 도움이 되는 책이 있다. 바로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과 ‘내가 만든 신’(Counterfeit Gods)이다.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이런 관점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인데, 요나 선지자는 1-2장의 잃어버린 두 아들 비유에서 부도덕한 둘째 아들에, 3-4장에서는 바리새인으로 연결되는 형에 비유된다. 이 둘은 서로 방식은 달라도 모두 아버지께 반기를 들었던 아들들이다. 그런데 요나 선지자는 이 두 사람의 모습을 모두 반영한다. 그런 면에서 책의 제목이 '방탕한' 선지자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요나, 회심한 듯했지만 여전히 주관적인 신앙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놓는 요나. 잃어버린 두 아들이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하나님의 메시지


요나서 1장 1-3절과 3장 1-3절에서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는 선지자다. 그러나 다른 선지자들과 다르다. 당시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로 보냄을 받지만,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보냄을 받는다.


여기에서 요나서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앗수르는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 공동체요, 힘으로서 세상을 지배하는 제국이요, 매우 야만스럽고 폭력적인 나라다. 이들이 바로 B.C 722년에 북이스라엘을 집어삼킨 이스라엘의 원수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를 불러 그들에게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다. 요나는 가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이 나라의 원수들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 시대의 요나로서 질문을 받는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요나와 같이 이들은 복음을 들을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거부하는 그 대상을 향하여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신다.


민족주의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게 된 매우 주요한 원인은 그의 마음에 있었다. 그는 분명 하나님과 일대일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선지자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보다 더 앞선 사랑이 있다. 나라와 민족 사랑이다. 그저 단순한 애국심이 아니다. 자국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적국들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저주를 퍼붓는 열렬한 사랑이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이 가리킨 방향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급적 멀리 도망치는 길을 선택한다.

팀 켈러는 나라 사랑은 분명 좋은 것이지만 만약 그 마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우선한다면 이는 우상, 곧 내가 만든 신으로 전락하고 만다고 지적한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보다 앞선 애국심 때문에 멀리 도망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누구에 대한 충성인가? 애국심인가? 하나님인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실망 가득한 베드로를 향하여 던지셨던 질문이 생각난다. 오늘도 주님은 베드로로 대표되는 제자들을 향하여,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하여 묻고 계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충성을 바쳐 사랑하는 대상, 사랑하기에 기쁨을 드리기 원하는 예배의 대상은 누구인가?


뱃사람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멀리 도망친다. 그러나 곧장 그가 만난 것은 큰 풍랑이었다. 그런데 요나와 함께 풍랑을 만난 사람들이 있다. 뱃사람들이다. 풍랑은 요나 한 사람 때문에 일어난 초자연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 배에 함께 탔던 뱃사람들도 갑작스러운 큰 풍랑을 만난 것이다. 그들은 이 풍랑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놀라운 것은 이 풍랑 때문에 그들은 불평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기도할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제비뽑기를 통하여 요나가 선택되었을 때에도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 보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요나보다 훨씬 더 올바른 방향을 찾고 있다.


팀 켈러는 이것을 ‘일반은총’으로 설명한다. 즉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이러한 선한 마음을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의 신자들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좋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일반의 은총을 허락하신다. 이와 같은 관점 안에서, 팀 켈러는 요나와 뱃사람들이 그러했듯 교회의 신자들과 교회 밖 사람들이 한 배를 탔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민은 그 폭이 넓어져야 한다. 신자와 비신자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신앙 및 사고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열린 마음으로 선교를 이끌어야 하고, 공공선에 대한 고민을 깊이 가져야 한다. 우리는 한 배를 탔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요나서는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 공동체로서의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요나의 희생


풍랑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욱 거세진다. 이때 뱃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는다. 요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를 바다에 던지면, 풍랑이 잠잠해질 것입니다.” 결국 요나 한 사람을 바다에 던짐으로 인해서, 뱃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건져낼 수 있었다.


훗날 예수님은 자신을 ‘요나보다 더 큰 이’로 비유하신다. 그 이유는 요나가 바다에 던져진 후 물고기 뱃속에서 삼 일간 갇혀 있다가 극적으로 살아난 사건을 십자가 사건에 빗대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요나의 죽음은 대속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대신하여 죽임을 당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건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요나는 자기 죄 때문에 바다에 던져졌다. 그리고 큰 물고기에게 삼킴을 당하고, 사흘 만에 극적으로 생명을 건지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던져졌다. 요나는 자신의 생명을 극적으로 건졌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완전한 죽임을 당하셨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요나보다 더 큰 분이시다.


요나는 살아났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만난 것은 무엇인가? 그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쫓겨났지만, 그곳에서도 전적인 은혜로 자신을 붙들고 계시고, 기도를 들으시며,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풍랑은 멈추었고, 요나는 생명을 잃지 않았다. 그런데 결과가 놀랍다. 요나를 던진 후 풍랑이 잠잠해졌을 때, 뱃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들은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며 예배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요나 또한 바다 속 깊은 곳에서 죄인인 자신을 용납하시고 용서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경험하고 예배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자. 그리고 우리를 받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보자.


하나님의 간섭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나와 이제 니느웨를 향한다. 그리고 그는 40일 후 하나님께서 이곳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설교한다. 그런데 참 이해하기 어려운 반응이 나타난다. 요나의 설교를 듣은 앗수르 백성들 사이에서 전 국가적인 회개와 각성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팀 켈러는 당시 그 회개와 각성 운동의 원인으로 앗수르의 국내 사정을 지목한다. 앗수르는 힘에 의해 다스려지는 제국이다. 그들은 야만스럽고 포악하다. 그런데 그들은 주변 국가들에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자국 내에서도 동일하게 포악한 행위를 일삼았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고위층이 하층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힘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에 심각한 갈등의 상황이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앗수르의 국내 상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때 나타난 요나의 선포는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리고 그 회개의 결과, 하나님의 진노는 떠나갔다.

우리는 선교 현장에서 정말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다스리고 계시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 사역이 하나님의 선교라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가 감당하는 복음 사역은 누구의 사역인가?


요나의 불평


요나는 출애굽기 34장 6절의 모세의 말을 이용하여 불평한다. 그러나 결코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이시군요. 쯧쯧.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잃어버린 두 아들 비유에서 형이 아버지에게 부도덕한 동생을 비난했던 것처럼, 요나는 니느웨의 회개와 사라져버린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크게 화를 낸다. 여전히 그는 하나님보다 나라와 민족을 더 사랑한다. 여전히 그는 이스라엘은 복을 받고, 니느웨는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생각대로 되지 않자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낸다.


요나서 4장에서 하나님은 박 넝쿨 교훈을 통해 이 상황에 대하여 대답하신다. 4장의 이야기를 건너뛰고 결론을 말하자면, 요나가 더운 날 박 넝쿨을 아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니느웨의 많은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아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요나의 불평에 대해 하나님의 반응이 달라졌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분은 이전에 도망치는 요나로 하여금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인생의 큰 고비를 만나게 하셨지만, 이제는 박넝쿨을 통하여 잔잔하게 설득하고 계신다.

이제 요나에게 남겨진 숙제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앗수르 니느웨의 죄 많은 백성들도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악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지만, 사람을 사랑하신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은 테러를 일삼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사랑하실까? Yes! 하나님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보유하려는 북한의 김정은을 사랑하실까? Yes! 하나님은 조선 땅을 침략하고, 경제를 수탈하였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아간 역사에 대하여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사랑하실까? Yes! 독도 분쟁을 일으키고, 수출입규제를 통하여 경제보복을 하는 일본을 하나님은 사랑하실까? Yes! 하나님은 살인자들을 사랑하실까? 예스! 하나님은 보이스 피싱 범죄자들을 사랑하실까? Yes! 하나님은 동성애자들을 사랑하실까? Yes! 하나님은 장애인들을 사랑하실까? Yes! 하나님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나운 이리와 같은 이단들을 사랑하실까? Yes!


목회적 적용


그러고 보면 우리는 요나서의 말씀을 통해 세상을 향하여 좀 더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요청받고 있다. 모든 사역의 시작인 말씀 사역을 비롯하여 세상을 향한 선교적 교회로의 부르심, 자비와 정의 및 긍휼을 추구하는 사역에 이르까지 이 모든 발자취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공공선을 추구하도록 하신다. 또 한배를 탄 공동체로서 이웃과 하나되고, 요나보다 더 큰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붙잡는 삶을 살기를 요구하신다. 더불어 우리가 세상을 향하신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때로는 풍랑으로 또 때로는 박 넝쿨로 나를 다루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요즘 교회 개척을 진행하면서 복음의 기초와 성경적 교회에 대한 공부를 통해 교우들과 함께 교회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고민은 ‘우리는 도대체 이 지역에서 어떻게 전도를 하고 어떻게 힘 있게 교회를 세워갈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현실은 녹록치 않다. 최근에 지역 교회의 목사들을 만났다. “지난 4-5년 동안 열심히 전도해 봤지만 이 지역에서 목회를 이어가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라는 말만 돌아왔다. 어쩌면 우리는 나의 교회가 안으로 성장하는 모습만을 기대하고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복음과 교회론으로 뼈대를 세워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나의 교회 그리고 나의 교우들뿐만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속한 도시와 지역을 사랑해야 한다. 교회의 수적, 양적 성장보다는 지역의 발전을 생각해야 하며, 지역 교회와 함께 공존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또한 복음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사람들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세워져야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임을 기억해야 한다. 기존의 선교 패러다임이 뒤집히듯, 우리는 새로워져야 한다. 막연하지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달리하는 것이 곧 요나서를 삶에 적용하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