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변혁의 기독교 세계관 선언서

칼빈주의 강연(화란어 직역본)

저자명 Abraham Kuy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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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고상섭 목사(그 사랑교회) /  작성일 202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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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강연’은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에 초청받아서 여섯 가지 주제로 칼빈주의적 관점을 제시한 책이다. 당시 진화론과 범신론이 유행했고, 계몽주의 이후의 이성이 발달하면서,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개념이 사람들에게 심어졌고, 프랑스 혁명 등을 통해 좀 더 민주적으로 발전한 부분도 있었지만 모든 권위의 부정으로 흐르는 잘못된 피해들도 있었다. 교회 안에서는 자유주의와 신비주의가 대두되는 등 안팎으로 기독교가 위축될 수밖에 없는 위기의 상황이었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카이퍼가 마음의 안식을 누리며 많은 문화 내러티브들의 모순을 드러내면서 평가하고 도전할 수 있었던 기준이 바로 ‘칼빈주의’였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하나님 품에서만 안식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처럼 칼빈주의 안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개혁주의를 자처하는 소위 ‘칼빈주의자’들에게는 환호할 이야기지만 칼빈주의를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좀 의아한 대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이퍼가 이야기 하는 ‘칼빈주의’는 오늘날로 말하면 ‘기독교’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당시 기독교라는 이름 안에서는 교리가 전혀 다른 루터파와 자유주의 교회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포함하지 않으려고 칼빈주의라는 좀 더 폭이 좁은 용어를 사용한 것 같다. 그가 말하는 ‘칼빈주의’는 개혁주의신학만을 하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모더니즘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혼란의 시대에 그 사상의 허무함과 모순을 드러내고, 기독교의 가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였기 때문이었다.


카이퍼의 ‘칼빈주의’는 하나의 세계관을 의미한다. 이전에 번역되었던 ‘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라는 의미이다. 당시에는 세계관이라는 단어가 유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삶의 체계’(Life system)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어쩌면 세계관이라는 말보다 더 폭 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카이퍼는 칼빈주의를 여섯 가지 영역을 해석하는 열쇠로 설명하고 있다. ‘칼빈주의의 역사’에서는 역사 속에서 칼빈주의를 정의하고 기독교 신앙의 관점만이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체계라고 말한다. 인간의 이성이나, 다른 이즘으로는 하나님, 인간, 세상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을 드러내줌으로 성경적 관점의 우월성을 말한다. 팀 켈러의 표현으로는 ‘다른 어떤 사상도 통합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기독교가 가장 인생과 나를 설명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칼빈주의와 종교’에서는 기독교가 아닌 다른 모든 종교는 하나의 통일성을 가지는데 인간의 필요에 의해 시작되었고, 또 인간중심의 이기적인 욕구로부터 출발한 것이라 정의하며, 기독교는 인간의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고 정의한다. 인간의 구원 또한 자력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한 타력 구원이 세상을 부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칼빈주의와 정치’에서는 교회와 정치의 관계 즉 교회와 국가 권력의 관계를 설정해준다. 기독교의 성경적 체계가 한 사람의 신앙인이자 국민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관점을 제시해준다는 것이다. 국가와 교회가 서로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함께 연합할 수 있다는 것을 ‘영역주권’을 통해 설명한다.


정부가 인간의 죄로 인해 생겨났고, 그러나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기독교인은 그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권위 아래에서 복종하며 그리스도 안의 신자로 또한 세상의 시민으로 역할을 해야 함을 알려준다. 단순히 국가나 정부를 이원론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종합적으로 이해하게 함으로, 하나의 행위가 아닌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카이퍼의 가장 큰 장점인 것 같다.


‘칼빈주의와 학문’에서는 모더니즘으로 대두되는 세상 속에서 학문은 파편화되어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대한 인식이 서로 연결되어 있을 때만 바른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기독교 인식론적 이해를 통해, 기독교만이 학문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음을 이야기 해준다. 즉 신앙과 동떨어진 학문은 참된 진리에 도달할 수 없고, 진리의 파편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과 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때만 결국 학문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참된 학문은 결국 ‘계시 의존 사색’임을 보여준다.


‘칼빈주의와 예술’에서는 예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거나, 너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예술의 위치를 자리매김 시켜준다. 예술은 타락한 세상 속에서 마지막 임할 회복에 대한 소망을 보여주는 것이라 정의하며, 보이는 세상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눈을 열어주는 것이며, 인간의 타락의 상황을 묘사함으로 또는 영원한 세계를 향한 소망을 표현함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도구임을 말한다. 그리고 성경적 이해만이 예술을 더욱 독립적으로 또한 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준다.


마지막 ‘칼빈주의와 미래’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모더니즘의 사상의 힘이 거세지만, 참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분별할 수 있고 평가할 수 있고 도전할 수 있음을 이야기 하면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성령님을 의지하며 앞으로 계속 나아갈 것을 도전하고 있다. 좀 더 세련된 것, 현대적인 것을 찾으려하지 말고 시대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복음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것을 권유한다.


이 책은 단순히 칼빈주의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교리적 지식을 전달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을 거울로 사용해서 나를 돌아보고 나를 비추어 보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지만, 또한 성경이라는 창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함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가 묵상하고 읽는 성경은 단순히 개인의 영성과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과 시대를 바라보는 하나의 거대한 관점이며, 삶의 체계임을 알려준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그 삶의 체계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반틸의 말로 표현하면 ‘전제’를 수용한다는 의미이며 팀 켈러의 표현대로라면 세상의 문화 내러티브를 평가하고 도전하는 새로운 인생의 이야기를 세워간다는 것이다. 이 책은 어떤 감동이나 하나의 인사이트를 주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통째로 바꾸어주는 것 같은 인생의 방향을 열어준다.


기독교는 단지 교회에서만 역사하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삶의 체계이며 세상을 이해하는 거대한 스토리이다. 읽을 때마다 머리가 시원해지고 동시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칼빈주의 강연’은 또한 카이퍼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학문과 지식, 그의 경험, 그의 신앙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는 것을 여섯 가지 주제들을 통해 드러내준다.


교리적 지식이 아니라 또는 실천적 지식이 아니라 교리와 실천의 중간지점인 신학적 비전을 세워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교리도 알고 생활의 적용도 힘쓰지만 삶의 원리가 없다면 단순히 반복적인 결단으로 끝날 수 있다. 오늘 포스트모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이런 신학적 비전일 것이다. 삶의 방향과 원리를 알려주는 좋은 책이 다시 번역되었다. 기존에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훨씬 번역이 매끄럽고 가독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종교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전복되는 삶의 관점을 가진다는 것이다. 성경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타락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게 된다. 우리는 보이는 세상의 한 가운데 살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 강연’은 우리 신앙의 근본적인 뿌리를 세워주는 책이다. 이 책은 인생을 향한 새로운 눈을 열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