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W CITY CATECHISM뉴시티 교리 문답

Question 19 형벌을 면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방법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순전한 자비로 그분의 공의, 즉 하나님 자신을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구속자에 의해 하나님과 화해하고 죄와 죄에 대한 형벌에서 구원받게 됩니다.

있습니다. 구속자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

이사야 53장 10-11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해설

조나단 에드워즈 그러나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드러난 것만큼 존경과 사랑을 드리고, 진심으로 뜨겁게 갈망하며, 소망과 기쁨이 되고, 뜨거운 열심을 낼 만한 다른 대상을 하늘이나 땅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우리를 가장 감동시킬 만한 것들이 선포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가장 감동을 주는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 복음에는 그 자체로 우리의 존경과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신, 복되신 여호와의 영광과 아름다움이 가 장 감동적인 방식으로 드러나 있다. 그 방식에 드러나 있듯이 우리는 육신을 입고 오셔서 무한한 사랑과 온유, 긍휼을 보이시고 죽으신 구속자의 얼굴에 서 모든 빛 가운데 빛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 지닌 모든 덕목, 즉 그분의 겸손과 인내와 온유, 복종과 순종, 사랑과 긍휼은 생각할 수 있는 우리의 정서에 가장 감동을 줄 만한 방식으로 우리 눈앞에 드러난다. 그분이 가장 감동을 주는 상황에 있을 때, 그 모든 덕목은 가장 큰 시련을 겪고, 가장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으며, 그만큼 가장 밝게 드러났다. 심지 어 마지막 고난을 당하실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그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난을 견뎌 내셨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죄가 지닌 혐오스러운 특성이 가장 감동적인 방식으로 구현된다. 죄가 낳은 끔찍한 결과로, 우리는 죄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구속자께서 그 죄 때문에 고통 당하시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구속자의 고난을 통해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와, 죄를 벌하시는 그분의 진노 와 공의를 가장 감동적으로 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척이나 소중하고 우리에게는 사랑스러운 그리스도를 통해 엄격하고 냉혹한 하나님의 공의와, 죄를 처참하게 벌하실 만큼 무시무시한 그분의 진노를 본다. 그래서 하나님은 복음 안에 우리를 위한 구속하심을 계시하시고, 그분의 영광스러운 경륜안에서 그것들을 계획하셨다. 우리 마음에서 가장 연약한 부분을 건드리고 우리의 정서를 가장 민감하고 강력하게 움직이기 위해 모든 것을 꾸미신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감동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겸손해져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묵상

마이카 에드먼드슨 상영 시간이 되어도 영화관의 불이 꺼지지 않는다면, 조금 색다른 체험을 하게 된다. 나는 얼마 전 영화관에서 처음 30초 동안 불이 켜진 채 영화가 상영되었을 때 그 사실을 배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짜증이 난 세 명의 남성이 난폭하게 뛰쳐나가 영화관 직원에게 불을 끄라고 요구한 것이다. 영화관에서는 밝은 이미지와 대조되는 암흑 같은 배경에 소리와 드라마가 더해져야 비로소 완전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이 문답도 그런 식으로 세워진다. 빛을 발하는 복음의 영광과 비교하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의로운 심판은 암흑 같은 배경을 제공한다. 우리가 당할 재앙의 깊이를 이해하고 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더 잘 인식할 수 있다.

이 문답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아무 대가 없이 자 신의 공의가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키셨다고 우리에게 말해 준다. 이사야 53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불의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종(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삶을 대속 제물로 삼으셨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우 리가 감당해야 했던 삶을 사셨고, 그래서 우리 대신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공의를 충족시키셨다. 또한 그분은 우리가 당해야 했던 죽음을 감당하셨 다. “상함을 받다”, “질고를 당하다”(사 53:10)와 같이 이사야서에서 종을 묘사하는 단어들은 우리 죄의 대가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상기시킨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하나님이 죄에 대해 내리신 저주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셨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죄에 선고한 요구를 완전하게 충족시키셨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 의로운 삶과,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 속죄의 죽음이 있다. 이 위대한 맞바꿈이바로 복음의 핵심이다.

아마도 이사야의 말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여호와께서 이 맞바꿈을 “기뻐하신다”는 표현일 것이다. 실제로 여호와는 자신의 죄 없는 아들이 넘겨져 조롱당하고 상함 받고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기뻐하셨다. 하나님이 이것을 왜 기뻐하셨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이 진리를 제대로 헤아릴 수 없다. 하나님이 예수를 배신한 유다의 죄나 예수를 미워한 종교 지도자들, 그분에게 불의한 선고를 내린 빌라도나 그분을 거부한 그릇된 군중을 기뻐하신 것은 분명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변함없이 자신을 신뢰하고 자신의 백성을 사랑한 자신의 아들이 보인 적극적이면서도 (고통을 통한) 수동적인 순종을 기뻐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죄 많은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에게 내려진 심판을 기뻐하셨다. 십자가를 통해 그 아들이 영광받고, 그 백성이 구원을 얻으며, 자신의 공의가 충족되고, 자신의 사랑이 온천하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비극적인 사건이 아니다. 구속자의 사역을 통해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고 자신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측량할수 없는 부요함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자 계획이었다. 마침내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아무 대가 없이 이 맞바꿈을 이루셨다. 이 문 답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를 벌하신 근거가 “순전한 자비" 때문이라고 매우 조심스럽게 지적한다. 순전한 자비”라는 말은 오직 은혜, 즉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 은혜를 의미한다. 위대한 설교자 찰스 H. 스펄전이 쓴 유명한 글이 있다. “구원은 모두 은혜다.” 비록 이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부도덕함을 피하도록 훈련하긴 하지만, 어쨌든 이것은 우리의 순종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 삶에 끊임없이 붙어 다니는 죄와, 계속되는 연약함을 생각할 때, 우리는 복음의 순전한 자비”라는 측면에 매달려야 한다. 하나님 이 사랑하는 아들을 주신 것은 우리 삶에서 빠져 나가실 생각에서가 아니라 단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좋은 소식인가!

기도

오 화목케 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해결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는 완전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받을 수 없는 구원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것이 아닌 그분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님께 나아갑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