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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플터치 & 큐티

울지 않는 슬픔

11월 13일 와플 QT_주말칼럼

2022-11-13

주말칼럼_울지 않는 슬픔 

  

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어서, 30년이 지난 무덤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고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지는 또 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 먼 슬픔이 다가와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데, 이 풍화의 슬픔은 본래 그러한 것이어서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니다. 우리 남매들이 더 이상 울지 않은 세월에도 새로 들어온 무덤에서는 사람들이 울었다. 이제는 울지 않는 자들과 새로 울기 시작한 자들 사이에서 봄마다 풀들은 푸르게 빛났다.



김훈 선생의 『바다의 기별』이라는 산문집에 적힌 글입니다. 다른 책을 읽다가 선생의 글이 인

용된 자리에서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어느 시인은 ‘사진도 늙는다’ 했지요. ‘시간’은 힘이 세서 

늙지 않게 하는 게 없고, 낡아지지 않게 하는 게 없고, 닳아지지 않게 하는 게 없나 봅니다. ‘사진’ 조차 ‘늙게’ 하고 ‘슬픔’까지 ‘풍화’시키는 힘이 있는 거지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30년이 조금 더 지났습니다. 명절 ‘차례’를 마치면 가족들은 산소를 찾습니다. 자리를 펴고, 제사음식을 차리고, 술을 따르는 무덤 앞 풍경은 슬픔이기보다 추억입니다. 아이들은 뛰어놀고 어른들도 마른 농담을 섞어가며 편한 말을 주고받습니다. 30년 전 봉분을 세울 때 통곡하지 않은 가족이 없었지만 “30년이 지난 무덤가에서는” 아무도 울지 않습니다. ‘시간’은 그렇게 ‘슬픔’을 ‘풍화’시킵니다. 


차로 20여 분, 가까이에 벽제 승화원이 있습니다. 장례가 아니어도 수시로 그 앞을 지나다니

지요. ‘주검’을 불태우는 뜨거운 화로 곁을 지난다는 건 아무래도 예삿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게 자주이거나 일상이 되면 죽음을 가까이에 두고 살면서도 죽음을 멀게 바라봅니다. ‘언제

가’ 죽을 걸 알면서도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고 여기며 ‘언제나’ 그 앞을 지나는 거지요. 스스로 ‘언제’를 장담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래전 장례풍경은 정형화된 면이 있어요. 마을의 집집 마다 대문에는 노란색 봉투의 부고가 꽂혀 있는데, 열어보지 않아도 그게 누구네 집 소식인지를 다 압니다. 상갓집에는 상등이 걸리고, 그 집 안방 병풍 뒤로 관을 모셔 놓습니다. 상주들이 병풍 밖에 줄 서 있는데 저마다 삼베옷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조문객을 맞을 때마다 ‘아이고, 아이고’ 하며 곡을 합니다. 마당에서는 조문객을 위한 밥상이 마련되는데, 밥만 먹고 후딱 일어서는 밥상이 아니지요. 여러 번 상을 갈아가며 그 아래서 같이 밤을 새웁니다. 


요즈음 장례풍경 또한 정형화된 건 마찬가지인데, 그 풍경이 좀 다양합니다. 한 마을에 한 집 초상을 치르던 옛 풍경과 달리, 요즘은 한 공간에서 여러 집 초상을 볼 수 있지요. 장례식장 1호실에서는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를 하고, 3호실이나 8호실에서는 미사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어느 호실에서는 목탁 소리가 들리기도 하는데, 저마다의 장례 예법에 토를 달지 않고 그러려니 하며 지납니다. 


그 풍경의 이모저모는 벽제 승화원으로 옮겨지기도 하는데, 거기엔 특별한 풍경 하나가 더해집니다. 고인의 시신을 이제 막 화로에 모신 유족들의 오열과, 화장을 마치고 분골된 유골이 담긴 함을 들고 그곳을 빠져나오는 가족들의 담담함의 교차가 그것입니다. 화로에 모셔 화장을 마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시간 반 정도. 그 길지 않은 시간만으로도 ‘우는 자’의 슬픔과 ‘울지 않는 자’의 슬픔이 나뉘기도 합니다.


“이제는 울지 않는 자들과 새로 울기 시작한 자들 사이에서 봄마다 풀들은 푸르게 빛났다.” 이 슬픔과 저 슬픔 사이에 피는 ‘봄’을 떠오르게 하는 말입니다. 눈물로 봉분을 적시는 하염없는 슬픔에도 ‘봄’은 오고 ‘꽃’은 핍니다. 30년 지난 오늘은 슬픔보다 꽃이 먼저 보이는 ‘봄’이겠지만, 오늘 슬픔을 시작하는 이에게는 눈물이 전부겠지요. 그 눈물도 30년 지난 무덤 앞에서 ‘울지 않는 슬픔’으로 봄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작성자 : 이창순 목사(서부침례교회)
출처 : 맛있는 QT 문화예술 매거진 <와플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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