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목회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라브리의 증언: 프란시스 쉐퍼는 사라지지 않을 유산을 남겼...
by Dick Keyes
2024-05-23
프란시스 쉐퍼, 1912. 1.30. - 1984. 5. 15.프란시스 쉐퍼가 세상을 떠난 지 어언 사십 년이 지났지만, 교회와 이 세상에 그가 남긴 공헌은 여전히 살아서 우리 주변에 남아있다. 그의 유산은 무엇보다 저술과 녹음된 자료를 통해서 가장 분명하게 숨을 쉰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라브리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쉐퍼를 사용하셨고, 그의 사역을 축복하셨는지 오늘도 증명하고 있다. 쉐퍼와 아내 에디트는 1955년 스위스에서 라브리 공동체를 시작했다. 그 두 사람 외에는 라브리의 다른 누구도 대중에게 공개된 적이 없다. 그러나 라브리 사역은 1984년 5월 15일 쉐퍼가 사망한 이후에도 계속 번창했고, 현재 아홉 나라에서 활동 중이다. 라브리라는 유산을 곰곰이 생각하면 두 가지 주제가 떠오른다. 하나는 쉐퍼의 신앙이 드러내는 영적 진실함(integrity), 그리고 하나님께서 라브리를 통해 그와 에디트를 이끄시며 드러낸 뚜렷한 사역의 형태이다. 프란시스 쉐퍼와의 만남은 내가 막 대학을 졸업한 1964년, 당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나와 룸메이트가 우연히 라브리에서 그를 만났을 때로 돌아간다. 쉐퍼는 우리 둘에게 그가 수년간 하이킹을 즐기던 스위스 알프스에서 쉬는 날 함께 산책을 하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샌드위치를 들고 오전 10시에 그의 통나무집을 떠났다. 안개가 끼고 눈이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좋지 않은 시야 때문에 방향을 잘못 잡았고, 우리는 결국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정이 되어서야 론 계곡 아래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쉐퍼가 일대일 또는 우리 두 사람과 동시에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지도를 보면서도 길을 잃었다는 등의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나눈 것은 대부분 진지한 대화였다. 그는 상대주의와 불가지론으로 씨름하고 있는 우리의 말을 경청했고, 또한 우리에게 할 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야, 이거 우리는 완전히 낯선 사람들인데, 그런데도 이 사람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진짜 관심을 갖고 있네.’ 만약에 당신이 쉐퍼와 이야기를 나눈다면, 당신은 그가 온통 당신에게만 집중한다는 사실을 바로 알 것이다. 그날 나는 그의 영적 진실함을 본 것이다. 영적 진실성“영적 진실함”이 영적 완전함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이는 충만한 믿음을 실천하고자 하는 열망을 의미한다. 쉐퍼는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만 한다면, 진정한 실재가 무엇인지를 성경이 알려준다는 깊은 확신을 품고 있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우리 자신, 세상, 그리고 우리가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지적인 확신이 있었다. 그는 특별한 헌신으로 그 가르침을 구현했을 뿐 아니라, 감정적인 차원에서도 그 확신을 깊이 느끼고 실천했다.견고한 기초그러나 쉐퍼가 항상 깊은 믿음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겪은 궁극적인 변화를 1950년대 초반에 있었던 영적 위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그때의 일은 True Spirituality 서문에 잘 기록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삶과 미국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삶에서 용서, 사랑, 심각하게 부족한 기도 등을 포함해서 총체적인 실패를 목격했다. 그가 본 실패는 너무나 심각했고, 그 결과 자신이 믿었던 약속, 곧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당연히 일어나야 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약속이 참인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기독교 신앙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내용을 전체적으로 재평가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사역을 계속할 수 없었다.바로 그 시기부터 그는 기독교 진리에 대한 더 큰 확신과 현실에 대한 더 큰 경험을 가진 진정한 지도자로 탈바꿈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의 새로운 의미가 우리의 현재 경험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당시 겪었던 위기와 그 해결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내가 겪은 영적 위기가 라브리의 진정한 기반이 되었다. 역사적인 기독교의 대답을 가르치고 또 정직한 질문에 정직하게 답변하는 게 중요하다. 내 속에 있었던 치열한 영적 투쟁을 통해서 마침내 나는 현실을 보게 되었다. 영혼을 쪼개는 그 과정이 없었다면 결코 라브리와 같이 예리한 사역은 태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감 있는 의존쉐퍼 부부가 라브리를 시작했을 때, 그들은 그것이 어디로 이끌지 몰랐지만, 기독교의 영적 현실을 실천으로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종종 이전에 알던 기독교에 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성경에 기도응답과 성령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좀 빠지고 없었다고 해도,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라브리를 시작하면서 완전히 바뀌었다.그들은 하나님이 선교 단체로부터 받는 재정 후원을 중단하고 모금이나 광고도 전혀 하지 말라고 부르셨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오로지 하나님께 모든 필요를 채워달라고 기도했다. 사역에 필요한 사람들을 보내달라고, 또 다른 사람들도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응답하셨다.내가 처음 라브리를 방문했을 때의 기억은 알프스 하이킹 경험이 전부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쉐퍼 부부의 모습이었다. 말 그대로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들은 현실 세계에서 물질적 필수품을 얻는 정상적인 인간적 방법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식탁에는 항상 좋은 음식이 있었다. 그들이 보여준 진실함은 나로 하여금 그들의 믿음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했고, 나중에는 내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도록 도전했다. 라브리는 신앙의 진실함이라는 약속을 저버린 적이 없다. 그렇기에 내가 라브리에서 일한 지난 수십 년 라브리는 끊임없이 내 신앙에 도전이 되었다. 영적 진실함은 우리가 시작하거나 기존의 일하는 조직과의 관계도 포함한다. 쉐퍼는 정기적으로 하나님께 라브리를 축복하고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라브리가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도 돌아갈 정도로 잘 조직되고 자금이 풍부한 상태가 되는 일이 없도록,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상황을 하나님이 막아달라고 기도했다. 조직의 생존과 성장은 소중한 것이지만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브리의 뚜렷한 형태쉐퍼 부부는 라브리의 사역을 어떤 식으로 운영할지 미리 계획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함께 살면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소통하기를 원하는 누구에게나 문을 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께서는 유연성이라는 특징을 계속 유지하도록 라브리의 하부 조직까지 인도하셨다.우리는 아직도 라브리에 오는 사람을 ‘학생’이라고 부른다. 최소한 18세 이상이어야 하지만 나이에 상한선은 없다. 연령대가 다양할 때 가장 잘 작동한다.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오는 사람도 있다. 반면에 대학원 학위를 가진 사람도 있다. 그들은 짧게는 며칠에서 몇 달씩 머무른다. 학생들은 다양한 희망, 두려움, 불만, 관심, 헌신, 질문, 욕구를 가지고 라브리를 찾는다. 각 학생에게는 하루의 절반을 차지하는 개인 학습 계획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는 라브리 직원 또는 “직원”인 교사가 있다. 기독교 신앙은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다루는 주제의 범위가 넓다. 학습 자료에 대한 접근성을 확대하기 위해 우리는 대부분의 자료를 온라인으로 제공한다. 라브리 학생들은 하루의 나머지 절반을 함께 일하며 식사 준비, 관리, 청소, 정원 가꾸기, 세탁, 잔디 깎기, 장작 쪼개기, 운반하기 등 지역 사회의 유지에 필요한 일을 함께 한다. 누구나 맡은 일을 완수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공동체 의식이 강화된다. 우리는 보통 직원의 집에서 함께 식사한다. 라브리 초기처럼 모든 것이 공정한 공개 토론을 강조한다. 좋은 토론이 이어지면 자연스럽게 식사 시간이 길어질 수도 있다. 어떤 식사 자리에서나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이지만, 아닌 이들도 일부 있고,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모두를 환영한다. 우리는 의심, 어려움, 불일치에 대한 솔직함을 장려한다. 계속되는 강점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라브리의 환경을 사용하여 많은 나라의 새로운 세대에게 다가가고 계신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존중하는 주거 기독교 학습 공동체에는 영적인 힘이 있다. 진리를 찾는 사람들, 거기에 필요한 시간, 공간, 지도가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시간을 보낸다. 환대의 공동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깊은 질문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자비로 신앙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환경을 제공한다. 라브리(L'Abri)는 프랑스어로 쉼터를 뜻한다. ‘쉼터’라는 단어는 때때로 외부에 있는 크고 위협적인 세상으로부터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한 작고 안전한 장소를 떠올리게 한다. 작년에 각지의 라브리 공동체를 거쳐 간 수백 명의 남성과 여성 중 단 두 명만 언급하겠다. 사우스버로우에 온 그들은 각각 세속적인 학문 세계 그리고 기업 세계의 편협한 규칙과 가치가 가져다준 제한된 정체성 때문에 고통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라브리 경험은 그들을 ‘쉼터’라는 개념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이끌었다.두 사람 다 라브리 체류가 그들의 믿음의 기초를 다졌다고 말했다. 확장된 정체성을 가짐으로 그들에게는 이제 인간성을 위한 여지가 생겼으며,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우리는 많은 학생이 호전성과 소심함이라는 거짓 피난처를 피하면서도 얼마든지 겸손과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적인 세상에 더 잘 대처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불신과 외로움이 만연한 사회에서 라브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키우고 사람들 사이에 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세워가고 있다. 라브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사역하고 있다. 비록 쉐퍼가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의 유산은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 숨쉰다. 출처: Testimony from L’Abri: Francis Schaeffer Left an Enduring Legacy
켈러의 설교 시리즈가 나의 사역을 변화시킨 세 가지 방식
by Dan Warne
2024-05-21
팀 켈러, 1950.9.23. - 2023.5.19 신학자 고 팀 켈러와 고 에드먼드 클라우니가 공동 강의한 ‘포스트모던 시대의 그리스도를 설교하다’ 시리즈가 리폼드신학교와 복음연합에서 무료 온라인 강좌로 새롭게 출시됐다. 이 강의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큰 도움을 받았다. 십여 년 전 2세대 iPod Shuffle에서 들었던 버전보다 개선되어 나온 이 귀한 자료를 다시 소개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 이 강좌에서 켈러와 클라우니는 구속사적 설교를 능숙하게 탐구한다. 즉 불신자와 신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다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성경 전체에서 풀어내어 적용하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그 접근 방식이 새로운 건 아니다. 켈러와 클라우니가 보여주듯이 구속사적 설교는 성경적이고 또 역사적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전파 방법을 이렇게 요약했다. “선포한다. … 하나님의 모든 뜻을”(행 20:27).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고전 1:23)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관한 자료는 지난 50년 동안 크게 늘어났다. 그 과정에서 1980년대에 들어서는 클라우니가 새로운 세대에게 구속사적 접근 방식을 재도입하는 데 앞장섰고, 켈러가 1990년대와 그 이후 리디머 교회에서 이를 실행했다. 이런 배경을 가진 이 강좌는 구속사적 접근 방식의 기초 이론과 방법론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이번 강좌는 야심 찬 설교자와 경험이 풍부한 설교자 모두에게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나온 관련 내용 중에서 가장 중요한 현대적 접근 방식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이 강좌에는 내 설교와 동료 목사의 설교에 예수님을 끌어들임으로 설교를 탈바꿈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1. 켈러와 클라우니는 내가 평소 궁금했던 질문에 대한 답과 함께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에 대한 답까지 준다.이 강좌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막 성경대학을 졸업하고 캔자스의 작은 마을에서 개척한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당시 내 본업은 낮에는 지역 공장의 노동자였는데, 교대 시간이면 성경 전체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주제와 관련해서 찾을 수 있는 모든 MP3를 구해서 파고들곤 했다. 그러다가 켈러와 클라우니 강좌를 만났고, 그 과정을 통해서 미처 몰랐던 성경의 상호 연관성과 통일성을 발견했다.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당시의 관심사가 내 설교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건 알았지만, 켈러와 클라우니의 일련의 강의를 통해 조각조각 흩어졌던 내용이 하나로 합쳐지기 전까지는 아니었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구속 이야기의 통일성과 그것이 성경 전체에서 그리스도를 끌어내어 설교하는 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그 두 사람을 통해서 확실히 깨닫게 된 후에야 나의 설교가 바뀌었다. 기계를 작동하고 자재가 가득 담긴 트레일러를 내리는 내내 나는 강좌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다. 아무리 듣고 또 들어도 더 듣고 싶었다. 당시에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내용 중 하나가 이번 무료 강좌에 포함된 Q&A 세션이었다. 나는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에 관해 비슷한 질문을 하는 젊은 설교자가 나뿐만이 아님을 알았다. • “예수님이 모든 설교의 중심이라면, 모든 설교가 다 똑같아지지 않을까요?”• “물론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구약의 이런 저런 본문에서 예수님을 보았겠지요. 하지만 어차피 신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한 거 아닙니까? 우리도 그렇게 성경을 읽고 또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설교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이러한 접근 방식을 취하면 성경 해석에 너무 제한을 두는 거 아닐까요?”켈러와 클라우니는 이러한 질문과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을 포함한) 다른 질문들에 명확하고 우아하게 또 좋은 유머를 섞어 답했다. 나는 특히 오래된 클라우니의 갈비뼈 이야기와 켈러의 대답 중 일부의 코스 수정을 즐겼다. 켈러는 자신의 멘토인 클라우니의 의견에 항상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거의 항상 그가 말하는 포인트를 인정했다. 그들이 보여주는 개인적인 상호 협업은 그 자체로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다. 2. 켈러와 클라우니는 세상에 있는지도 몰랐던 귀한 자료를 알려준다.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가 점점 내 속에서 설득력을 가져갔지만, 문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강의는 그 방향을 제시했다. 켈러는 태연하게 말한다. “D. A. 카슨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럴 때면 나는 켈러가 언급한 참고 자료를 적는다. “나는 그 문제에 관해서는 그레이다누스(Greidanus)의 책을 읽습니다.” 그러면 내게는 또 하나의 읽어야 할 자료가 생긴다. 나는 지금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조금 전에 책장에서 꺼낸 많은 책이 사실상 켈러와 클라우니의 추천으로 구한 것이다. 여러분이 지금 소개하는 이번 강좌의 필수 및 권장 독서 내용을 숙지하길 바란다. 그렇게 한다면 당신의 사역은 정말 풍성해질 것이다. 3. 켈러와 클라우니에게는 내가 배워야 하는 경험이 풍부하다. 많은 기술과 마찬가지로 설교도 ‘가르치는’ 것보다는 ‘깨닫게 하는’ 부분과 관련이 크다. 내 설교는 켈러 또는 클라우니의 설교 형태와는 다르다. 모든 설교자가 다 다르고, 심지어 켈러와 클라우니도 서로 다른 형태의 설교를 한다. 그들의 목표는 그들의 스타일을 복제하는 클론 목회자를 양성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이 바란 것은 주님이 바라시는 모든 사역 상황에 적용이 가능한 통찰력의 제공이었다. 놀라운 맥락수년 동안 나는 쿠바에서 매일 라디오 방송과 섬 전역에서 열리는 설교 세미나를 통해 봉사했다. 내가 진행한 세미나의 기초는 클라우니가 강의에서 설명했던,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클라우니 삼각형”이었다. (쿠바의 상황에 맞도록 우리는 그리스도에서 설교에 적용함으로 이동하는 이 방법을 야구 다이아몬드로, 그래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야구”라고 불렀다.)아바나 외곽에 있는 나사렛 신학교에서 세미나를 마친 후, 한 현지 목사가 다가오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내가 평생 잊지 못할 말을 했다. “목사로 사역한 지 이십 년이 넘었지만, 성경 전체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방법을 나에게 보여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나는 지금도 그 순간을 소중히 여긴다. 지금 소개하는 강좌의 유산이 맨해튼 교회 개척이나 개혁 신학교 캠퍼스를 훨씬 뛰어넘어 바다 건너에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그리스도 를 전파함”은 예수님을 나의 설교에 넣었고, 이 쿠바 목사의 설교에도 예수님을 심었다. 이번 강좌가 재출시됨에 따라서 더욱 놀라운 곳에서 구속사적 방법의 재발견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출처: 3 Ways Keller’s Preaching Course Changed My Ministry
그리스도 중심 설교? 그리스도 형상 설교?
by 고상섭
2024-05-08
“아브라함 쿠루빌라는 구약 내러티브 본문에서 과도하게 그리스도와 관련된 의미를 찾으려는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을 지나치게 자의적인 신학이라 비판한다. … 쿠루빌라가 보기에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해석의 잠재적인 문제점은, 구약을 성급하게 신약과 연관 지으려는 시도 속에서 개별적인 구약 본문의 특정한 요지가 해석자에게서 소홀히 취급될 수도 있다. 그러면 결국 구약 본문에 대한 온전한 설교를 통해서 해석자가 청중에게 충분히 드러내야 하는 해당 본문만의 고유한 의미와 가치는, 과도한 신학적 해석 속에서 실종될 수 있다는 것이다.”[1] 최근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아브라함 쿠루빌라이다. 아브라함 쿠루빌라는 달라스 신학교 설교학 교수를 엮임했고, 현 남침례신학교 설교학 교수로 제직하면서 피부과 의사를 동시에 하고 있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그리스도 형상적 설교’를 제시한다.“그리스도 형상적 해석은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과 매우 다르다. 이 두 접근 사이의 주요 차이는 후자가 모든 구절, 구약 문단에서 명시적으로 그리스도를 찾지만, 그리스도 형상적 읽기는 하나님의 정경적 목적에 맞추어(롬 8:29) 모든 문단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그리스도의 형상-에 관한 암시적 묘사를 발견하는 것이다.”[2] 쿠루빌라는 설교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도록”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자신의 설교를 ‘그리스도 형상 설교’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스도(Christ)와 ‘형상’(Icon)이라는 단어를 조합하여 만든 이 단어는 설교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데 있다는 말이며, 고린도후서 3:18과 로마서 8:29 등을 근거로 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29)쿠루빌라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 비판 쿠루빌라는 에드먼드 클라우니, 브라이언 채플,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D.A. 카슨 등이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강하게 비판한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구속사의 큰 그림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성경의 목적은 단순히 그런 그림을 보여주는 수단이 아니라, 설교는 특정 텍스트의 특정한 메시지를 강해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하나님의 메시지와 신자들의 삶을 서로 연결하는 언어적 사건”이라 설명한다.[3] 또 에드먼드 클라우니가 말하는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는 명제도 비판한다. “모든 성경 장르는 구속사적 논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윤리적 교훈을 제시한다. 이러한 교회의 성경 해석 역사는 삶의 변화를 위한 설교의 풍요롭고 교훈적인 전통을 지지한다”라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성경의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개별 텍스트의 윤리적 강조점을 약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4] 정말,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쿠루빌라가 말하는 것처럼 윤리를 빈약하게 하고, 본문을 약하게 만드는가? 그렇다면 이제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닌 그리스도 형상 설교로 전환해야 하는가? 필자는 쿠루빌라의 비판이 정당한 비판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쿠루빌라가 말하는 ‘그리스도 형상 설교’가 무엇인지부터 먼저 살펴보자.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형상 설교’ 1)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아브라함 쿠루빌라는 설교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변화’이다.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목적을 독자의 변화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닮아감을 목표로 삼는다. 특히 쿠루빌라는 프랑스 철학자 폴 리꾀르가 말하는 ‘본문 앞의 세계’에 대한 이론을 자기의 성경해석 방법으로 수용했다. 총신대학원 설교학 김대혁 교수는 “쿠루빌라의 본문 앞의 세계에 대한 이해는 그의 설교 방법론에서 설교의 적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 설교는 본문 뒤의 세계만이 아니라 본문 앞의 세계를 비추는데, 여기에 본문이 투사하는 세계는 청중들을 향한 미래-적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5] 여기서 말하는 ‘본문 앞에 세계’라는 말을 쿠루빌라의 다른 저서 본문의 특권에서는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라는 용어로 설명했고,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라는 말은 성경 텍스트를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의도’ 즉 ‘보편타당한 원리’를 말한다. 만약 닭싸움을 시도하는 닭의 주인이 자신이 닭이 다른 닭을 물어뜯고 이길 때는 기분이 좋다가 자기 닭이 물리고 살이 찢기면 자신도 닭과 함께 극도의 분노로 치닫는다는 글을 읽는다면 텍스트 안의 세계는 닭이나. 사육사의 사건 또는 닭싸움을 위해 걸린 판돈, 그리고 치열하게 응원하는 장면일 것이다. 텍스트 뒤편의 세계는 텍스트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당시의 상황들을 연구하면서 알게 되는 세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는 닭싸움을 하는 글을 읽으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2024년의 지금의 독자들이 동일하게 느끼는 무엇에 관한 것이다. 즉, 닭이 이기면 함께 기뻐하고, 지면 함께 우울해지는 닭싸움을 하는 주인이 느끼는 남성적 자존심이다. 이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세계이다. 이솝우화에도 길거리에서 뼈다귀를 발견한 개가 다리를 건너다 개울물을 내려다보고서 자신과 닮은 또 다른 개가 입에 뼈다귀를 물고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벌려 짖다가 자기 뼈다귀까지 잃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브라함 쿠루빌라는 이 이야기를 통해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를 설명한다. “이 우화는 어떤 개와 뼈다귀, 그리고 개울물과 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우화는 단순히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교훈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이 우화의 저변에는 자족하면 어리석은 손실을 예방할 수 있다는 통렬한 교훈이 담긴 세계를 재현하면서 독자들도 그러한 만족의 지혜를 따르도록 안내한다.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는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적용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해석학적 진행의 개념적 프레임을 제공한다.”[6]쿠루빌라는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라는 개념을 통해 성경의 본문은 독자들에게 어떤 보편타당한 원리를 통해 삶의 변화를 주려는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독자는 단순한 텍스트의 의미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상 즉 보편타당한 신앙의 원리를 이해하고 적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2) 문단 신학 아브라함 쿠루빌의 설교에서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은 ‘문단 신학’(Pericopal theology)이라는 개념이다. ‘문단’이라는 말은 성경 본문의 일부분을 가리키는, 교회 상황에서 설교나 예전을 위해 다룰 수 있을 만한 정도의 분량을 의미한다. “성경은 쪼갤 수 없는 이어진 하나의 거대한 사상 덩어리로 구성된 것은 분명 아니다. 또 성경의 방대한 내용이 하나님과 그의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에 궁극적으로 기초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이 다양한 장르와 수없이 많은 문단 속에서도 이 추상적 주제만을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7]설교할 때 목회자는 모든 성경을 한 번에 본문으로 사용할 수 없으므로 매번 설교를 위해 일정한 본문을 다루게 된다. 쿠루빌라는 텍스트가 청중의 삶의 변화를 위해 말하는 적용을 그 일정한 본문을 나누는 기준으로 삼는다.“단순히 의미론적 차원에서 단락을 구분하여 이를 설교의 기본단위로 보고 거기에서 저자가 전달하는 내용을 설교의 핵심 재료로 삼기보다는, 기능적/화용적 차원에서 설교의 단위를 구분하는 것을 선호하고, 그 문단에서 성경 저자가 전하는 내용을 가지고 행하는 바를 신학적 추동력으로 삼아서 이를 설교의 주요소로 삼는다.”[8]쿠루빌라는 문단 신학을 통해 성경은 전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설교하는 각 문단은 그리스도 형상의 한 일면을 닮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설교를 들을 때마다 전체 그리스의 형상 중에서 한 일부분을 닮아간다고 생각한다. 만약 전 성경을 다 설교하고 듣고 순종한다면 그리스도의 완전한 형상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문단의 세계가 그리는 부분이 그리스도 형상의 일면을 나타낸다면, 통합된 본문 앞의 세계(즉, 각 문단이 투사하는 세계의 조각들을 모두 합친 것, 혹은 달리 표현하면 성경의 모든 문단의 신학 종합)는 완전한 그리스도 형상의 완성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점진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각 문단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형상에 그들 자신을 일치시키면서 한 문단, 한 문단, 한 설교, 한 설교에서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으로 이뤄진다.”[9]‘그리스도 형상 설교’ 비평 김대혁 교수는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 방법론에 관한 비평적 평가”라는 논문에서 쿠루빌라 설교에서 아쉬운 점 중의 하나를 자칫하면 단순히 ‘모범적 설교’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각 문단에 집중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는 그리스도 형상적 설교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마치 전체 그림이 없이 퍼즐을 맞출 수 없는 것처럼 전체 성경에서 보이는 그리스도 중심적 내용이 없다면 모범적 설교가 될 우려가 크다. … 기존의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이 개별 본문의 독특성을 경시했다면, 그 반대로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형상적 설교는 정경보다는 개별 본문의 구체성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김대혁 교수의 지적처럼 쿠루빌라의 ‘문단 신학’의 약점은 성경 전체가 온전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담고 있고, 각 문단은 그리스도의 형상 중의 일부분을 가진다면, 전체 성경의 온전한 그리스도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명확한 큰 그림이 없는 것이고, 각 문단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어떤 인격의 어떤 부분이 전체 그림 중의 어느 부분인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다는 것이다. 또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이고 각 문단은 그 전체 중의 일부라는 말도 명확한 성경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오늘 설교하는 본문에서 나는 그리스도의 어느 부분을 드러내는가? 어쩌면 쿠루빌라가 비판하는 ‘모든 본문에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보다 더 어려운 작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상’이라는 용어도, 성경의 텍스트와 오늘의 상황을 이어주는 ‘초자연적 의미’ 즉 ‘보편타당한 원리’를 말하는 것으로,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상’을 강조할수록 하나님이 텍스트를 통해 전달하려는 변화와 적용을 강조하게 되는데,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어떤 변화를 염두에 두고 변화를 촉진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인격을 드러내어서 그 인격을 만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목적이 삶의 변화라면 묵상할 때 반드시 적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묵상하는 목적이 삶의 변화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나는 교제라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삶의 변화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의 만남을 통해 사랑이 깊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이지, 노력하고 추구해야 하는 하나의 목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날 때 변화가 따라오는 것인데, 쿠루빌라의 이론처럼 변화를 강조하게 되어, 순서를 바꾸게 되면 자칫 율법주의로 흐를 위험성도 있어 보인다.‘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적용이 곧 ‘그리스도 형상 설교’이다서두에서 제시했던 아브라함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비판은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추구하는 모든 설교자가 깊이 새겨들어야 하는 지적이다. 쿠루빌라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보면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잘못된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비판이다.그리스도를 드러냈지만 적용하지 못하는 상황들이 발생하면 설교는 그리스도를 드러내긴 했지만 삶에서 아무런 적용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팀 켈러도 이런 적용이 없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해 우려 깊은 목소리를 냈다. “클라우니 박사님이 가르치신 대부분의 학생들이 경험하는 것처럼 박사님이 보여주신 비전을 실천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9년 동안 구약 성경을 설교하면서 저는 본문에 충실한 동시에 현실과 관련된 방식으로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라는 어려운 문제와 씨름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특정 본문의 주제를 어떻게 성취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 본문을 어떤 식으로 적용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 중심 설교 중에는 해석학적 측면에서 보면 건전하고 고무적이지만 그 본문이 우리가 평일에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도록 구상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남겨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뉴욕에 와서 리디머 교회를 개척하기 전까지 저는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고 그런 문제들에 답하는 저만의 방법을 찾아냈습니다.”[10]팀 켈러도 단순히 구속사 과정을 이야기하고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설교를 추구하지 않았다. 팀 켈러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복음으로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즉 칭의가 성화의 동기가 되는, 칭의와 성화가 연결되는 설교이다. 팀 켈러는 기존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한계를 ‘그리스도 중심 적용’으로 돌파했다. 스승인 에드먼드 클라우니로부터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배웠지만, 팀 켈러의 설교는 소위 구속사 설교가 비판을 받는 적용을 강화함으로써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 적용 설교’라고 새로운 이름을 붙여야 할 만큼 독자적으로 다른 영역의 설교이다. 팀 켈러는 ‘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여기서 ‘복음’이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 즉 칭의를 말한다. ‘모든 것’이란 삶의 모든 상황을 말하고 이 복음이 모든 것에 연결될 때 삶은 변화된다는 확신을 품고 있다. 센터처치에서도 복음을 자존감, 유머, 인간관계와 같이 다양한 영역에 적용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즉 아브라함 쿠루빌라가 추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사람은 팀 켈러가 말하는 ‘복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와 일맥상통하고, 진정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은 만들어 가는 과정이 바로 ‘그리스도 중심 설교’요 ‘구속사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팀 켈러는 설교란 진리를 특정 그룹의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인데, 진리를 마음에 와닿게 잘 전달하는 두 가지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설교의 두 가지 과업이라면, 이 둘을 완수하기 위한 하나님의 열쇠가 있다. 바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다. … 성경적인 정확성과 그리스도 중심성은 바울에겐 동일한 것임을 기억하라. 어떤 본문을 설교하든 그것의 주제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성취됨을 보여주지 않는 한, 우리는 그 본문을 제대로 설교할 수 없다.… 예수의 아름다움을 가리킬 수 없다면 다시 말해 그 본문의 특정한 진리가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믿음으로만 실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마음의 정감을 제대로 건드리고 변화시킬 수 없다.”[11]팀 켈러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선포하는 일 없이는 ‘마음의 정감’을 건드리고 변화시킬 수 없다고 단언한다. 여기서 ‘정감’(affection)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 감정론에서 차용된 단어인데, 인간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사랑을 뜻한다. 사람의 마음에는 감정(emotion)과 정감(affection)이 있는데, 사람의 변화는 ‘정감’의 변화로부터 이루어진다.삶의 변화는 ‘정감의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그 정감의 변화를 위해서는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선포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를 선포하지 않으면, 참된 변화가 어렵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눔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가난한 사람의 불쌍함을 자극할 수도 있고, 나눔을 하면 복을 받는다고 말하면서 나눔을 자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모두 감정의 변화에 불과하다. 의지에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나누는 삶으로 변화하려면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물질주의’가 깨트러져야 한다. “설교에서 우리는 그들 앞에 그리스도를 다시 드러냄으로써, 그들의 정감 안에 그리스도가 물질적인 것을 대체하도록 해야 한다. 합리적인 주장이나 교리적인 가르침만으로는 그렇게 될 수 없다. 물론 그런 것들을 포함하지만, 그와 함께 우리를 위해 자신의 부요함을 포기하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 주어야 한다.”[12]수련회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지만 돌아오면 여전히 삶의 변화가 없는 이유는 정감의 변화가 아닌 감정의 변화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정감이 변화될 때 삶은 변화되는데 그 정감의 변화가 일어나는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대한 선포’가 필요하다. 그래서 설교를 통해 진정한 삶의 변화가 일어나려면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필수적이다. 진정으로 그리스도 형상을 이루려면 “그리스도 형상적 해석의 핵심은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충족시키셨기 때문에 이에 관한 기록을 담은 성경의 모든 문단은 함축적으로 완벽한 인간이신그리스도의 형상의 한 면을 모범적으로 묘사한다.”[13] 아브라함 쿠루빌라가 추구하는 ‘그리스도 형상’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려면,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야 하고, 팀 켈러처럼 ‘그리스도 중심 적용’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대신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순종을 삶에 적용하며 나아가야 한다.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형상 설교’는 그리스도를 통과하지 않고 그리스도처럼 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으므로 이른바 도덕적, 율법적 설교와 차별성을 가지지 못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온전한 그리스도>에서 매로우 논쟁이 한창일 때 교회의 상황을 설명한다. 모두 동일한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복음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에 율법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는데, 그 핵심에는 “잘못된 분리”가 있었다고 말한다. 퍼거슨이 말하는 ‘잘못된 분리’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혜택을 분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돌아가셨다고 말할 때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의 사역을 서로 분리하여 전할 수 있다. … 복음의 혜택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마치 그분을 떠나서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그것과 그분을 분리할 수는 없다. … 마치 우리 힘으로 그리스도가 주시는 혜택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혜택을 그분과 분리하기 쉽다.”[14]싱클레어 퍼거슨이 말하는 분리는 ‘칭의와 성화의 분리’를 말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려면 먼저 그리스도가 선포되어야 하고 그 은혜가 순종으로 이어져야 한다. 결국 모든 성경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제시하지 않는 그리스도 형상을 따르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잘못된 분리’를 가져와서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 형상을 추구할 수도 있다. 결국 아브라함 쿠루빌라가 말하는 설교의 최종 목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은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쿠루빌라가 비판하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한계점은 팀 켈러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 적용’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어쩌면 아브라함 쿠루빌라의 비판은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 적용 설교’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기존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가진 한계를 팀 켈러는 ‘적용’으로 극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쿠루빌라가 말하는 ‘그리스도 형상’을 닮아가는 설교의 목표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쿠루빌라는 각 문단이 하나씩의 그리스도를 드러낸 윤리를 나타내고 그 윤리의 조각들을 하나씩 모을 때 완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한 번에 하나씩 윤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그분 자체에 대한 아름다움과 사랑을 경험할 때, 삶은 자연스럽게 변하게 된다. 설교의 첫 번째 초점은 삶의 변화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은혜를 공급받는 것이다. 사랑하면 삶은 변화된다. 삶의 변화를 위한 의지적 결단이 아니라, 사랑이 먼저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법을 살펴보면 그 앞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행하신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명령은 단순히 순종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 먼저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임을 알려준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면서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20:3)고 명하신다. 그러나 이 명령에 앞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20:2). 결국 십계명을 지키는 힘은 우리를 위해 먼저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다. 종살이하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께서 먼저 베푸신 은혜를 기억할 때 그 은혜가 순종의 동기가 되고 우리의 삶을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 살을 선포할 때, 그 은혜가 동기가 되어 순종으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과정이다. 즉 ‘그리스도의 형상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팀 켈러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 적용 설교’의 결과가 바로 ‘그리스도 형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 쿠루빌라가 비판하는 ‘앙상한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해서 우리는 늘 경계하고 자신의 설교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 형상 설교’는 아름다우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1. 이승진,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이후 아브라함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형상적 설교,” 설교 한국, 18(2023), 9-41.2.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p.203.3. 같은 책, p.399. 4. 같은 책, p.401.5. 김대혁. “Abraham Kuruvilla의 설교 방법론에 관한 비평적 평가.” 복음과 실천신학, 60(2021), 11-44. 6. 아브라함 쿠루빌라, 본문의 특권, p.73. 7. 같은 책, p.149. 8. 김대혁. “Abraham Kuruvilla의 설교 방법론에 관한 비평적 평가.” 복음과 실천신학, 60(2021), 11-44.9.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p.197.10. 데니스 존스,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p.80. 11. 팀 켈러, 팀 켈러의 설교, p.37.12. 같은 책, p.218.13. 아브라함 쿠루빌라, 본문의 특권, p.437. 14. 싱클레어 퍼거슨, 온전한 그리스도, p.57.
설교자여, 쉼 없이 회중을 사로잡는 설교를 갈망하라
by Trevin Wax
2024-03-26
몇 주 전, 나는 The Keller Center 설교 섹션에 목회자가 설교를 준비할 때 “모서리를 찾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모서리를 찾는 것은 다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성경 본문 속 전제, 태도 및 적용이 우리가 세상에서 “상식”으로 간주되는 요소와 어떻게 대조되는가? 이 본문이 세상적 또는 삶의 사고방식과 충돌하거나 대립하는 지점이 어디인가? 모순이 가장 날카롭게 부각되는 곳은 어디인가? 모서리 탐구는 설교자가 지나치게 길고 종종 지루한 설교에 안주하지 않고 교인들의 관심을 붙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설교에 매력이 있어야 한다거나 모서리를 찾아야 한다거나 하는 것을 타협의 길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인의 유익이라는 미리 정해진 조건에 따라 메시지를 전달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여라도 이런 접근 방식이 사람들이 꼭 들어야 하는 것보다 듣고 싶어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지나치게 신경 쓴다는 의미일까? 사람들이 느끼는 “필요”에 기초하여 설교를 작성하는 건 아닐까? “구도자에게 민감”해지도록 성경의 거친 부분을 깎아내거나, 설교를 “매력 있게” 만들려고 노력함으로 설교자로서의 신념을 희생하는 건 아닐까? 이런 우려를 함부로 일축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신약성경에도 가려운 귀를 만족시키려는 유혹을 받는 목회자의 모습이 등장한다. 오늘날에도 성경을 제쳐두고,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정치 또는 사회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을 결집하려 하거나, 복음과는 동떨어진 조언이나 제공하면서 건강하지 못한 방법으로 설교자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교인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설교의 목적이 인기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는 것이라면, 그런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얕고 피상적으로만 파악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견고하고 성경에 충실한 설교가 사람들을 지루하게 만들 리는 없다.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고, 내용의 심각성이 어조에 잘 반영되도록 열정을 담아 전달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 주석가의 영원한 관심사였으며 지금도 그렇다.유창함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On Christian Doctrine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썼다. 애정의 표현이라고 해서 반드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정해진 건 아니다. … 또는 반드시 다양한 담론이 듣는 이들이 짜증 내지 않고 주의를 집중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 동경하거나 회피하게 하는 마음을 만드는 것은 발명되는 게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존 카바디니는 그의 글 “The Sweetness of the Word”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접근 방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주요 목표는 단지 배운 것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을 감동”시키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건전한 가르침”을 제시받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기쁨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단순히 진실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르침이 “지혜”롭거나 “건전”한 경우라면, 거기에 유창함이 더해지는 것이 더더욱 중요하다. 설득이 목표가 아니라면 연설은 아예 할 필요가 없다. 몸을 더 강하게 만들지 않는 운동, 접시가 절반만 찬 식사, 쓴맛 때문에 환자가 삼킬 수 없는 약 등등, 이 모든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의학적 비유를 사용한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달콤하게 말하고, 현명하게 말하는 사람은 건전하게 말한다. … 그러나 치유의 힘이 있는 달콤함, 혹은 달콤한 치유의 힘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단맛을 더욱 간절하게 갈구할수록, 치유의 힘은 더 쉽게 발휘된다. 유창함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찬사는 교만에서 비롯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듣고 나가면서 교인들이 “저 설교자 참 대단하지 않니?”라고 말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그는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경험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 설교자의 메시지가 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을 더 잘 알고 진리와 더욱 사랑에 빠지도록 도움을 주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쉼 없이 흥미로울 것나는 설교하는 것을 좋아한다. 몇 년 전, 나는 우리 교회에서 초대 목사로 섬겼다. 2021년부터는 두 번이나 임시 목회직을 맡아 주간 메시지를 전했고, 또 전국 각지의 여러 교회나 콘퍼런스, 대학에서 설교할 기회가 있었다. 어디에서 설교하든 내 목표의 하나는 설교가 시종일관 흥미롭게 하는 것이다. 설교가 너무 흥미로워서 사람들이 주의를 집중하지 않는 게 힘들게 하는 것, 그러면서 그들이 계속해서 성경 본문을 보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면에서 설교가 쉼 없이 흥미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딴짓하는 게 집중하는 것보다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항상 잘한다는 건 아니다. 이 목표가 쉽지 않기에 나는 되도록 설교를 길게 하지 않는다. 이삼십 분 정도면 목표를 달성할 거 같지만(물론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 삼십오 분을 넘기면 아주 힘들어진다. 설교 길이에 관해서 물었을 때, 한 설교학 교수가 말했다. “정해진 길이는 없습니다. 교인들의 집중력을 잃지 않는 한도 내에서 설교하세요. 그런데 기억하세요. 설교자들 대부분이 자신이 실제보다 교인의 집중력을 십오분 정도 더 오래 잡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설교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의 하나는 신뢰할 수 있는 몇몇 출처로부터 피드백을 받는 것이다. 피드백 없이 발전은 힘들다. 교인들이 당신의 설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 당신이 과연 교인들의 주의력을 붙잡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나님과의 만남설교의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는 것이기에 설교 내용과 전달은 중요하다. 존 스토트는 모든 설교자의 열망에 대해 이렇게 썼다.설교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경험은 설교 중간에 회중에게 임한 이상한 침묵을 목격하는 것이다. 자던 사람이 깨어나고, 기침하던 사람이 기침을 멈추며, 산만하던 사람이 갑자기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 누구의 눈도 또 마음도 흔들리지 않는다. 모두가 듣고 있지만, 그들이 귀를 기울이는 대상은 더 이상 앞에 선 설교자가 아니다. 어느새 설교자는 잊히고, 교인들은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다. 팀 켈러도 비슷한 말을 했다. 설교가 기록할 가치가 있는 통찰로 가득 차야 한다는 건 맞다. 그러나 그 설교에 펜과 메모지를 다 제쳐두고 우리의 구원을 이룬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경외에 차서 멍하게 만드는 지점이 없다면, 결국에는 실패한 설교이다. 레이 오틀런드(Ray Ortlund)는 이렇게 상기시킨다. 설교를 듣는 것은 강의 듣는 것과 다르다. 그것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당신은 그의 영광을 보고 그것을 느끼고 변화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그에게 집중하고 설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다시금 주목하자. 사람들을 휘어잡지 못하는 설교는 자격이 없다. 우리가 정말로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길 원한다면, 설교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야 한다. 영광을 보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 영광에 걸맞은 설교를 하자.원제: Preachers, Aspire to Be Relentlessly Interest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당신의 설교에 ‘모서리’가 있는가?
by Trevin Wax
2024-03-19
THE KELLER CENTER 설교는 위대한 소명이다. 우리는 열린 성경을 들고 하나님의 백성 앞에 서서 성령의 능력으로 권면한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말씀을 연다. 정기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는 이 거룩한 책임에 대한 경이로움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메시지와 성경의 메시지가 일치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포한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주방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재료를 사용하여 거룩함의 성장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이다.우리는 약을 조제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질병을 완화하고 그들의 영적 건강을 향상시킬 수 있는 올바른 성분을 혼합하는 약사이다. 우리는 또한 경건한 삶을 위해 사람들을 훈련하고, 그들의 영적 근육이 강해지고 체력이 증가하도록 위로하고 도전하며, 그래서 그들이 믿음의 경주를 더욱 효과적으로 달리도록 격려하는 체육관 코치이다. 모서리 실종여기에 모든 설교자가 직면하는 도전이 있다. 청중의 주의를 끌고 사로잡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현재의 관심사와 제대로 연결하지 못할 때,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의 효율성은 감소한다. 성경적이지만 얼마든지 지루할 수 있다. 청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화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상태에서도 성경 본문은 얼마든지 해석될 수 있다. 식사는 분명히 푸짐했지만, 너무 밋밋해서 손님들이 음식을 반 이상 남긴 채로 자리를 뜬다. 우리가 조제하는 약에 환자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꼭 필요한 핵심 성분이 부족할 수 있다. 항상 쓰는 근육만 단련시키는 영적 훈련에 사람들은 당신의 메시지에 흥미를 잃고 들뜨기는커녕 오히려 지쳐 버린다. 이러한 도전에 맞서기 위해 나는 좋은 설교의 몇 가지 필수적인 측면을 지적할 수 있지만, 오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좀 다르다. 없을 때는 당장 눈에 띄지만, 있을 때는 그 즉시 설교를 짜릿하게 만드는 그것에 관해서 말하고 싶다. 나는 그것을 예리한 “모서리”(edge)라고 부른다. 좋은 설교자라면 이 경쟁력을 놓치는 법이 없다. 설교를 준비할 때 꼭 자문하라. 지금 내가 본문으로 삼은 성경 구절, 즉 거기에 담긴 전제, 태도, 적용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상식”으로 여겨지는 것을 어떻게 거스르는가? 이 본문이 세상의 사고방식 또는 삶의 방식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지점은 어디인가? 성경 본문과 세상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순이 가장 날카롭게 부각되는 곳은 어디인가? 모서리를 확보하라. 세상이 말하는 것과 성경이 말하는 건 전혀 다르다. 그 모서리가 분명해질 때까지 설교 준비를 마치지 말라. 바로 그 모서리가 당신이 준비하는 음식의 맛을 내는 양념이다. 바로 그 모서리가 당신이 조제하는 약을 만병통치약으로 만든다. 그리고 바로 그게 훈련받는 사람의 모든 근육을 사용하게 한다. 교인이 휴대폰을 보는 대신 설교에 집중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의 설교는 반드시 반문화적인 설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억하라. 성경은 단지 세상의 문화에만 반대할 뿐 아니라 우리가 교회 속으로 당연하게 갖고 들어가는 세상의 가정들(assumptions)에도 반대한다. 현대의 사고방식이 성경과 일치하는 부분,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부분을 보여줄 때, 성경 강해라는 드라마가 극적으로 고조된다. 단지 성경의 가르침을 알려주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왜 중요한지를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이 설교를 듣는 성도를 어떻게 세상에서 구분되게 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사례 하나몇 년 전, 나는 Cedarville University의 예배당에서 주기도문을 가지고 두 번 설교했다. 첫 설교의 초안은 나쁘지 않았다. 개요는 본문과 잘 연결되어 있었다. 설교 원고는 확고한 성경 주석을 바탕으로 신학적으로 건전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원고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뤄야 할 모든 기초가 담겨 있었지만, 리허설을 하는 내가 지루한데 그 설교를 들을 학생들이 몰입할 거라는 건 상상이 되지 않았다.더 많이 생각하고 기도한 후에 비로소 무엇이 빠졌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묻지 않았다. “모서리가 무엇이지?” 설교 메시지에 틀린 건 없었지만, 이 세상을 지배하는 거짓과 충돌하는 부분이 빠져 있었다. 일단 모서리를 찾기 시작하자 설교가 바뀌어 갔다. 나는 주기도문의 모든 구절을 다시 살펴보며 원래의 의미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더욱 예리한 적용을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지금 이 구절은 어떻게 세상의 상식 또는 교회의 현재 관행에 어긋나는가?• 아버지께 기도한다는 사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우리의 지나친 개인주의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하늘에 계신 분에게 기도한다는 사실이 하늘과 땅에 대한 대중적인 오해와 땅과 하늘의 관계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자기 이름이 영광 받는 것을 삶의 목적이라고 믿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독립과 자립을 중시하는 세상에서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등등모서리 탐색이 설교를 향상시켰고, 설교 이후에 몇몇 학생들은 내 설교가 그들의 기도, 특히 주기도문 암송에 미친 영향을 놓고 내게 연락하기도 했다. 문화적 서사 드러내기모서리를 찾는 한 가지 방법은 오늘날 서구의 지배적인 문화적 서사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팀 켈러의 작업이 필수적이다. 설교에 관한 책에서 그는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다섯 가지 믿음 또는 스토리를 설명한다. (1) 인간 합리성, (2) 역사, (3) 사회, (4) 도덕성, 그리고 (5) 정체성. • 합리성: 자연계가 유일한 실재이라는 관점은 오늘날의 기술 문화의 기초를 형성하며, 객관적이고 분리된 인간 이성(사회학, 심리학, 기술, 과학)만이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 역사: 세계 사건을 과학, 기술, 심지어 삶의 도덕적 영역까지 진보를 향한 전개로 보는 관점으로 조상들의 미련하고 퇴행적인 견해와는 달리 새로운 것은 무엇이든 더 낫다고 가정한다. • 사회: 우리 사회 질서의 목적이 어느 한 집단의 이익을 증진하거나 가치와 미덕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을 자유롭게 하는 데 있다는 견해이다. 다만 이 자유는 더 높은 목적을 위한 해방이 아니라,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부정적 측면을 강조한다. • 도덕성 또는 정의: 인권과 정의를 위한 노력은 하나님의 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창조한 도덕적 세계와 일치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 정체성: 정체성은 외부(의무 또는 공동의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순응을 요구하는 외부 제약에 반대하여 나 자신을 찾고 표현하는 내부에서 기인한다는 견해이다. 이러한 서사를 식별하는 것은 성경과 사회 사이의 날카로운 구분선인 모서리를 더 잘 찾는 데 도움을 준다. 주의 사항모서리를 찾는 이유가 세상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켈러는 복음에 흠뻑 젖은 설교가 교인들에게 “전투라기보다는 탈옥”처럼 느껴져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문화적 서술의 허위를 드러내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은 지금 아예 실행 불가능한 약속을 남발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진단된 모서리 이후에 제시되는 약은 안도감을 가져다줄 것이다. 모서리를 찾는 것이 “우리 대 그들”의 대결 구도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마치 성경이 교회 밖의 모든 사람을 대적하고, 그 결과 교인들은 독선이 주는 안도감을 느껴도 된다는 오해를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사회에서 상식으로 통하는 문화적 내러티브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친구 또는 이웃과 똑같은 공기를 마시고 산다. 예를 들어, 켈러가 언급한 정체성 서술에는 표현적 개인주의, 즉 삶의 목적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고 표현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들어있다. 이것은 단지 저기 딴 세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복음이 필요한 것처럼 (불신자는 구원을 위해, 신자는 성화를 위해) 신자와 비신자 모두에게 “모서리”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도 얼마든지 세상 철학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또한 모서리를 찾는다는 것은 모든 설교가 다 동일한 세상적 관점에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설교를 주도하는 것은 문화가 아닌 언제나 본문이다. 모든 설교가 언제나 한두 가지 동일한 문화적 서사에 반대하는 틀에 박힌다면, 교인들은 더 이상 설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상식이나 현재의 교회 관행을 역행하는, 성경의 다양한 방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매주 설교 준비에서 반박해야 할 현대 사상과 실천 분야를 단 한두 가지 식별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성경 공부와 더불어서 상당한 수준의 문화적 주석 연구까지 수행해야 할 것이다. 특효약은 없다그렇다고 모서리 탐구가 효과적이고 매력적인 설교를 위한 유일한 기술은 아니다. 성경적 충실성, 탄탄한 구조, 꾸준한 속도, 좋은 일러스트레이션, 목소리의 다양성과 같은 다른 많은 요소가 다 중요하다. 그러나 모서리 탐구는 오늘날 우리 세계와 성경의 필요한 만남을 촉진함으로써 설교를 향상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준비할 때 회중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영은 말씀을 마음에 적용하는 분이시다. 우리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성령은 하늘의 음식으로 우리를 살리신다. 성령은 하늘의 약을 내려주신다.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동안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 우리는 성령을 의지하여 모서리를 탐구한다. 그리고 그분이 살아서 움직이는 말씀의 검을 휘두르실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원제: Find the Edge in Your Preach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스펄전, 그는 사실 청소년 목회자였다
by Will Standridge
2024-03-15
스펄전이 청소년 사역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청소년 목사였다. 그가 목회한 메트로폴리탄 태버내클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학생 사역이 없었다. 하지만 스펄전은 그들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품고 자주 글을 썼으며 다음 세대를 위한 사역의 중요성과 실용성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스펄전은 십대 시절에 회심하여 목사가 되었다. 그는 글과 설교에서 일관되게 다음 세대를 고려했다. 목회자라면, 맡은 부서에 상관 없이 청소년 사역에서 무엇을 강조해야 하는지를 스펄전에게서 배워야 한다. 부모의 책임스펄전은 자녀의 신앙 형성에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았다. 그는 부모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녀에게 구주의 필요성을 가르치는 일을 주저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그는 또한 단지 예의에만 신경 쓰고, 복음이 가져오는 진정한 변화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겉만 번지르르한 신앙”을 경고했다.스펄전은 부모에게 신명기 6장의 명령을 수행하라고 말했다. 자녀 양육의 최전선에 지속해서 복음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아이의 자존감을 키우거나 도덕적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 이상을 의미했다. 무엇보다 죄와 중생의 필요성에 관한 솔직한 대화가 있어야 했다. 스펄전은 이렇게 썼다. “자녀에게 너는 타고난 본성이 선하니까 발전만 좀 하면 된다는 식의 망상에 가까운 헛소리로 아첨하지 마십시오. 복음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하세요. 행여라도 자신이 죄가 없다는 식의 환상에 아이가 빠지는 일이 없도록 아이에게 그의 죄를 보여주십시오.”스펄전은 부모의 역할에 대한 지침을 교회의 젊은이에게까지 확대했다. 그들이 부모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경건한 모범의 가치를 인식하도록 격려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영이 지혜로운 자의 입을 통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들어 보십시오. 나는 진리의 종교가 모범을 보이는 부모를 통해서 전해지는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고 싶습니다.”젊은이를 훈련하라는 부름을 받은 목회자젊은이의 영적인 삶을 양육하는 데서 부모의 주된 역할을 강조했던 스펄전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목회자의 책임을 무시한 건 아니었다. 그는 모든 목회자가 청소년의 제자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장 훌륭한 교인조차도 이 사역을 맡기에 완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다른 사역이 있다고 해도, 청소년 사역이라는 거룩한 소명을 외면하면 안 됩니다.” 스펄전은 “내 양을 먹이라”(요 21:15)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로운 그리스도인과 어린아이의 영적 양육을 우선시하라는 부르심으로 해석했다. 그는 목회자가 특히 젊은 성도에게 세심하고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기를 원했다. 이런 목회적 사명은 단지 신입 목회자를 위한 디딤돌이 아니라 목회자라면 누구나 중심으로 삼아야 할 과제이다. 청소년 목회에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스펄전은 단순한 오락을 피하고 청소년을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키우는 데 필요한 지도와 멘토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목회자에게 다음 세대를 향한 가장 큰 격려자가 되라고 촉구했다. 무엇보다 그들이 젊은 신자의 초기 신앙 여정과 관련해서 의구심을 갖지 말라고 했다. 의심이나 회의 없는 영성을 키움으로써 목회자는 교회 공동체에 엄청난 축복을 가져올 수 있다.아이를 교리로 훈련하라스펄전에게 차세대 사역 환경의 목적은 어린아이를 단지 “질서 있게” 유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단순한 교리에 그치지 않고, 분명하고 확신에 찬 복음 교리의 학습을 우선시했다. 그에게 모든 교리는 다 어린이의 영적 발달에 필수적이었다. “왜 더 수준 높은 교리, 즉 은혜의 교리를 그들로부터 멀리해야 합니까? 진정으로 회심한 어린이에게, 단지 그가 어린이라서 너무 어려운 교리가 있을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어린이에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교리에 대해서 교사가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렇다고 청소년 사역이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강의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교리를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작업의 주요 부분이 될 것입니다.” 설교의 왕자라고 불린 그의 심장은 교리적 명료성에 대한 사랑으로 고동쳤고, 그리고 그 열정은 젊은이를 향한 설교로 이어졌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교리를 믿어야 합니다. 그것들이 얼마나 활력을 불어넣는지 … 은혜의 교리를 굳게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사탄은 곧 당신에 대한 공격을 포기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화살도 뚫을 수 없는 판금 갑옷과 같기 때문입니다.재미가 중요하고 교육이 뒷전으로 밀린 미국 교회는 스펄전의 가르침으로 교정되어야 한다. 그는 우리에게 부모의 의도, 목회적 돌봄, 청소년의 건전한 교리 교육을 방해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어린 양”을 먹일 때 학생들은 주님에 대한 지식과 열심에서 자랄 것이다. 오늘날 젊은이 사역자의 모델사역이 분명하게 구분된 시대에는 내가 맡은 교인만 책임지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스펄전은 목회자라면 모든 교인을 다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전방위에 걸친 스펄전의 목양과 교리 교육은 우리에게 훌륭한 역사적 모델이 된다. 모든 지역 교회 목사와 장로는 자신이 돌보는 청소년을 (다른 사람이 목회할) 내일의 교회가 아니라 오늘 내가 목회하는 교회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부모를 목양하는 데 그치지 말고 자녀를 제자로 만들기 위해서 그들과 동역해야 한다. 그렇기에 설교는 단지 어른만이 아니라 가족 전체를 향한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목회 철학이 가능하기 위해서 목회자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삶에 직접 뛰어들기 위한 시간을 따로 떼어놓아야만 한다. 격려가 필요한 십대, 어려움을 겪는 십대, 교리 교육을 받는 새 신자 어린이, 그리고 신앙 간증이 가능한 성숙한 청소년을 찾아라. 그들에게 성경의 깊은 진리를 가르치는 일을 주저하지 말라. 당신이 씨름하는 수준 높은 신학 개념을 절실히 듣고 싶어 하는 5세, 10세, 그리고 15세 어린이에게 어떻게 전달할지를 놓고 고민하라. 그리고 당신의 교회에 전임 청소년 목사라는 축복이 있다면,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를 전폭 지원하고 성공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제공하라. 젊은이를 돌보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 아니다. 시간을 초월한 것이다. 그러므로 스펄전의 지침을 따르자. 당신의 사역 타이틀에 ‘청년’이라는 단어가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다. 목사라면 맡은 부서와 관계없이 교회 전체를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청소년이 포함되어 있다. 원제: Spurgeon the Forgotten Youth Pasto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사모를 그만두고 싶을 때
by Glenna Marshall
2024-03-14
작은 시골 교회 목회를 위해 다른 주로 떠날 때, 우리 부부를 파송한 목사는 우리가 앞으로 사역지에서 겪게 될 고통을 잘 이겨내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당시 나는 그가 왜 그런 기도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그는 우리가 어떤 고통을 만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 목사 부부에게 교회보다 안전한 곳이 어디 있다고 그런 기도를 한 걸까?그건 거의 20년 전의 일이다. 만일 내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과거의 내게 충고할 수 있다면, 목사에게 지역 교회보다 더 큰 슬픔을 가져다주는 곳은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역 중에 겪는 모든 고통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도 덧붙일 것이다. 아군이 쏠 때 가장 아프다사역이 십 년차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 부부는 모든 것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목회는 힘들었고 삶의 다른 부분으로 도무지 풀 수 없는 정서적, 영적인 부담이었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에 교회에서 친구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교회에 충성하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떠났다. 방법론에 대한 비판은 거의 언제나 인신공격으로 이어졌고, 남편에 대한 사람들의 안 좋은 이야기는 어김없이 내 귀에 들어왔다. 각종 댓글과 불만이 나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내가 느낀 고통은 잔혹했다. 목회라는 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 알고 나는 놀랐다. 교회가 하나의 가족이다 보니 형제와 자매가 입히는 상처는 깊을 수밖에 없었다. 교회가 혼란을 겪던 초기에 안식년 중인 한 선교사가 우리집에 머물렀고, 우리는 그에게 당시 겪던 어려움을 일부 나누었다. “아군이 쏘는 총이 가장 큰 상처를 줍니다.” 그가 말했다. 자신도 선교지에서 복음에 적대적인 사람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교회 내에서나 다른 선교사가 일으키는 문제만큼 상처를 주는 것은 없었다고 고백했다. 사람들이 복음으로 연합하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서로 화목하게 된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하고 “형제 우애”(롬 12:10)로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믿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맞서면 하나님이 이루신 화해가 무너질 위험에 처한다. 가장 안전하고 가장 사랑을 느껴야 할 곳이 가장 무서운 곳으로 바뀔 수도 있다. 바로 그런 일이 내게 닥쳤다. 교회가 나에게 두려운 곳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떠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슨 방법을 찾아서라도 나도 예수님처럼 교회를 사랑해야만 했다.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신다신약 전체에 걸쳐서 신랑으로 불리는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그분은 교회를 아버지 앞에 순수하고 흠 없는 신부로 올려드릴 것이다(엡 5:27). 교회가 예수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기 위해서 바울은 결혼을 비유로 사용했다. 그분은 교회를 새롭고 의롭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바치셨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의 죄로 인해 교회에서도 서로간의 관계가 손상될 수 있지만, 교회는 믿음의 성화와 인내를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중요한 수단 중 하나이다. 교회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히 10:25). 애초에 서로 관계 없던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로 모으시고 각각에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준비한 사랑의 선물이 교회이다. 교회는 우리를 성화시키고, 가르치고, 훈련하고, 또 격려하는 은혜의 수단이다. 바울은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십시오”(살전 5:14)라고 썼다. 그리스도의 몸은 방황하는 자들을 보호하고, 슬픔에 잠긴 자들을 위로하고, 가난한 자들을 공급하고, 모든 사람을 가르친다. 요한은 신자에게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순종을 실천하라고 거듭 촉구하며 그런 사랑이야말로 그들을 세상과 구별한다고 여러 번 지적했다(요 13:35; 요일 4:20-21; 5:1).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고 친절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상대방의 선의를 전제하고, 서로를 은혜로 인도하며, 어려움 겪는 사람을 참아주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를 사랑하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순종이야말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교회는 상처를 주지만 또한 치유한다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교회는 10년의 혼란을 극복하고 치유의 과정에 들어갔다. 그 무렵 나는 처음으로 복음연합 여성 대회에 참석했다. 나는 ‘교회 상처’를 다루는 소그룹에 등록했고, 재키 힐 페리(Jackie Hill Perry)의 “하나님은 교회를 사용하여 교회의 상처를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에 눈물을 흘렸다. 내게 그토록 깊은 상처를 준 바로 그 교회에서 치유가 가능할까? 나는 믿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사랑하라고 부르신 그 몸을 사랑하겠다는 새로운 열정을 갖고 교회로 돌아갔다. 교회 가족이 더 가까워지고 다시 서로를 신뢰하는 법을 배우면서 나는 오늘까지 변함없는 깊은 우정을 하나씩 시험적으로 만들어 갔다. 우리 부부는 곧 우리 교회 모든 가족과 함께 19주년을 축하할 예정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위해 선한 목적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증언하는 산 증인이다. 그분은 사역 중에 고난을 받도록 우리를 부르실 수도 있고, 우리에게 신실한 인내를 가르치기 위한 교훈을 갖고 계실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 모은 게 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 가족을 사랑하는 기쁨은 슬픔보다 훨씬 크다. 우리가 항상 옳은 일을 할 수는 없지만, 때가 되면 우리를 아버지 앞에 순결하고 흠 없이 세우시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만은 언제라도 굳게 붙잡을 수 있다.원제: When the Pastor’s Wife Wants to Qui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사물인터넷 시대의 목회
by 전재훈
2024-03-04
나는 식물에 관해서는 완전 문외한이다. 화분을 선물 받으면 100퍼센트 죽게 된다. 그래서 교회 안에 식물은 이미테이션만 존재한다. 꽃꽂이도 싫어한다. 무엇인가가 내게로 와서 죽어가는 것이 너무 싫다.시대는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꽃의 정보를 내가 알아보고 관리해야 했지만, 이제는 일방 소통의 시대가 종식됐다. 꽃을 파는 사람이 꽃에 대한 정보를 화분에 팻말 형태로 전달한다. 꽃 주인의 배려로 꽃의 이름과 물 주는 시기, 관리 방법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이 시대는 스마트한 시대이다. 화분에 팻말이 아닌 태그가 붙어있고 거기에 스마트폰을 갖다 대면 꽃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는 스마트링크 기능을 통해 스케줄화 시킬 수 있으며, 알람 기능을 통해 물 주는 시기와 흙갈이 시기를 통보받을 수 있게 된다. 시기를 놓쳐 식물을 말려 죽이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앞으로의 시대는 더욱 광범위한 소통의 시대가 된다. 즉 사물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다자간 소통이 가능해진다. 화분에 심어둔 센서가 꽃의 특성에 따라 흙의 상태를 파악해 주인에게 알려주게 된다. 물이 필요한지, 비료가 필요한지 즉각적인 안내를 해 준다. 가끔 교회에서 물을 이중으로 주어 꽃을 죽게 만드는 일 따위는 없어진다. 어느 정도의 물이 필요한지, 화분 온도는 어떤지, 앞으로는 화분이 내게 말을 거는 시대가 올 것이다. 사물인터넷 시대의 다자간 소통은 화분이 스프링클러에게 대화하고, 전기스토브에게 말을 걸게 된다. 스프링클러는 화분의 요구에 따라 물을 정확하게 줄 것이고, 전기스토브는 온도를 조절해 줄 것이다. 나는 화분의 꽃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는 것을 보게 되진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물인터넷 시대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상용화되어 있어서 비닐하우스 농장에서는 현재 사용 중이다. 예전처럼 일일이 하우스마다 들어가 온도를 체크하고 습도를 조절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저 심어 두고, 때가 되어 거두기만 하면 된다. 꽃에 말을 거는 친구들을 4차원이라고 놀렸던 기억이 있다. 나 역시 사물에게 말을 걸었던 적이 있다. 아이들을 낳아 키우면서 사물의 인격화 놀이를 많이 해 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진짜 사물과 대화하는 날이 오고, 사물 간에 소통하는 일이 생겨난다. 밤이 되면 장난감들이 상자에서 나와 서로 놀다가 사람이 나타나면 상자 속으로 숨어 버리는 상상이 더 이상 상상만은 아닌 시대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신학적인 생각 속에는 자연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믿음과,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 있다는 믿음까지 있었다. 자연은 우리가 숭배하는 대상이 아니었지만, 은혜를 받고 나면 자연 속에 담긴 하나님의 능력과 아름다움과 신비를 보고 찬양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런 사상은 모든 사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과 종이 한 장 차이로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사물인터넷 세상이 온다면 자연 숭배 사상이나 범신론 같은 것은 더 이상 그 의미를 발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물인터넷 시대가 되어 다자간 소통이 일어나면 신의 능력보다 과학의 능력을 더 많이 신뢰하게 될 것이고, 영적 영감보다는 객관적 데이터를 가진 빅데이터가 그 빛을 더 크게 발휘하게 된다. 이럴 때 앞으로 우리의 자녀들은 모든 사물을 통해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 과학을 생각하게 되고, 기도에 의지하기보다 정보에 의지하는 이들이 될 것이다. 이는 분명 신학의 큰 도전이 될 것이고, 시대에 맞게 신학을 재정립해야 할 때를 맞게 될 것이다. 분명 과학의 발달은 인류를 윤택하고 편안하게 해 주었다. 쓸데없이 고민하는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고, 천형 같았던 많은 질병도 극복하게 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과학에 의지해 살아갈 것이다. 이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게 될 것이고, 이런 현실들을 직시하여 목회를 다시 점검해 봐야 할 시기가 되었다. 사물인터넷 시대가 되면 교회의 현장에서도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의자에 앉기만 해도 당일 출석수를 예배 중에 실시간으로 인지하게 될 것이고, 주차장의 효율성을 높이게 될 것이며,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막는 등 아주 효과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신학과 목회를 미리 정립하지 않으면 과학을 통해 힘과 에너지를 절약하듯 교인 수도 절약하게 될지도 모른다.
기도하기 위해 설교하라
by 최창국
2024-02-28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는 어떻게 실행돼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설교자에게뿐 아니라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교회에서 주로 행해지는 대부분의 설교는 연설 형식의 설교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대형 교회에서는 연설식 설교가 행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지만, 소수의 성도가 예배하는 상황에서도 연설식 설교만을 지향하는 설교자나 목회자가 많다. 이는 설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문화에서 연유한 측면도 있다. 설교는 원래 일방적 연설식 설교 방식이 아니라 대화가 있는 설교, 호밀리아(homilia)였다. 따라서 설교와 관련된 용어들을 통해 설교의 여러 의미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첫째, 설교를 지칭하는 최초의 용어는 호밀리아이다. 이 단어는 ‘서로서로 이야기하다’라는 뜻을 가진 호밀리엔(homilein)에서 파생된 명사로 2세기경 폴리캅(Polycarp)에게 보내는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서신에서 처음 발견된다. 호밀리아로서 설교는 ‘회중 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지칭하는 전문어’로 형식적으로는 성경 본문을 순서대로 강론하는 강론식 설교(homily)에 해당한다. 호밀리아로서 설교는 주로 교훈의 말씀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것은 초대 교회 당시 이단의 발현으로 인해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설교와 관련된 또 하나의 용어는 프래디카치오(praedicatio)이다. 이 용어는 4세기에 이르러 라틴어가 예배의 공식 언어로 확정되면서 호밀리아가 락탄티우스(Lactantius)에 의해 프래디카치오라는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이 용어는 ‘공적으로 알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때부터 예배 가운데 행해지는 회중 설교를 지칭할 때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오늘날 영어권에서 설교를 가리키는 단어로 쓰이는 프리칭(preaching)은 ‘프래디카치오’로부터 연유되었다. 셋째,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설교와 관련해 등장한 용어가 세르모(sermo)이다. 이 용어로부터 파생된 설교가 오늘날 주로 행해지고 있는 연설식 설교(sermon)이다. 연설식 설교는 로마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 예배 참여 인원이 많아지면서 대화식 설교 또는 강론식 설교보다 연설식 설교가 주로 행해지기 시작했다. 기독교 역사에서 중세에 이르러서는 연설식 설교가 성경 말씀에 기초해서 행해지기보다는 설교자의 관심과 회중의 흥미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서 주제 설교가 주로 행해졌다. 넷째, 종교개혁 시기에 이르러 설교를 지칭하는 용어가 종교개혁자들의 말씀 이해에 근거해 새롭게 제시되었는데, 바로 콘치오(contio)이다. 이 용어는 예배에서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와 관계된다. 콘치오 형태의 설교는 예배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중세 교회의 공 예배에서 성찬 예식에 비해 이차적인 위치에 있었던 말씀 예전이 다시 중요한 위치를 되찾게 되었고, 설교자들의 관심과 회중을 만족시키는 데로 흘러갔던 설교를 다시 성경 말씀에 근거해 행해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다섯째, 설교의 내용과 관련하여 신약성경에 나오는 단어로는 케리그마(kerygma)를 들 수 있다(롬 10:17; 16:25; 고전 2:4; 골 3:16). 복음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설교의 가장 근본적 그리고 원형적 개념으로 예수의 생애, 고난, 죽음, 부활로 인해 인간에게 가능하게 된 부활에의 기쁜 소식을 말한다. 여섯째, 케리그마와 함께 선포의 핵심 요소로 등장하는 단어가 디다케(didacke)이다. 이 단어는 케리그마와 함께 예수의 마지막 분부를 포괄하는 것으로 예수의 제자들에게 내리신 명령은 이중적인 것으로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눅 9:60)는 것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는 것이다. 디다케는 회당적 의미에서의 교육(마 4:23), 선교(행 4:2), 기독교 교리의 요약(딤후 4:3)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특히 이 용어는 설교가 추상적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고 인간의 삶과 깊은 연관이 있는 차원이어야 함을 내포한다. 일곱째, 설교와 관련하여 또 다른 용어는 세례받은 회중 가운데서 행해지는 말씀을 지칭하는 파라칼레오(parakaleo, 고후 5:20)이다. 이 용어는 신약에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삶의 실천과 관련한 의지와 행동으로서 ‘권고’(롬 12:1)와 신앙의 토대로서의 확신을 근거한 ‘위로’의 의미가 있다(고전 1:6). 설교는 말씀을 통한 위로의 성격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의미 있게 논의되고 있고 상담 설교를 보다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실행할 필요가 있다.물론 케리그마와 디다케와 파라칼레오는 기독교 초기에 설교가 어떤 내용을 주된 메시지로 취급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용어들은 설교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이기보다는 설교의 내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용어들을 통해 설교의 주된 방향과 기능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기독교 역사에서 광의적인 차원에서 설교는 대화식 설교 또는 강론식 설교와 연설식 설교가 주로 행해져 왔다. 따라서 두 유형의 설교의 목적과 구조와 방법을 이해하는 것은 설교자들에게 중요하다. 이 두 설교 유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연설식 설교와 대화식 설교 또는 강론식 설교의 목적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나누는 데 있다. 둘째는 하지만 설교 실행의 구조적 차원에서 차이가 있다. 연설식 설교는 좀 더 구조화된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강론식 설교는 비형식적이고 대화적일 수 있다. 셋째는 연설식 설교는 듣는 사람에게 영감을 주거나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것일 수 있으며, 강론식 설교는 성경 텍스트를 설명하거나 대화를 통해 해석하는 데 있다. 강론식 설교는 대화를 통한 말씀 이해에 더 집중하는 것이다. 강론은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말하지 않고 토론 또는 대화를 통해 어떤 주제나 내용을 탐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강론식 설교란 설교자가 성경 말씀을 일방적으로 전하며 연설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 형식의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조셉 피츠너는 설교를 “기독교적 삶에 관한 대화”로 설명하면서, 설교와 대화를 서로 연결하였다. 헬라어 호밀리아(homila)에서 파생한 호밀리(homily)는 ‘익숙한 대화’(familiar conversation)란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걸어가면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과 같은 대화이다(Joseph Fichtner, To Stand and Speak for Christ: A Theology of Preaching, 124). 설교를 설교자와 회중 사이에 진행되는 대화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누가복음 24:14에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나눈 대화와 사도행전 24:26에서 바울과 벨릭스 총독 사이의 대화를 사례로 든다. 설교를 대화로 보는 사람들은 이 두 사례에 근거하여 호밀리아는 때로는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연설이나 강의보다는 대화에 더 가깝다고 이해한다. 그러한 대화의 목적은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거나 상대방의 태도나 행동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이전에 갖고 있던 지식이나 태도를 더욱 명백히 나타내거나 강화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설교자와 회중은 하나님 앞에서 함께 신자로서의 공통의 정체성을 공유한다.조지 스웽크는 대화식 설교는 1세기 유대인들의 설교로부터 그 역사적인 선례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유대인들의 설교에는 회중이 함께 참여할 수 있었고, 질문과 웃음, 돌연적인 비평과 다른 여러 형태의 개입이 가능했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신약성경에 기록된 설교는 마치 논쟁과 비슷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 증거로 누가복음과 특별히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설교의 대화적 패턴을 제시하면서 이렇게 결론한다. “기독교 설교가 시작되는 첫 단계에서부터 설교는 모든 회중이 함께 참여하는 활동으로 여겨졌었다. 당시 설교는 그 자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의 업무였다”(George W. Swank, Dialogic Style in Preaching, 23, 46-49). 설교를 설교자와 회중의 대화로 이해한다는 의미는 설교자와 회중의 연대감, 즉 신앙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함께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 그리고 만인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분별하고 함께 선포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설교를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대화로 이해한다고 해서 예배 중에 설교자뿐 아니라 예배 참가자들이 모두 다 말하거나 선포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를 들어 좌담 설교(dialogue sermon)나 상호 대화 설교(interactive sermon)는 대화 설교를 위한 한 가지 방식일 수 있지만, 대화 설교가 좌담 설교 같은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니다. 대화 설교는 설교자가 신앙과 삶의 문제에 대해 전부 알고 있는 자가 아니라 회중과 동등한 동료의 관점에서 설교자와 회중이 함께 지속적인 대화를 키워가면서 이를 반영하는 설교를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대화 설교가 추구하는 핵심은 교회 공동체의 대화를 촉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대화 설교가 촉진하는 중심적인 대화는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대화뿐 아니라 교회와 그 안의 여러 구성원 간의 대화, 사람들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상호 대화, 그리고 설교자와 회중과 하나님 삼자 간의 대화이다.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연구해 설교문을 작성하여 일방적으로 회중에게 연설식 설교로 마치는 것은 바람직한 설교라고 할 수 없다. 교회는 설교의 원래 의미와 방식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설교는 원래 대화를 통한 복음 이해와 나눔 성격이 강하다. 설교는 설교자와 회중, 회중과 하나님 사이의 대화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과 대화로 이끌지 못한 설교는 진정한 설교라고 할 수 없다. 헤셀은 설교의 진정한 의미를 정확히 인식했다. “기도하기 위해 설교하라.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설교하라. 참된 설교를 판별하는 것(test)은 그 설교가 기도로 전향되게 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있다”(Abraham J. Heschel, Man's Quest for God: Studies in Prayer and Symbolism, 80).설교자는 연설식 설교 시간을 5-10분 정도 줄이고, 설교 후에 전한 메시지를 가지고 설교자와 회중이 하나님과 대화하도록 해야 한다. 메시지를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야 한다. 나아가 교회 공동체는 설교를 들은 후에 다양하게 기도를 실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회는 성도들이 설교를 듣는 것에만 목적을 두지 않고, 주중에 목장이나 구역별로 모여 들은 메시지를 함께 나누며 기도할 수 있다. 목장별 설교 적용 기도 실천을 위해 설교자는 설교의 내용을 질문이나 내용 요약 형식으로 작성하여 주보에 게재하여 예배 전에 성도들에게 나누어 준다. 성도들이 설교 시간에 주보에 있는 질문이나 내용에 따라 설교 내용을 간략하게 기록 한 후에 집으로 가지고 가서 설교 본문과 함께 묵상하며, 기도하게 할 수 있다. 이렇게 개인이 실천한 후에 목장이나 구역 소그룹에서 함께 나누며 기도할 때 신앙 체험과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이 공략할 상대는 무관심의 문화이다
by Glenn Wishnew
2024-02-27
책 이름에 교회 이탈(dechurching)이라는 말이 들어있지만, 탈기독교시대 교회(The Great Dechurching)은 놀라울 정도로 낙관적인 어조로 쓰인 책이다. 저자인 짐 데이비스와 마이클 그레이엄이 갖고 있는 소망은 지난 25년 동안 교회를 떠난 4천만 명 중 대다수(51%)가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는 낙관론에서 비롯한다. 그 51퍼센트는 나름 참작할 만한 상황 때문에 교회를 떠난 “일상적” 이탈자로 볼 수 있다.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22퍼센트는 새로운 공동체로 이사했기 때문에 떠났고, 16퍼센트는 교회에 참석하는 것이 “불편”해서, 그리고 15퍼센트는 코로나로 인해서 “교회 출석이라는 습관”을 벗어던진 경우이다. 결국 종합할 때, 한때 신앙에 헌신했던 복음주의 교인의 53퍼센트가 평범한 이유로 교회 출석을 중단했다.)하지만 무심코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새로운 복음주의를 꿈꾸게 하는 소망인 동시에 과거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평생 자유주의 주류 교회의 교인이었던 딘 켈리는 1973년에 발간한 Why Conservative Churches Are Growing(왜 보수 교회는 성장하는가)에서 보수 교회가 사람들에게 “고차원적 (large-scale)” 의미를 제공하기 때문에 자유주의 교회보다 더 많이 성장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수준의 의미는 삶을 인도하고 죽음까지도 이겨내도록 한다. 보수 교회는 사람들이 자신감과 소망을 가지고 고통에 직면할 수 있도록 하는 우주적 진리를 선포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주장하는 초자연주의를 부끄럽게 생각한 주류 교회는 진짜 위로를 제공하는 핵심 교리(부활 등)를 일반적인 도덕주의와 정의에 대한 권고로 대체했다. 켈리에 따르면 이것은 운명적인 변화였다. 이제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 얼마든지 “도덕적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의 메시지와 주변 문화의 목소리를 거의 구분할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하품과 함께 교회를 떠났다는 것이다.켈리가 발견한 사실은 단순하다. 종교 공동체의 회복력은 그 공동체 외부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우주적 목적”에 따라 살도록 성도를 준비시키는 만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켈리의 통찰력과 탈기독교시대 교회를 결합할 때, 지금 미국 복음주의 교회가 과연 교인들에게 교회 밖에서는 찾을 수 없는 고차원적 의미를 제공하고 있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별생각 없이 교회를 떠난 사람들의 경우, 그건 자신들의 삶을 인도할 대안이 되는 진리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전혀 거부하지 않는다. 단지 냉담하고 무관심할 뿐이다. 우리 시대 영적 질병: 무관심우체 아니조르(Uche Anizor)는 Overcoming Apathy(무관심 극복하기)에서 현대인들은 “우리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들에 사로잡혀 있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것들에는 미지근하다”라고 주장한다. 무관심이 반드시 하루 종일 이어지는 방황으로 드러나는 건 아니다. 아니조르는 수도승인 존 캐시안(John Cassian)의 말을 인용하여 무관심은 “가장 중요한 의무를 제외한 모든 것을 추구하도록 유혹하는 불안”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 문화가 얼마나 무관심에 깊이 빠져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니조르는 시트콤 Seinfeld를 사례로 든다. 아니조르 역시 90년대 시트콤의 팬이었지만, 이 시트콤은 “크고 의미 있는 일(예: 결혼, 가족, 종교, 사회적 관심, 심지어 홀로코스트)에 대한 무관심과 삶의 일상적인 사소한 일(예: 좋은 주차 공간, ‘옆에서 시끄럽게 하는 사람’이 주는 성가심, 오락기에서 높은 점수 받기)에 집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우리는 오늘날 중요하지 않은 것만 중요하게 여기는 사인필드 사회의 시민이다.” 사인필드 사회에서 관심의 대상은 내용이 아니라 재미가 있는지 없는지이다. 뻔한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대상을 더 우선시하는 능력을 점점 상실해 가는 우리는 조만간 그 차이조차 분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켈리의 언어를 빌리자면, 무관심한 문화가 양산하는 시민은 고차원적인 의미에서는 조금도 활기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여행 축구, 골프, 오락기가 주된 관심사가 되고 전능하신 주님은 이제 부차적인 주제로 전락한다. 영적 무관심이 교회를 침범하는 지금, 교회 지도자가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우리의 제자도 실천이 과연 주변에 만연한 무의미함이라는 독소로부터 성도들을 제대로 예방하고 있는가이다. 수백만 명이 교회 출석을 중단했다는 사실은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에게 지금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치료제: 예배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잔소리가 아니다. 데이비스와 그레이엄의 연구에 따르면, 교회를 이탈한 복음주의자는 가톨릭이나 주류 교회의 교회 이탈 교인들에 비해서 정통 교리를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교회를 이탈한 복음주의자의 신앙은 아직도 교회에 다니는 복음주의자의 신앙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교회를 이탈한 복음주의자에게 부족한 건 교리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역시나 가장 큰 문제는 무관심이다. 즉, 무관심은 부족한 지식이 아니라, 내가 아는 게 과연 진리인가에 대한 확신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팀 켈러는 설교에서 초기 목회 시절 버지니아 시골에서 상담했던 한 어린 소녀에 관해서 들려준다. 그녀는 영적으로 퍽 우울한 상태였는데, 켈러는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 즉 어떻게 그녀를 용서하셨고, 당신의 피로 그녀를 사셨으며, 또 그녀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확증하셨는지 일깨워 줌으로써 그녀를 격려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녀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예, 목사님, 그거 다 알아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셨고 또 나를 천국으로 데려가실 거, 다 압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나한테 관심 있는 남자애가 하나도 없는데, 그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요?” 켈러는 그녀의 영적 곤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학교에서 잘생긴 남학생이 주는 관심 또는 무관심이 그녀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훨씬 더 큰 위로와 격려였고, 더 중요한 기쁨의 원천이자 자기 가치를 느끼게 하는 원천이었다.”그 소녀에게 부족한 것은 복음이 그녀를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게 더 아름답게 만드는지에 대한 감각적 인식이었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알고 있는 신앙 교리를 마음의 갈망과 연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연결은 오로지 예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주일 예배, 주중 소그룹, 매일의 묵상 등 다양한 예배를 통해 우리는 믿음의 진리를 깊이 생각하고 또 마음에 새긴다. 무심코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회복하려면 그들을 맞아들이기 위한 “정문”을 여는 건 당연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다시 새어나가지 않도록 “뒷문”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삶의 모든 초점을 우리 가운데 계신 거룩하신 분에게 맞춰야 한다. 기독교를 사람들의 입맛에 더 맞게 맞추려고 노력했던 20세기 주류 교회의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들처럼 기준을 낮추어서는 안 된다. 교회 이탈 경향을 뒤집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날 만연한 무관심 문화로 인해 죽은 영혼을 살리는 대응적 실천을 오히려 두 배로 늘려야 한다. 더 많이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복음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도록 해야 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복음으로 인해서 더 큰 만족을 맛볼 것이다. 복음만이 제공하는 고차원적 의미만이 이 시대를 바꿀 수 있다. 우리의 왕이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부모와 아내와 자녀와 형제와 자매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희생하기를 꺼리는 사람은 능히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6).원제: Why Discipleship Must Target Apath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열린
1
페이지
2
페이지
3
페이지
4
페이지
5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