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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위험한 국가들
by Joe Carter
2021-02-10
전 세계적으로 3억 4천만 명이 넘는 기독교인(신자 8명 중 1명)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높은 수준의 박해를 받고 있다. 지난 29년 동안 ‘Open Doors World Watch List’는 인권 및 종교적 권리가 침해되고 있는 국가 및 사회적 불안정에 가장 취약한 국가에 대한 글로벌 지표를 제공해왔다. 오픈도어선교회(Open Doors)의 미국 대표 겸 CEO인 데이비드 커리(David Curry)는 “코로나 19 전염병은 나쁜 상황을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바꾸었다. 코로나로 인한 공중 보건의 위기는 가뜩이나 종교적 박해가 극심한 지역에서 신앙 때문에 발생하는 차별과 폭력이 더욱 더 악화될 상황을 만들고 있다”라고 말했다. 2021년 오픈도어 세계 감시 목록에 따르면, 기독교인 여섯 명 중 한 명 꼴로 신앙 때문에 차별과 폭력을 견디는 것으로 알려진 아프리카 대륙에서 특히 박해의 강도가 더 높아진 것으로 드러났다. 나이지리아에서만 하루 평균 열 명의 기독교인이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살해당한다. 여기 박해가 가장 극심한 열 개 국가가 있다. 이 나라에 사는 기독교인을 위해서 기도하자.1. 북한박해 유형 : 공산주의와 공산화 후의 박해추정 기독교인 수 : 400,000명기독교인의 고통: “북한에서 기독교인으로 발각되는 것은 사형 선고를 의미한다. 즉시 살해되지 않는 경우 정치범이 되어 노동 수용소로 끌려간다. 이 비인도적인 감옥 상황은 끔찍하고 거기서 살아남는 신자는 거의 없다. 가족 모두가 같은 처벌을 받는다. 김정은은 현재 5만 ~ 7만 명의 기독교인이 수감되어 있는 수용소를 더 확장한 것으로 알려졌다.”기도 요점: “투옥된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자. 그들에게 위로와 힘을 달라고 기도하자. 그들이 감옥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느끼도록 기도하자.”2. 아프카니스탄박해 유형: 씨족 및 민족적 적대감추정 기독교인 수: 수백 명 기독교인의 고통: “가족 중 누군가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가족, 씨족 또는 부족은 신자를 부인하거나 심지어 죽임으로써 가족의 ‘명예’를 되찾아야 한다. 무슬림 출신의 기독교인은 정신 병원에 갇힐 수 있다. 이슬람을 떠나는 것은 광기의 표시로 간주되기 때문이다.”기도 요점: “격리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신자들이 더 굳건한 신앙으로 힘을 얻도록 기도하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고 또 다른 신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안전한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하자.”3. 소말리아박해 유형: 씨족의 억압추정 기독교인 수: 수백 명 기독교인의 고통: “소말리아에서 기독교 신앙을 공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애초에 ‘교회 생활’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소말리아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되며 소말리아인이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의심받는 경우, 그 사람은 즉각 큰 위험에 처하게 된다. 가족, 씨족 또는 공동체 구성원은 그들을 괴롭히고 위협할 뿐 아니라 심지어 죽일 것이다. 여성은 강간 당하고 강제 결혼에 처해질 수도 있다.”기도 요점: “신앙 때문에 살해당한 이들의 가족이 하나님 아버지의 위로를 받고 고통에서 치유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4. 리비아박해 유형: 이슬람의 박해추정 기독교인 수: 34,500명기독교인의 고통: “리비아에서 공개적으로 신앙을 드러내는 것은 불법이며 다른 사람과 기독교 신앙을 공유하려는 사람은 폭력적인 반대와 체포 위험에 처한다. 중앙 정부가 없는 이 나라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사회 전체가 무법 지대다. 기독교인이 공격을 받거나 살해 당할 때 법적으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기도 요점: “세례를 받은 새로운 신자를 위해 기도하자. 그들이 함께 교제할 다른 신자들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찾았다는 사실에 기뻐하자.”5. 파키스탄박해 유형: 이슬람의 박해추정 기독교인 수: 4,052,000명기독교인의 고통: “파키스탄의 기독교인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다. 이슬람에서 개종한 이들은 가장 높은 수준의 박해에 직면한다. 모든 기독교인은 이 강력한 이슬람 국가에서 이등 시민으로 간주된다. 그들에게는 낮고, 더럽고, 불명예스러운 직업이 주어지며, 억압받는 노동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기도 요점: “과거 테러 공격이 일어났던 크리스마스와 부활절과 같은 휴일에 파키스탄 교회에 별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하자.”6. 에리트레아박해 유형: 기독교 교단 보호주의(정교회의 박해-편집자 주)추정 기독교인 수: 2,552,000명기독교인의 고통: “비전통 교단의 기독교인들은 정부와 에리트레아 정교회(EOC)로부터 가장 가혹한 박해를 받는다. EOC는 정부가 인정하는 유일한 기독교 교단이며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다.”기도 요점: “에리트리아 기독교인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지혜와 기회를 주셔서 종교의 자유라는 주제를 놓고 정부가 고민할 수 있는 길이 열리도록 기도하자.”7. 예멘박해 유형: 씨족의 억압추정 기독교인 수: 수천 명 기독교인의 고통: “예멘에서 기독교인들은 보통 신앙을 비밀로 유지한다. 발견되는 순간 사형에 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을 떠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모든 예멘인은 국가에서 무슬림으로 간주된다.”기도 요점: “몰래 신앙을 가지고 예배하는 신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그들이 또한 다른 신자들을 도울 때 지혜와 분별력을 갖도록 기도하자.”8. 이란박해 유형: 이슬람의 억압추정 기독교인 수: 800,000명기독교인의 고통: “이란 정부는 무슬림의 기독교 개종을 이란의 이슬람 통치를 훼손하려는 서방 국가들의 전복 시도로 보고 있다. 무슬림 출신 기독교인들은 정부 뿐 아니라 가족과 지역 사회에 의해서도 가장 많은 박해를 받는다. 비밀 교회는 수시로 습격 당하고 지도자와 교인들이 체포되어 ‘국가 안보에 반하는 범죄’ 혐의로 장기 징역형을 선고 받는다.”기도 요점: “현재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혀있는 기독교인들을 위해 기도하자. 이란 교도소의 상황은 매우 열악하고 전염병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9. 나이지리아박해 유형: 이슬람의 억압추정 기독교인 수: 95,358,000명기독교인의 고통: “다른 그 어떤 나라보다 나이지리아에서는 믿음 때문에 살해당하는 기독교인이 많다. 보코 하람(Boko Haram), 하우사-풀라니(Hausa-Fulani) 무슬림 무장 단체, ISWAP (이슬람 국가의 분파) 및 기타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의 폭력적인 공격은 이 나라의 북부와 중부 지역에서 흔하며 점점 더 그 세력을 남쪽으로 뻗어가고 있다.”기도 요점: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잃고 또 트라우마를 경험하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위로가 더해지도록 기도하자. 주님이 납치된 자들에게 가까이 오시고 또 그들이 석방되거나 구조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10. 인도박해 유형: 종교적 민족주의추정 기독교인 수: 67,356,000명기독교인의 고통: “힌두교 극단주의자들은 모든 인도인이 다 힌두교인이어야 하며 국가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제거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광범위한 폭력을 사용하며, 특히 그 폭력은 힌두교 배경의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한다. 기독교인들은 ‘외국 신앙’을 따른다는 비난을 받고 지역 사회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 원인이라고 비난받는다. 신자들은 종종 신체적 공격을 받고 때로는 살해 당하며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힌두교로 돌아가라는 끊임없는 압력을 받는다.”기도 요점: “우리 형제 자매, 특히 새로운 기독교인, 시골에 사는 사람들, 고립된 사람들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자. 그들의 가족과 공동체가 그들의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원제: The Countries Where It’s Most Dangerous to Be a Christian in 2021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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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성령이 주신 영적 무기입니다
by Peter J. Leithart
2021-02-09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을 왕권과 연결한다. 왕은 음악을 만들고 또 연주한다.창세기 4장에 처음으로 악기가 나온다. 타락과 가인의 동생 살인이 지나, 저자가 가인의 후손을 열거하는 시점이다. 가인이 첫 번째 도시를 건설하고 그의 후손이 창조 세계를 지배한다. 야발은 가축을 기르고, 두발가인은 청동과 철 도구를 만든다. 라멕은 인류 최초의 일부다처체를 행한 자다. 그들은 축산업, 야금술, 시민 질서, 실험적 결혼 등을 선보인 혁신적인 가족이다. 가인 부족은 창조세계를 다스린 왕의 일족이며, 이 왕실 족보의 한가운데 야발이 있는데,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창 4:21)이다. 양치기와 목축, 도구 만들기, 도시 건설과 함께 음악은 통치의 한 형태다. 노래와 대관식이스라엘 역사 초기에 가수로 선정된 자는 여성이었다. 출애굽 후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노래를 부를 때 가수는 미리암이었다(출 15:20-21). 이스라엘이 가나안 왕 야빈과 그의 사령관 시스라를 물리친 후, 드보라는 승리의 노래를 작곡하고 그녀와 바락은 가나안 민족을 조롱하기 위해 그 노래를 부른다(삿 5). 사무엘이 태어난 후 한나는 시편과 비슷하면서 마리아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시를 만들어 기도한다(삼상 2).이 모든 노래는 다윗과 사울이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환영하는 여인들의 노래와 비슷하다. 야훼는 적을 물리치는 전사다. 승리 후, 그는 찬양의 노래로 둘러싸여 왕좌로 올라간다.노래는 성경 전체에 걸쳐 대관식을 동반한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야훼의 방주를 세우면 음악이 따라온다(대상 16). 야훼의 영광이 성전의 보좌를 채울 때 따라오는 것은 음악이다(대하 5:11-14). 어린양이 보좌에 앉은 이로부터 책을 받기 위해 올라갈 때도 음악이 있다(계 5). 야훼는 항상 노래와 함께 올라간다.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질 때면 음악이 급격히 많이 등장한다. 사울은 예언자와 연주자를 만났다(삼상 10:3, 5). 사울은 예언의 영에 사로 잡혀 예언을 시작하는데, 그것은 그가 노래한다는 의미다. 성령이 그를 새로운 사람, 노래하는 사람, 노래하는 왕으로 만든다. 다윗은 이스라엘 최고의 왕실 가수이자 음악가며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다(삼하 23:1). 그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조직하여 법궤와 성전 앞에서 번제의 찬양을 올렸다. 다윗은 새로운 악기를 발명한 새 시대의 야발이다(대상 23:5; 대하 7:6; 29:26-27; 느 12:36). 통치 형태로서의 음악 음악과 왕권이 연결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좋은 가수는 입술과 성대 뿐 아니라 온몸을 훈련한다.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실력을 기르기 위해서 나무를 잘라 다듬고, 내장으로 줄을 만들며, 또한 필요한 재료를 뽑을 수 있도록 손가락을 훈련했다. 금속을 채굴하여 플루트와 파이프, 나팔을 만들고 또 연주하는 법을 배운다. 빵 만들기나 포도주 담그기와 마찬가지로 음악을 만든다는 것은 하나의 통치 패러다임이다. 바이올린 연주를 듣거나 보게 될 때마다 인간의 숙명을 알게 된다. 노동으로 아름다워진 창조 세계는 창조주를 찬양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음악은 또한 우리가 상황을 지배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고 준비시킨다. 음악은 우리를 왕과 여왕으로 만든다. 음악에 맞춰 병사들은 행진하고 노래를 부르며 전투를 준비하며 부대 역할을 하도록 훈련한다. 워밍업 할 때 듣는 강한 비트의 음악은 선수들의 정신을 각성시킨다. 순교자들은 하늘의 노래를 부르는 법을 배움으로써 마지막 전투와 함께 하늘로 올라갈 준비를 한다(계 14:1-5; 20:4-6).전쟁 무기로서의 음악전투 준비에만 음악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노래 자체가 하나의 전쟁 형태다. 음악은 갑옷이고 노래는 무기다. 사무엘이 어린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때 성령이 그에게 임했고, 마치 사사가 된 것처럼 그는 즉시 전투에 돌입했다(삼상 16). 일반적인 전쟁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다. 골리앗과 싸우기 전에 또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기 전에 다윗은 사울을 괴롭히는 악령과 먼저 싸운다. 그는 하프로 사울을 괴롭히는 악령을 물리친다. 다윗은 물맷돌 하나로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있고, 또 칼로 모든 군대를 다 날려버릴 수 있다. 그러나 악령을 물리치기 위해 그가 들고 나온 무기는 바로 열 개의 현을 가진 수금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연주하고, 목소리로 노래하며 대적과 싸운 것이다. 다윗처럼 우리는 공중에 권세 잡은 자, 영적인 악의 세력과 싸우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노래라는 영적 무기를 포함하여 각종 영적 무기를 들고 다윗처럼 싸운다. 성령은 전쟁의 영, 전사 야훼의 영이다. 옷니엘, 기드온, 입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그들은 나가 싸웠다. 네 번에 걸쳐 성령은 삼손에게 임했고, 그는 사자를 죽이고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고 또 그를 묶었던 줄을 끊었다. 사울이 암몬 족속으로부터 야베스 길르앗 지역을 구원할 때 입었던 갑옷은 성령이었다. 성령이 임할 때 신자는 전투를 준비한다. 성령이 충만할 때 그분은 노래에 영감을 더하신다(엡 5: 18-20). 교회는 노래를 부르며 영적 전쟁터로 행진한다. 우리는 노래하며 영적 전쟁을 수행한다. 우리의 전쟁은 언제나 증거하는 전쟁이다(그리스어로, marturia). 노래는 우리가 위협과 위험에 직면하고도 예수님을 간증하도록 용기를 주지만, 또한 노래는 그 자체로서 증거하는 행위가 된다. 불평하고 시끄러운 세상의 소란 속에서 우리는 목소리를 높이고 모든 통치자와 권세자, 그리고 모든 권력과 지배 위에 즉위하신 또 다른 왕 예수님을 간증한다. 그렇기에 신자가 부르는 모든 노래는 또한 순교의 노래다. 원제: Why Kings Sing: A Biblical Theology of Monarchs and Music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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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중요성
창세기4장
전쟁과음악
무기로서음악
사람을 판단하라, 단 예수님처럼
by Matt Smethurst
2021-02-08
‘가장 잘못 사용된 성경 구절(The Most Misused Verses in the Bible)'을 쓴 에릭 바저허프(Eric Bargerhuff)는 신자와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참담할 정도로 오용되는 ‘인기 구절’을 조사했다.그 중에서 일등은 뭘까? 예수님의 말씀인 마태복음 7장 1절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바저허프에 의하면 이 구절을 놓고 성경을 통틀어서 압도적으로 가장 잘못 사용되는 구절이라고 주장한 이도 있다고 한다. 예수님이 의미한 것이 아닌 것그럼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 예수님이 이런 것을 의미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비판적 사고를 하지말라.”“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말라.”“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말하지 말라.”그럼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이런 말이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바로 문맥이다.예수님의 말씀이 도덕적인 판단을 하면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 굳이 마태복음, 산상설교, 심지어 마태복음 7장을 다 훑어볼 필요도 없다.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후, 고작 다섯 구절도 지나지 않아서 그의 적을 개와 돼지라고 부른다. 그리고 제자들도 그들을 그렇게 보기를 기대한다(6절). 7장 후반에서 예수님은 양을 삼키는 이리와 같은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하신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도덕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다.자, 그럼 믿지 않는 우리 이웃이 바라는 흔한 메시지가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라면,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한 것일까? 그의 기본 요지는 간단하다. “함부로 판단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 물론 신학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결코 우월감의 발코니에서 아래를 보며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J. C. 라일(J. C. Ryle)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주님이 정죄하는 것은 … 결함을 찾아내기에 급급한 마음가짐이다. 사소한 잘못 또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를 놓고 언제라도 다른 사람을 비난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다. 성급함에 빠져 서투른 판단을 내리는 습관, 이웃의 잘못과 연약함을 확대하다가 결국 상황을 최악으로 만드는, 그런 성향 말이다."예수님의 말씀은 입을 열어 말하기 전에 눈과 마음부터 열어서 사랑하라는 것이다. 마지막 심판날에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들을 잘못된 현미경 렌즈를 통해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비극을 맞이하지 않도록, 사람을 볼 때 정확하게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정직한 적용이 구절을 묵상할 때마다 내가 느끼는 유혹은 그냥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대로 놔두고 싶은 충동이다. 그렇게 하면 맘도 편하고 또 나도 세상 기준에서 볼 때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순간,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 다름없는 이 구절을 뒤집고, 나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말해버리는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럼 마태복음 7장 1절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구절이 정말로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최소한 세 가지가 있다.1. 네 마음 속 위선을 뿌리뽑아라이 메시지가 바로 이어서 들려주신 예수님 말씀의 포인트다.“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3–5).이 말씀은 형제나 자매의 눈에서 티를 부드럽게 제거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당신의 눈 속에 들보가 있을 때는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이 구절의 목적은 자기 인식의 겸손, 즉 위선의 사악함을 제거하는 겸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럼 그런 위선은 어떤 모습일까? - 누군가가 천박한 욕을 하거나 저급한 농담을 했을 때 잽싸게 그 사실을 지적하고는 다시 원래 하던 잡담을 이어가는 모습.- 사실상 개인 경건의 시간은 전혀 가지지도 않으면서 누군가의 기도 요청에 시큰둥하거나, 기도와 관련한 누군가의 신학을 바로잡는 모습. 간단히 말해서, 자기 의(self-righteousness)는 항상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는 고도의 기술이다. 정작 자신의 잘못을 보는 데는 검정고시 수준이면서 남의 잘못을 찾아내는 데는 박사 학위를 추구하는 것이다. 나 자신의 죄를 놓고 애통하는 정도까지만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도 애통함을 가져라. 나 자신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관심을 끊어라. 예수님의 말씀 중 진짜 무서운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 사랑 또는 정죄만큼 하늘의 재판관이 내게 그렇게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2. 비판에 앞서 먼저 격려하라 지난 주에 당신이 비판한 사람과 격려한 사람의 목록을 만든다면, 어느 쪽이 더 길까? 가장 친한 친구는 당신이 비판과 격려 중 어디에 더 능숙하다고 말할까? 예수님이 금지한 태도는, 수도 없이 다양한 형태의 교만이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의 외모, 지성, 엔터테인먼트 선호도, 육아 철학, 학업 결정, 생활 방식 및 지출 선택에 대해 지나가는 말로라도 뭐라고 판단하는 것을 포함한다. 단지 당신과 유사점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안 좋게 생각하는 것, 좀 거칠게 말해서, 그들을 볼 때 단지 당신 자신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저지르는 판단이다. 비판의 정신은 그럼 어떻게 생겼을까? 항상 강한 주장을 펼친다는 사실에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는가? 당신의 의견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른 사람에게 알려야겠다고 느끼는가? 당신은 언제나 모든 사실을 정확하게 다 파악하고 있다고 간주하는가? 그리고 역 판단주의(reverse judgmentalism)도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 내가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난 저기 저 사람처럼 남을 막 판단하고 그러지 않아요. 나는 하루에 두 번씩 자선을 합니다. 물론, 그게 최종 목표는 아니고요”라고 말하면서 다른 바리새인을 비난하는 바리새인이 될 수도 있다. 3. 다른 기독교인과 교회를 위해 예수님을 찬양하라어떻게 해야 “비판하지 말라”는 도전을 단지 개인이 아닌 전체 교인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일단 우리는 얼마든지 나 혼자만이 올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나만이 '교회를 이끄는 바른 방법'을 알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가장 먼저 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도록 기도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를 깔봐서는 안 된다. 성숙은 결코 지식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건강보다도 교회 자체를 사랑하라(Love the Church More Than Its Health)'는 글에서 조나단 리먼(Jonathan Leeman)은 좀 길지만 충분히 인용할 가치가 있는 말을 썼다. 우리는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보다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해’라는 비전을 더 사랑할 수 있다. 결혼을 하고도 눈 앞에 있는 아내가 아닌 여전히 머릿속 이상적인 아내의 모습을 더 사랑하는 남편이 될 수도 있고, 평소 그리는 완벽한 딸에 대한 이상을 진짜 딸보다 더 사랑하는 어머니가 될 수도 있다. …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교회보다 건강한 교회라는 꿈과 이상을 더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분의 이름을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 주셨다. … 그는 제대로 무르익지 않고 불완전한 신학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교회의 건강보다 교회 자체를 더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것이다.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지, 그들이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 선하고 성경적인 법칙을 지켜서가 아니다. … 누구나 사랑하는 자녀가 건강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부모라면 건강하든 아프든 관계없이 언제나 자녀를 사랑한다. 바울은 교회가 지닌 수많은 흠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기쁨', 그의 '영광', 그리고 그의 '면류관'(살전 2:19)이라고 불렀다. 당신은 어떤가? 교회를 함께 섬기는 형제가 당신의 기쁨이고 영광, 그리고 면류관인가?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은 길을 걷는 나그네, 형제 자매, 시민, 군인, 고통받는 자 그리고 상속자라는 진리를 가르친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말이 우리가 영원히 나눌 깊은 연합을 온전히 드러내도록 하자. 한 가지궁극적으로, 오직 한 가지만이 위선을 뿌리 뽑고, 비판하고 싶은 욕망을 격려하고 싶은 마음으로 바꿀 수 있으며, 또 남을 판단하는 마음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 겸손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주는 바로 그 은혜로부터 오는 겸손이다. 행여 우월감의 발코니를 오르기 시작했다면 지금이라도 그 걸음을 멈추라. 당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라. 여전히 죄를 짓는 성도, 여행하는 나그네, 여전히 미완성 작품이다.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올바른 자세로 성경을 읽고, 다른 사람이 어떤지 살펴보기 전에 나 자신의 성장을 추구하고, 무엇보다 가장 얕보기 쉬운 사람들과 그들의 평판을 높여주는 데 온 힘을 쏟으라. 은혜가 태양처럼 마음속에서 솟아오를 때 당신 속에 있던 위선과 남의 티를 찾기 바쁜 위선은 눈 녹듯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원제: Judge People! (Like Jesus Di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신학
신약성경
마태복음7장1절
판단과정죄
판단과교만
오용되는성경구절
형제사랑
건강한교회의함정
위선
J.C.라일
십자가를 지는 삶이 진짜 신앙이다
by Kent Butterfield
2021-02-07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회개의 한 측면은 스스로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죄로 충만한 이기심으로 채워진 곳이다. 죄와 엮인 삶은 이기적일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의 모습과는 정반대다. 그것은 고통을 나타내며, 고통은 믿음의 일부분이 된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주인을 닮는 종예수님께서는 무리를 제자들과 함께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4–35).십자가를 지라는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기로 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결신한 성도들은 새로운 삶, 새로운 우선순위, 새로운 품성, 그리고 이 새로운 명령을 따라 살아간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며 그의 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예배하며 영광 돌리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우리도 그분처럼 살아야 한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그리스도께서 왕의 왕이심을 고백하며 사는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그의 나라에서 그분을 위한 종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위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을 사는 성도들은 이를 부담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남을 위해 매일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사셨다.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하는 임무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부인하며 왕 되신 주님을 섬겨야 한다.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또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부인한다. 우리는 자신만을 위해 살던 삶을 버리고, 죄의 쾌락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우리의 일터가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곳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이다.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런 관계는 끊어야 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을 전심으로 기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지위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 어떤 것일지라도 과감히 포기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라면 부딪히는 여러 가지 고난도 감당하여야 한다.베드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방인, 곧 방황하는 나그네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영원한 본향은 현재 살고 있는 이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급은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배하는 우리의 영광스러운 하나님께 속해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우리의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자신은 죽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거듭난 삶“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우리는 매일 스스로 죽어야 한다. 우리는 더이상 죄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고,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우리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우리가 죽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이전 삶의 모습에서의 죄악과 허물을 모두 떨쳐 버려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드린다. 우리는 제사를 위해 준비된 양과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삶이 그들 자신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들의 몸 또한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은 우리의 몸을 창조하시고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신 주님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왕 같은 제사장이며, 우리의 보물은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단순히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삶에서 복음이 미치는 효과의 실체를 실행하며 살아간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욕망을 회개하면서 매일 죽으며 살아간다.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회개할 수 없다. 행복한 제자의 삶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깨달으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거부하며 사는 것이다.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우리의 적인, 죄악과 싸우며 살아간다. 참된 믿음은 우리가 죄와 전투를 벌이는 상황에서도 늘 주님 안에서 평안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인 죄 가운데 있었던 우리 이전 삶의 방식을 멀리하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져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우리가 믿음 가운데 거하며 회개를 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은 것이다. 죄를 지을 틈을 허용하지 말라. 죄에 대하여 우리는 몇 번이고 죽어야 한다.하늘에 쌓여 있는 우리의 상급“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거부하였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 새로운 목적,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려는 새로운 의지를 얻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던 죄인을 구원하여 하나님을 경배할 새로운 마음을 갖도록 하는 복음의 전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참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기쁨을 위해 산다. 우리의 기쁨은 그분께서 즐거워하시는 거룩하고, 올바르며, 선하고,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되는 일이다. 온유한 자는 실로 세상을 물려받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로서 왕 같은 제사장이며, 우리의 상급은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죄를 회개하며 큰 기쁨 가운데 그의 계명에 복종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충실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죄인들이 예수님께 가시관을 씌웠을지 모르지만, 지금 하나님께 속한 회심한 바로 그 죄인들이 영광의 왕좌 위에 서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에게 관을 씌워 주신다.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시 103:4).출처: www.ligonier.org원제: What Does It Mean to Bear Our Cross?번역: 장명근
회개
본향
상급
고난
죄
싸움
복음
십자가
영성
신앙과소명
교회와 세상이라는 이원론적 신학을 극복하라
by 김상일
2021-02-06
지난 해 12월, 필자의 책 ‘팀 켈러의 신학적 비전’(CLC_기독교 문서 선교회)이 세상에 나왔다. 책은 말 그대로 팀 켈러의 신학적 비전의 큰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가 자신의 저서 30여 권에서 다루는 각각의 주제를 어느 정도 세세하게 소개하는 일을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하지만 필자가 그 책을 저술한 목적은 단지 켈러가 말하는 신학적 비전의 큰 그림을 그리고 켈러 사상에 대한 자세한 소개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필자가 책을 통해서 정말 하고자 했던 말은, 켈러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신학적 비전은 1) 하나님과 2) 그리스도인 개인 및 공동체, 그리고 3) 믿지 않는 이웃(과 그들이 숨쉬며 살아가는 도시 문화) 사이에 어떻게 해야 복음을 통해서 연결과 소통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묻는 작업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켈러의 신학적 비전은 정말로 그런 작업을 수반하고, 그런 질문을 계속적으로 하고 있는가?켈러가 자신의 신학적 비전을 가장 광범위하고도 세밀하게 다룬 '센터처치'를 살펴보면 그에 대한 답을 알 수 있다. 켈러는 같은 책 후반부에서, 실제적인 교회의 사역이 추구하는 바를 네 개의 사역 접점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이 각각의 사역 접점은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과 사명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지만, 켈러가 왜 '센터처치'를 썼는지, 더 나아가 왜 신학적 비전을 말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1.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것 (전도와 예배를 통해서)2.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는 것 (공동체와 제자도를 통해서)3. 사람들을 도시에 연결하는 것 (자비와 정의를 통해서)4.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것 (신앙과 직업의 통합을 통해서) (센터처치, 616)이 네 가지 사역 접점은 교회가 어떤 공동체인지를 규정하며, 교회가 왜 세상에 존재하는지, 그 까닭을 설명해준다. 켈러는 연결시키는 공동체가 교회라고 본다. (연결이 저절로 소통을 담지한다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들을 연결하고,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며, 사람들과 도시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들과 문화를 연결하는 일이 켈러가 바라보는 교회의 주된 사역이다. 켈러의 신학적 비전은 어떤 목회자든, 어떤 교회든, 각각 처한 목회적인 상황 속에서 이런 네 가지 사역 접점을 어떻게 추구해야 할 지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게 해준다. 그러므로 신학적 비전을 찾아가기 위해서 켈러가 제시하는 여덟 개의 질문은 바로 그런 점을 역설한다. 나는 신학적 비전을 형성하기 위해 비슷하지만 좀 더 구체적인 질문들을 제안한다. 우리가 이 질문들에 답을 해나가다 보면, 신학적 비전이 도출될 것이다. • 복음은 무엇이며, 어떻게 현대인의 마음에 다가가도록 이 복음을 제시할 것인가?• 문화는 어떤 모습이며, 우리는 문화에 어떻게 연결되고 어떻게 대항하면서 소통할 것인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도심, 외곽, 신도시, 시골 등) 그리고 그 점이 우리의 사역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공공 영역과 문화 생산에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그리스도인이 참여할 것인가?• 교회 안의 다양한 사역들(말씀, 봉사, 공동체, 교육 등)을 어떻게 상호 연결할 것인가?• 우리 교회는 얼마나 혁신적이며, 얼마나 전통적이어야 하는가?• 우리 교회는 도시와 지역 안에서 다른 교회들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기독교의 진리를 어떻게 세상에 제시할 것인가? (센터처치, 28)내 책에서도 얘기한 바 있지만, 이 질문들은 모두 연결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연결하는 일을 질문의 전제로 깔고 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스스로의 목회적 상황에서 이 질문들에 대답해 보려는 시도를 한다면, 그게 바로 여러분의 독창적인 신학적 비전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독창적인 신학적 비전은 여러분의 교회와 사역에 가장 합당하며 유용한 도구가 되어, 어렵고 복잡하며 때로는 명확한 답이 전혀 보이지 않는 목회적 상황 속에서 여러분이 다른 것들(외적인 상황과 그에 대한 고려, 혹은 교회 성도들이나 주변인들의 압박 등)에 흔들리지 않고 다시 복음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붙잡아 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연결과 소통이 켈러의 신학적 비전에서 본질적인 요소가 맞다면, 그리고 켈러가 말하는 네 가지 사역 접점이 모두 공통적으로 연결과 소통을 말하고 있다면, 켈러는 왜 굳이 자신의 신학적 비전의 틀을 세우는 큰 축으로 ‘복음,’ ‘도시,’ ‘운동’을 선택했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여기에 대해서 필자는 앞서 언급한 필자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이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복음,’ ‘도시,’ ‘운동’은 연결과 소통을 이루는 세 가지 주체며, 그 세 가지 주체가 서로 관계 맺는 방식이 바로 연결과 소통이라는 점이다. 켈러가 구축하는 신학적 비전은 궁극적으로 이 세 가지 주체를 연결하고 소통하는 작업이다. 그 세 가지 주체는 각각 ‘하나님’(복음), ‘세상’(도시), ‘교회(운동)’를 상징한다. 혹은 ‘하나님 (복음),’ ‘믿지 않는 이웃 (도시),’ ‘믿는 신앙인 공동체 (운동)’로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겠다. 즉 ‘하나님’, ‘이웃,’ ‘나 자신(혹은 교회인 우리 자신)’의 구도가 '센터처치'의 세 가지 축을 이룬다. 교회는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하고 소통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숙해 가면서 세상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의 복음이 어떤 소식인지 소개하고 알린다. 이런 관계 맺음에 연결과 소통은 필수적이다.”(김상일, 팀 켈러의 신학적 비전, 10-11)이렇듯 팀 켈러의 신학적 비전에 연결과 소통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우리의 삶과 사역에 여러 가지 함의를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준다. 이 글에서는 그중에서 특히 연결과 소통을 지향하는 켈러의 신학적 비전이 어떻게 교회와 세상 사이에 이원론적인 관점이 자랄 여지를 그 싹부터 잘라 버리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마치고자 한다. 우선 이원론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봐야 하며, 교회가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대하기 시작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에 대한 켈러의 생각을 들어봐야 한다. 켈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원론은 영적이며 거룩한 것을 나머지 삶과 분리하는 철학이다.… 그래서 교회와 그 활동은 선하고 순수한 것이며, 세속 세계는 악하고 오염된 것으로 보는 이원론이 만연하였다. 이 관점에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최상의 방법은 설교, 전도, 제자 훈련 등 직접적 형태의 사역을 하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가 현실에 대한 포괄적인 관점을 제공하며, 삶의 모든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평안과 힘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대할 뿐이다.”(센터처치, 691-692) 켈러에 의하면, 기독교는 '현실에 대한 포괄적인 관점을 제공하며, 삶의 모든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삶의 어떤 현실도 교회의 정체성이나 사명과 분리해서 바라봐서는 안 된다. 즉 교회는 세상 어디와도 연결하고 소통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연결과 소통을 지향하는 신학적 비전을 가진 목회자와 교회는 절대로 이원론적으로 사역할 수 없다. 앞서 살펴본 사역의 네 가지 접점은 이원론이 연결과 소통을 지향하는 신학적 비전에 자리할 곳이 전혀 없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더군다나 켈러는 다음과 같이 율법주의와 이원론이 얼마나 서로 관련성이 깊은지를 보여주면서, 자신의 신학적 비전이 연결과 소통을 말하는 이상, 교회와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일은 불가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율법주의적 기독교는 이원론적 기독교로 귀결된다. 사람들이 은혜의 복음을 깨닫지 못할 때, 그들은 바리새인처럼 전례적 경건이나 정결에 집착하는 경향이 생긴다. 만일 우리가 삶의 정결함이나 의로움에 의해 구원된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교회 담 안에 머물러야 할 동기부여가 생긴다. 비신자들과 그 생각들을 접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과 분위기 속에 머물고 싶은 자극을 받는다.”(센터처치, 692)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나누는 일은 율법주의적인 동시에 이원론적일 수밖에 없다. 깨끗한 곳에만 머물면 되며, 거룩한 곳에만 거하면 된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라는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할 뿐 아니라, 예수께서 굳이 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거룩한 바리새인들이 멸시하고 천시하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거하셨는지를 설명할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켈러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그리스도인 교회가 구별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교회는 또한 주변에 속해야 하며 주변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이웃들에게 교회가 섬기는 공동체임을 보여주어야 하며, 희생적으로 시간과 재물을 도시의 공익을 위하여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센터처치, 566)연결과 소통의 근원적 동력은 하나님의 복음이며, 복음은 하나님께서 죄로 가득찬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메시지다(요 3:16). 사랑하려면 만나야 한다. 관계를 맺어야 한다. 연결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연결되기를 거부하지 않으셨고, 기꺼이 그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셨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함으로써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스스로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는 (즉, 자기들의 율법적 의로움 때문에 사랑이신 하나님과 연결되기를 거부한) 사람들을 비껴갔는지, 그리고 바로 그런 율법적 의를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전혀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자책하며 괴로워하던 사람들을 향했는지를 몸소 보여주셨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확하다. 교회 안에서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나누는 문화를 타파해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마치 바리새인들이 그랬듯이 스스로 열심히 자기 의를 붙잡는 대신, 사랑이신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몸소 드러내신 예수님을 따라서 사랑해야 한다. 율법적 의로움 대신, 교회를 향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또 어떤 은혜를 베풀고자 하시는지, 세상 앞에서 몸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신학적 비전은, 여러분이 섬기고 사역하는 교회가 어떻게 교회로서 세상과 연결되어야 하는지, 세상에 흡수 당하는 대신, 복음에 기반해서 사랑하면서도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세상과 구별되는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데 버팀목이 되어주며 안내표가 되어준다. 오늘도 이 길을 걸어가는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을 응원하면서, 복음이 한국 교회 안에서 더 풍성하게 드러나게 되어 한국 사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깨닫게 되는 일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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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사역접점
팀켈러
복음도시운동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맞아도 될까요?
by Keith Kauffman
2021-02-05
아담의 죄는 모든 피조물에게 파괴적인 저주를 불러왔다. 아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제 땅은 결코 쉽게 소출을 내어주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그의 정원을 관리하라는 사명도 이제 고통과 어려움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피조계에 대한 인간의 통치는, 아담이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에게 순종한 순간 깨어지고 손상되었으며 불완전해졌다. 그러나 저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히 존재한다. 노동과 지식으로 아담은 여전히 땅에서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종종 실패를 경험하지만 결국에는 성공을 맛볼 것이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았고 타락한 창조 세계가 우리의 첫 조상인 인류를 압도하고 질식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류가 생존에 필요한 생계와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생의학 연구의 장점이나 백신의 유익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본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를 통해 인간이 지식과 경험을 활용해 삶을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기술과 의학을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한,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이 된다. 그리고 의학과 기술을 활용해서 생명을 구하는 것은 모든 인간 생명의 신성함을 옹호하는 성경 말씀에 비춰볼 때, 분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선물로서의 백신백신은 인간의 면역 체계와 인간의 몸이 위험한 병원균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관한 생물학적 의학 연구를 적용함으로써 얻어낸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다. 하나님은 우리 몸이 위험한 이물질을 인식하고 기억했다가, 새로운 전투를 해야 하는 경우 그 경험을 다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도록 허락하셨다. 백신은 환자에게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유기체의 양을 제공하여 신체가 실제 위험한 유기체를 만나기 전에 면역학적 기억을 생성할 수 있도록 한다. 당신의 면역 체계는 단지 적의 모든 작전이 적힌 플레이북(역자 주: 미국의 미식축구에서 모든 상황에 필요한 플레이를 다 기록해서 선수들에게 지급하는 책) 한 권을 받은 게 아니다. 이제 당신의 면역 체계는 백신을 통해 적이 당신의 몸을 상대로 수행하려는 각각의 모든 플레이를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면역 체계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다. 그리고 초기 인류가 농작물에서 더 나은 수확량을 얻기 위해 농업 기술을 배웠듯이, 연구자들은 타락이 초래한 또 다른 측면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하는 백신의 유용성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타락이 끼친 영향에 맞서기 위한 다른 시도와 마찬가지로 모든 노력이 항상 완벽할 수는 없다. 생의학 연구도 수많은 암울한 날을 보내야만 했다. 백신은 때때로 불필요한 사망을 초래했다. 그리고 이런 점 때문에 특정 백신 때로는 백신 자체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작년에 우리는 주요 정당의 지도자들이 COVID 백신의 유효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질문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할 지 궁금해한다. 공개적으로 의문이 제기된 백신을 맞아야 할까? 백신이 너무 성급하게 개발된 것은 아닐까?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는 잘못된 지름길을 택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유형의 백신 기술을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 몸에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낙태아의 줄기 세포나 조직 사용처럼, 우리가 마땅히 경계해야 할 생명 윤리적인 문제는 없는 걸까? 나는 COVID 연구원으로서 이러한 질문 중 일부에 답할 수 있다. 내가 백신과 관련해 어떻게 할 지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몇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공유해야 한다.분열그리스도의 지체의 일부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백신과 관련한 결정이 우리를 분열시키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실수해서는 안 된다. 분열은 얼마든지 가능한 큰 유혹이다. 이 전염병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었다면, 그것은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건강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기에, 다른 누군가가 그렇지 않은 것을 볼 때 화를 낸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나는 백신을 맞는데 다른 교인이 안 맞는다면, 나는 얼마든지 그 사람에 대해 좋지 않은 편견을 가질 수 있다. 백신의 효과를 떨어뜨리는 바이러스 성 돌연변이가 분명히 존재하는 만큼, 나는 백신을 맞지 않는 사람들은 내 건강에 위협을 가하는 존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만약에 내가 백신의 일부 측면이 성경적 원칙과 상충된다는 확신 때문에 백신을 맞지 않는다면, 나는 백신을 맞는 다른 형제 자매의 결정을 죄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백신 문제와 같이 개인의 양심이 걸린 문제에 있어서 이런 식의 판단주의(judgmentalism)는 분명하고 위험한 죄다. 성령님께서 더 많은 은혜를 주신다고 믿고 있지만, 우리는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관계없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는, 그 어떤 것보다도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계속 사랑함으로써 가장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다 감염된 사람에게서 나온 바이러스 입자가 떠다니는 위치까지도 결정하는 주권적인 하나님을 섬긴다. 그리스도인의 연합은 일련의 공유된 태도, 추구, 확신, 경험 또는 정치적 신념에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믿음을 통해 우리를 연합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위에서 세워진 것이다. 우리는 무슨 라이온스클럽(편집자 주: 지녁 사회 봉사를 위해 조직된 실업인 연합 모임)이나 적십자 또는 구세군 회원도 아니다. 우리는 단지 주님 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일 뿐이다. 백신이 제공하는 것은 지극히 일시적인 해결책이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영원한 해결책을 제공한다.흔히 듣는 질문에 대한 대답1. 너무 급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백신의 안정성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코로나19 백신 개발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그렇다고 꼭 필요한 과정을 생략한 것은 전혀 아니다. 백신 진행이 빨랐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첫째, 모든 백신은 여러 임상 시험 단계를 거친다. 일반적으로 기업은 1단계가 완료되기 전에 2단계 테스트(trial)를 시작하지 않는다. 수백만 달러를 투자해야 하는 다음 단계가 들어가기 전에 일단 첫 번째 단계의 결과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의회로부터 받은 자금과 시험 시기에 대한 규제 감소로 기업은 여러 단계 시험을 동시에 할 수 있었다. 즉, 보통 몇 년이 걸리는 모든 임상 시험 단계를 몇 달 안에 완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둘째, 개발하는 백신과 관련한 질병을 가진 자원 봉사자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매우 드문 질병의 경우, 임상 시험을 완료하기에 충분한 자원자를 찾는 데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코로나19의 경우에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규모 임상 시험을 채우기에 충분한 자원자를 확보하는 데 고작 몇 주 또는 몇 달이 걸렸을 뿐이다. 2. 왜 공직자 중에서 백신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코로나 전염병 이슈가 마치 하키 경기에서 각 팀이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점유하려는 하키 퍽(puck)으로 전락한 지난 몇 달 간, 양당(편집자 주: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치적인 게임은 극에 달했고, 그것은 정말로 슬픈 일이다. 하지만 두 주요 정당의 지도자들이 공개적으로 백신을 맞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백신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3. 이번에 나오는 백신은 다른 백신과는 다르다고 하는데, mRNA 백신은 무엇인가? 위험하지는 않은가? 대부분의 백신은 면역 반응을 높이고 기억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보조제와 함께 약화된 유기체 또는 해당 유기체의 특정 단백질을 주입하는 것이다. 모더나(Moderna) 및 화이자(Pfizer) 백신은 세포에 단백질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는 청사진을 포함한 mRNA 조각을 주입하여 작동하는 방식이다. 세포가 mRNA를 흡수하면 COVID를 유발하는 유기체로부터 특정 단백질을 만든다. 그렇게 되면 면역 체계는 침입자를 인식하고 거기에 대한 기억이 만들어진다. 투입된 mRNA는 세포 내에서 빠르게 분해되고 백신 접종 직후 몸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면역 상태는 지속된다. 다양한 연구 목적으로 지난 수십 년간 mRNA를 사용해왔고, 그에 관한 생물학적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4. 백신과 관련한 기독교의 윤리적 문제는 없는가?생의학 연구에서 기독교인이 우려하는 가장 큰 윤리적 고려 사항 두 가지는 줄기 세포와 낙태아의 조직 또는 세포 사용이다. 이러한 주제에 관한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자. 그러나 공개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낙태아의 조직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법률에 의거해서 그 사실을 반드시 알려야만 한다. 모더나와 화이자 백신은 낙태아의 세포주(cell lines)를 사용하지 않는다. 낙태아의 세포주를 생산에 사용하는 다른 백신이 개발 중에 있다. 나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찬반 양쪽 모두의 주장을 다 들었다.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백신 중에는 낙태아의 세포주를 사용하여 개발된 것이 많이 있다(예: MMR, 대상 포진, 수두). 5.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내 차례가 되면 나는 백신을 맞을 것이다. 연구는 믿을 수 있고,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백신을 맞지 않아야 할 그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나는 의학적인 이유로 백신을 맞을 수 없는 사람을 한 명 이상 알고 있으며, 또 비슷한 경우를 가진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이 바이러스의 전파를 막는 데 도움이 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함으로써 나는 백신을 맞을 수 없는 그들을 사랑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지구에 퍼져있는 모든 바이러스 입자를 통제하신다. 이 위험한 질병에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은 백신을 사용하실 수도 있다. 그는 우리에게 천연두를 허락하셨다. 하나님이 백신을 통해 코로나19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시길 기도한다. 알림: 이 글 속의 의견은 저자 개인의 생각이며 국가 공인 알레르기 및 질병 관리 센터, 국가 건강청 그리고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 이 글은 단지 기독교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는 점을 밝혀둔다. 백신과 관련한 구체적인 정보는 의사를 만나서 들을 것을 권고한다.원제: The COVID Vaccine and Christian Un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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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고 제국을 관통하다
by Nathan Tarr
2021-02-04
시리아 여름의 열기를 피해 한 노인이 족쇄를 찬 채 앉아서 글을 받아적는 이에게 뭔가를 열정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의 말은 확신과 긍휼이 섞여 있는데, 마치 아버지가 자녀에게 말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옆방에는 트라야누스 황제(emperor Trajan)의 군단 소속 군사 열 명이 하루의 피로를 풀며 술을 마시고 있다. 안디옥에서 로마의 콜로세움으로 가는 길은 비록 긴 여정이었지만, 그래도 군인들에게는 그게 다키아 전쟁(Dacian war)으로 다시 보내지는 것보다는 나은 길이었다. 서기 107년 8월이다. 죄수의 이름은 이그나티우스(Ignatius)고, 겨우 2주 전, 체포되기 전까지 그는 안디옥의 주교였다.사도 이후이그나티우스가 콜로세움으로 가고 있던 당시 교회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그나티우스의 멘토였던, 사도 요한이 얼마 전에 죽었고, 이제 역사상 처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본 증인은 단 한 명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교회를 위로하고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지도해줄 지도자가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위로와 지도에 대한 필요성은 매우 컸다. 로마 사회는 교회 밖에서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로마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로 소외시키고 있었고, 당국은 기독교 예배에 있다는 이상한 의식(rites)에 대한 소문을 한층 더 강화된 박해로 대응하고 있었다. 외부에서 오는 압력은 그 도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속에 숨어있는 결함을 노출시킨다. 교리적 차이가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성육신의 진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거나(Docetism, 가현설, 역자 주: 예수의 몸은 환상일 뿐이라는 영지주의 교리) 또는 모세의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에비온파의 주장(Ebionism)이 들어오기도 했다. 정도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쓰면서도 여전히 죄를 짓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 교회가 로마 제국 전역으로 계속 확장됨에 따라서 교리와 삶의 양식에서 오는 오류는 오히려 배가되었다. 이 모든 문제는 바로 권위가 사라지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질문에 대답하던 과거의 방법은 이제 사라졌다. 그리스도는 승천하셨고 사도들은 다 순교했다. 영속적인 새로운 권위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신앙에 대한 고백적인 합의, 성경 표준에 대한 인정, 그리고 성경적인 교회 구조 등등 그 어떤 것도 결정된 게 없는 상태였다. 마지막 일곱 개 편지막 일흔을 넘긴 나이의 이그나티우스가 로마로 가는 중에 일곱 회중에게 보낼 편지를 씀으로써 교회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순간이 펼쳐진다. 이 일곱 편지를 통해서 그의 사역은 유성으로 비유되었다. 즉 이그나티우스의 인생에서 가장 밝은 순간은 바로 '화염에 쌓여서 죽기 직전에 주변을 아주 잠깐 밝게 비추는 바로 그 때'가 된 것이다(사도신앙의 전달자, Apostolic Fathers, 166).그러나 이그나티우스는 순교자로서의 역할보다는 목사로서의 역할에 훨씬 더 관심이 있었다. 그는 글을 쓰면서 자신의 죽음보다 교회가 지향할 제자도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그를 베틀의 북(베틀에서 씨줄을 날줄 사이에 좌우로 넘으면서 천을 짜는 기구 - 편집자 주)과 같은 직조기로 생각할 때, 우리는 그를 한층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Christlikeness)이라는 실을 자기 뒤에 묶고, 그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향할 아름다운 진리로 교회를 하나로 묶을 천을 짜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고뇌 뿐 아니라 교회에 대한 근심이라는 실을 가지고 그가 지금 짜고 있는 패턴은 최소한 다섯 가지 방향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하고 있다. 1. 십자가의 가지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십자가는 주 예수의 지상 사역의 중심이었다. 이그나티우스는 이 세상에서 예수 삶의 본질을 담아낸 것으로 십자가를 제시했다. 예수가 수동적으로 순종한 민감한 그 순간은 예수가 평생동안 지향했던 겸손의 완성이 되었다. 예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였다(사 53:3).'모든 일에'(히 4:15) 걸쳐서 예수가 짊어진 고통에 대한 넓은 시각은 이그나티우스 뿐 아니라 그가 편지를 쓴 사람들에게까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을 놀랍게 적용하면서 이그나티우스는 이렇게 썼다. “누구라도 아버지가 심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십자가의 가지가 되어야 한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는 길, 또 우리 안에 그분의 생명을 품는 길은 순교자로서만이 아니라 제자의 평범한 삶을 살면서도 “그분의 고난 속에서 함께 죽는 것이다”(3.1).2. 어리석을 정도로 다른 희망두 번째로, 십자가는 그리스도 복음 선포의 중심이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라는 복음 선포에서 '열정은 우리에게 분명해졌으며' 따라서 우리는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6.7). 이그나티우스는 갈보리에서 드러난 구원의 힘을 찬양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죽음을 피하게 되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기에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더욱이 구속받은 자의 공동체로서 교회의 목회 생활은 십자가에 의해 정해진다. 이그나티우스는 산 돌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올리는 크레인으로 십자가를 묘사한다(1.9). 주님의 마지막 만찬 속 부서진 예수의 몸과 흘린 피 옆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개혁하고(1.20),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바로 십자가로 인한 회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십자가의 약하고 무모한 공격을 말랑말랑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을 거부해야 한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말을 하면 그 사람 앞에서는 귀머거리가 되어라. 예수는 진짜로 태어났고 진짜로 박해를 받았고 진짜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진짜로 다시 살아났다”(3.9). 그렇지 않다면, 즉 우리의 희망이 이 세상의 희망에 비교하여 명백하게 다르지 않거나 '어리석을 정도로' 다르지 않다면, 누군가는 예수를 육체를 입은 하나님임을 부인함으로써 “나를 찬양할지는 몰라도 내 주를 모독하는 것이다”(6.5).3. 가장 미움받을 때 가장 위대해진다세 번째로, 십자가는 기독교 제자도의 핵심이다. 이그나티우스가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죽었듯이 나도 그를 위해 죽으려고'(4.6) 지금 로마로 가고 있는 것은 맞다. 그의 긴 여행은 이제 배움의 현장이 되었다. “나는 이제야 진짜 제자가 되는 것을 배우고 있다”(1.3). 그러나 기독교 제자도는 단지 순교라는 영적 은사보다 더 깊고 더 광대하다. 더 광대한 이유는 제자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다 적용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세상의 인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침'을 몸에 지녀야 한다(2.5). 더 깊은 이유는 십자가가 우리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통한 새 생명을 얻게 되면', 우리의 새롭고 또 '의로운 본질'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십자가를 우리 속에서 드러내는 것을 기뻐하도록 만든다.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이 아닌 그를 더 닮고 싶도록 만든다. 세상의 분노를 향해서는 친절하라. 세상의 자랑을 향해서는 겸손하라. 세상이 주는 비난을 향해서는 기도하라. 세상의 오류를 향해서는 믿음 안에서 굳건하라. 세상의 잔인함을 향해서는 문명화되어라. 세상을 닮으려고 애쓰지 말라…. 대신, 우리 주님을 닮기 위해 노력하자. 우리 속에서 사탄이라는 잡초가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더 많은 욕을 먹었고, 더 많이 속았고, 더 많이 거부당한 우리 주님을 바라보자(1.10). 그는 로마에 있는 교회에서 이렇게 썼다. “기독교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때 (예수님처럼) 가장 위대해진다”(4.3).4. 하나님으로 가는 길네 번째로, 그리스도와 교통하고 싶은 이그나티우스에게 십자가는 그 중심이 되었다. 그가 쓴 편지 속에서도 가장 놀라운 부분은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괜히 하지 않아도 될 걱정 때문에 자신의 임박한 순교를 방해하지 말라고 호소하는 장면이다. 그리스도가 삶과 죽음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생명으로 들어가는 나를 방해하지 말라. 그리고 나와 같은 죽음을 원하지도 말라”(4.6). 콜로세움으로 가는 이그나티우스의 길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면전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런 길 위에서조차 고난 속 그리스도와 나누는 교제는 그의 몸을 휘감은 사슬까지도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가는 '영적 진주'로 바꾸었다.바로 이런 점에서 이그나티우스는 자신을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모범으로 만든다. 우리도 “망치질을 당하는 모루처럼 굳건하게 서 있어야 한다”(7.3). 우리도 항구를 향해서 가는 풍랑 속의 배다.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부족함이 없기 위해서 세상에서는 많은 것이 부족하다”(3.5). 그럼에도 우리는 용기를 잃지 않는다. 박해받는 교회가 함께 모일 때,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그 가운데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2.6). 참으로, “그분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7.1). 그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그의 고난 안에서 죽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부활 때문에, 고난은 탄생의 아픔에 불과하게 되었고, 무덤은 이제 자궁이 되었다. 그리고 죽음은 온전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 되었다. 5. 성경이 열리다다섯 번째로, 21세기를 사는 제자들이 이그나티우스가 그리스도를 따른 것처럼 그를 따르려고 할 때, 아마도 가장 관련성이 높게 적용 가능한 것은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십자가는 그의 성경해석의 중심이 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라는 개념이 이스라엘 성경(구약 성경)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비난을 거부하는 한편, 이그나티우스는 복음 속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를 읽을 수 있는, '바꿀 수 없는 기록 보관소'로 이해했다. 구약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렌즈는 바로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와 그가 이루신 일을 보는 것이다(5.9). 1세기 교회나 21세기 교회나, 하나님의 책이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열쇠를 통해 그리스도를 제대로 보여줄 때만, 그리스도가 온전히 드러나고 선포되고 또 경배받으며 그의 제자를 거느리게 된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이그나티우스의 사례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가 보여준 신실한 증거로부터 용기를 얻게 된다. 그의 전 생애를 통한 간증은 그가 콜로세움에 들어섰을 때 모래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지지 않았고, 그 대신 그가 쓴 일곱 편지를 통해서 교회를 살렸다. 성령님의 인도로 정경이 확정되었을 뿐 아니라, 교회가 만든 신조를 통해 바른 믿음의 길이 명확하게 요약됨으로써 지켜야 할 바른 신앙의 도리를 알게 된 것에 대해서 우리는 기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제국을 가로질러 가는 내내 이그나티우스가 짊어졌던 십자가에 또 그가 교회에 요구했던 그 부름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 열거된 몇 가지 사실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에서,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 기쁨, 그리고 생명이다. 원제: He Carried a Cross Through the Empire: IGNATIUS OF ANTIOCH (35–107)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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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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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십자가
기독교역사
초대교회
고난 없는 삶은 비현실적인 기대입니다
by Paul Tripp
2021-02-03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도 이 문제를 경험하고, 직장인도 마찬가지다. 첫 아이가 태어나길 기다리는 부부에게도 있는 문제고, 친구 관계 안에서도 경험하는 문제다. 목회자 역시 교회 사역에서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이 문제가 과연 뭘까? 바로 비현실적인 기대다. 우리가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는 이유는, 쉽게 말해, 우리가 이 세상의 현재 상태에 관해 성경이 말하는 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 이 세상은 문젯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한 연기와 먼지가 성경 전체에 자욱하다. 여기서 탈출할 수는 없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디자인하셨던 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말 그대로 탄식 가운데 하나님이 주실 구속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한다(로마서 8장 18절 이하를 보라). 우리는 질병과 죽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이 중 어떤 것도 하나님의 본래 계획이 아니었다. 또한 이 세상은 속임과 실망으로 가득한데, 이 역시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아니었다. 반역과 죄로 가득한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이 아니었다. 고통과 상실 속에서 신음하는 이 세상 역시 하나님의 계획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폭력과 전쟁으로 가득한 이 세상은 평화의 왕이 빚어내신 작품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는 정욕과 탐욕이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하나,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그렇게 디자인하지 않으셨다. 이 모든 어려움들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사역을 어렵게 만든다. 우리에게 실망을 안기지 않는 관계는 없다. 교회를 포함해서 이 세상 어떤 기관도 죄와 타락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할 수 없다. 어려움이 없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삶과 사역의 모든 순간은 타락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닥치는 어려움이를 깨닫는 것이 왜 중요할까?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대해 성경이 경고하는 내용을 하찮게 여겨왔다. 어려움을 겪는 목회자들을 상담하며 종종 발견했던 사실은, 하나님을 높이는 건강한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나갈 때 그들에게 목회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가 있어서 필연적으로 닥칠 어려움에 대해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내부적인 죄와 외부적 어려움이 그 모습을 드러내어 교회에 문제를 야기하기 시작할 때, 그들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목사들은 주의깊게 행동하기보다 그저 사후 대처에만 급급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이 타락한 세상에서 하는 목회 자체가 주는 어려움으로 인해서도 고난을 당하나, 그 문제를 자신들이 더욱 악화시켰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과 실망으로 인해서도 고통을 당하게 된다. 내가 여러 교회들을 도우면서 발견한 것은 이러한 상황이 닥치면 목회자나 리더가 자신의 강점이 아닌 약점으로 일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지혜의 원칙으로 자기 자신을 연단시키고,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슬프게도 그들은 정치적인 태도를 취하고 개인적으로는 방어적 입장을 고수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타락한 세상의 실상에 대해 성경은 아무 것도 숨기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리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모든 것을 완전히 회복시키실 것을 기다리며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더불어 살고 더불어 사역해갈 때, 어려움이 닥칠 것임을 우리가 알고 그에 대해 준비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우리를 돕고자 하심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비현실적인 기대감은 사역자를 포함한 모든 이들로 하여금 불필요하게 독립적이고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추구하도록 만들어버린다. 사실, 모든 목회자는 매일매일 우리를 구해내시고 죄를 용서하시며 힘을 주시는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다. 목회자 역시 성화의 여정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므로 은혜가 필요하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목회자 역시 죄의 존재와 그것이 지닌 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이는, 사역자가 매 순간마다 옛 자아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어려움이 닥칠 때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약하여 넘어지는 이들을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그러한 이들을 사랑하라고, 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사역하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하지만 생각해봐야 할 것이 더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시 119:105)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지혜의 빛으로 인도함을 받고 보호받을 때만 우리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제대로 살고 사역할 수 있다. 평생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 자인지 또한 이 세상이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를 모르는 채 살아갈 수 있다. 이를 잊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 사역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도움과 인도하심을 매일 갈구하지 않게 된다. 그 결과 우리에겐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만 남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미성숙하게 대응함으로써 우리가 섬기는 지역 교회 안의 혼탁한 어려움들은 오히려 악화되고 복잡해지게 된다. 사역할 때 이를 명심하라. 어려움이 닥칠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홀로 내버려 두신 것은 아니다. 그러한 순간에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주신다! 그분이 당신을 안전하게 지키신다. 시편 27편 5절 말씀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를 기억하라. 하나님은 가까이 계신다. 그분은 변화시키는 은혜와 자유케 하는 지혜를 가득 들고 당신에게 오신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해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에 대해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에 대해 눈과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리하면, 당신은 당신에게 정말로 필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기꺼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실 은혜와 지혜를 구하며 살아가게 될텐데, 이것이 바로 겸손하게 자신의 필요를 인식하며 사는 삶의 방식이다. 현실을 직시하라. 그리고 인생과 사역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 허락하시는 모든 현실적인 일마다 그분의 놀라운 은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원제: Expect Troubl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이정훈
목회
난관
어려움
은혜
지혜
사랑
비현실적
죄
타락
사역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by 이승구
2021-02-02
섭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인가?올바른 섭리론이란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비록 우리가 그 과정과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잘못되고 과도한 호기심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바를 탐구하는 것을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한다고 말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바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타락하기 전의 인간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을 다 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니, 타락한 사람이 그것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주어진 정황에 대해, 어떤 특정한 시공간의 하나님의 역사 전체를 모두 다 알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그러므로 섭리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호기심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겸손과 경건으로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바르고 공정한 판단을 존중하며 높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바르고 공정한 판단은 때로는 우리에게 잘 보이지 않고 감추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 우리가 경험하는 코로나19 같은 것이 아주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이 상황에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반대로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섭리 같은 것은 없다고 하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다. 우리는 잘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경건하게 그리고 모든 겸손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모든 정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자들’이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들을 배우고, 그 한계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오래전(1561년) 벨직 신앙고백서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던 이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있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 계시 가운데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을 배우려고 하고, 그 한계를 넘어 가지 않는’ 것을 동일한 것으로 여겼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를 즐겨하며 자신들의 이해를 자랑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이는 매우 적실하고 중요한 생각이다. 그들은 예전에 살던 사람들이니 그럴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여러 면에서 우리는 교만한 것이 된다. 16세기에도 하나님께서 그 말씀 가운데 드러내어 보여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한계를 넘어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런 신앙고백이 행하여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든지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그 타락성을 따르면, 항상 주어진 말씀 안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 한계 밖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타락한 인간성을 만족시키기는 하나 항상 잘못되는 길로 가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내어 주는 한계 안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것이 고루해 보이고 진취적이지 않으며, 탐구 의욕을 꺾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문제성과 피조물의 한계성을 참으로 인정하는 겸손이며 경건이다.이런 겸손과 경건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저 우연히 되는 것이라고 믿었던 에피쿠로스 학파에 속한 사람들(the Epicureans)이나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우연히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또한 참으로 겸손한 사람들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정확히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기계적인 섭리 과정만 있다고 하면서 그것에 우리가 노예적으로 순응해야 한다고 믿었던 스토아 학파 사람들처럼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은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했다(행 17:18). 바울이 그 사람들의 생각이 옳지 않다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들의 철학적 사유와 그들과 직간접으로 연관된 이 세상의 사유들이 옳지 않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분명히 천명하면서 그 말씀이 가르치는 한계 내에서 사유하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진정한 모든 것은 다 말씀의 한계 내에 있는 것이다. 종교와 모든 것을 ‘이성의 한계 내에서만’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의 근원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항상 모든 것에 대해서 이성이 아닌 말씀의 한계 내에서 생각해야 한다.말씀의 한계 내에서 섭리 과정을 보면 나타나는 놀라운 결과말씀의 한계 내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생각하면 섭리 교리야말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는 교리’다. 왜냐하면 말씀의 한계 내에서 생각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덕분에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은혜로우신 하늘 아버지의 관리하심과 돌보심에 의해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하게 된다.하나님께서 아버지 같이 구속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돌보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불러 왔다. 모든 것이 잘되는 순조로운 환경에서는 이것을 인정하기가 비교적 쉽다. 그러나 죄와 악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예를 들어서 모든 시대의 순교 현장이나 전쟁 등의 상황에서, 그리고 이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고백할 수 있을까?그러나 바로 이런 데서 섭리 신앙의 묘미가 나타난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죽는다고 해도 그 존재 자체는 하나님에 의해 보호된다. 그 영혼은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있다가,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 몸이 부활하여 영육간의 온전함을 화복하여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몸과 영이 하나 되어 수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사람들이 불행한 일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본질적 존재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물리적으로 죽는 죽음을 무시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 세상의 어려움과 죽음은 심각하고 큰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우리의 근본적 본질에는 아무런 손상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의 가장 위협적인 것이 사망과 음부고, 이 세상의 가장 큰 권세가 음부의 권세(음부의 문)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도 다 하나님의 섭리의 과정 속에 있으며, 고난과 물리적 죽음이 모든 것의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잘 배울 수 있다.우리가 무엇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하나님을 참으로 아버지로 모시지 않는 사람들은 물리적 죽음 뒤에 더 심각한 영혼의 고통이 따르고, 예수님의 재림 후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그들의 죄악에 대해 정죄받고, 그에 상당한 형벌을 선고받아 영원히 몸과 영혼의 고난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가르쳐 준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심지어 성경의 그런 가르침을 무시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래도 성경은 명백히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하여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그리스도와 같이 살아난 사람들(갈 2:20)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나의 자리에 서서 정죄를 받으셨다는 이 복음의 선언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인다. 최후의 심판대에서 내가 받아야 할 형벌과 저주를 나 대신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받으셨음을 인정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갈 3:13) 바울처럼 선언한다.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아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삶의 과정을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큰 고난이 있고, 심지어 자신이 물리적 죽음에 처해도 그것이 자신의 본질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을 알 뿐만 아니라 그런 실재를 삶으로 드러내면서 산다. 이것이 섭리를 믿는 사람들의 삶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섭리인 소위 ‘아주 특별한 섭리(providentia specialissima)’에 대한 말이지만, 이것도 섭리의 하나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와 그 백성을 위해 온 세상에 대한 주재권을 행사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 사이’의 구조 속에서는 하나님의 나라, 즉 ‘은혜의 왕국’(regnum gratiae)을 위해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권인 ‘권능의 왕국’(regnum potentiae)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은 모든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돌보심 가운데 있음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혹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고난이 우리에게 올 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능히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면서 마음의 안식을 가지고 고난을 감당해 나가야 한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는 말씀을 그리스도인은 믿기 때문이며, 때로 그 고난이 이해할 수 없고 큰 것일수록 그 과정을 통해서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고 욥과 같이 고백한다. 그리하여 참된 성도는 결국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와 같이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참으로 인정하는 자들의 마음가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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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한계
하나님나라
정신 질환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고찰
by Heath Lambert
2021-02-01
지금 이 세상에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정신 질환 진단을 받고 그 고통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나는 성경적 치료 상담사로서 정신 질환에 대응해서 어둡고 힘든 길을 그런 사람들과 함께 걸어왔다. 만성우울증에서 공황 장애에 이르기까지, 사회에서 우리가 흔히 정신 질환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소외되고 또 복잡한 어려움은 없다. 정신 질환 진단을 받은 사람들이 그 고통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내 삶을 바치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많은 도전이 있다. 그중 하나는 우리가 '정신 질환'이라는 용어를 쓸 때, 사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많은 기독교인이 정신 질환의 본질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내 생각에 정신 질환이라는 단어를 기독교인이 쓰는 경우, 그들은 그 질환을 아주 심각한, 일상 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아주 복잡한 문제를 가진 질병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런 문제를 대하는 기독교인은 흔히 이 질병을 아주 극단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보통 신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특정 약물이 필요하다고 간주한다. 정신 질환의 어려움을 가진 사람에게 가능한 모든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기독교인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말로 제대로 된 도움을 주고 싶다면, 정신 질환이라는 단어를 쓸 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정신 질환이란 무엇인가정신 질환을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미국 정신과 협회(The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가 만든 ‘정신 질환에 대한 진단과 통계 매뉴얼’(The Diagnostic and Statistic Manual of Mental Disorders, DSM)은 정기적으로 정신 질환의 정의를 바꾸고 있다. 그렇게 자꾸 바꾸는 이유는 심리학에서 내리는 정신 질환의 가장 최신 정의를 따라가기 위해서다. 그런데 종종 그 정의가 또 다른 단체인 전국 정신 질환 연합회(The National Alliance of Mental Illness)가 내리는 정의와 충돌하기도 한다. 비기독교인 심리학자인 에릭 마이셀(Eric Maisel)은 ‘싸이콜로지 투데이’(Psychology Today)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 심리학자들이 정신 질환을 정의하는 방식이 그 병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 되었다고 꼬집었다. 정신 질환 진단을 받은 사람이 진짜 뭔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의 본질이다. DSM은 1952년에 처음 발간되어 정신 질환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언어 시스템을 만들어왔다.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을 압도하는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체계를 만들고 싶어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병이라고 부르는 이 진단에 대한 병리의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병리학은 의사가 질병을 진단할 때 꼭 필요한 것이다. 질병의 원인이 되는 것은 신체적 이상이다. 예를 들어, 몸 속에서 통제할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분열하고 증식하는 대량 세포가 있는 사람은 암 진단을 받는다. 과학자들은 비정상적인 세포 성장과 정상적인 세포 성장을 비교하여 반복적으로 테스트하고 관찰하기 때문에 암에 관한 병리를 알고 있다. 검사하고 확실한 표준과 비교함으로써 의사는 진단 결과를 객관적으로 도출한다. 병리의 구체적인 증거를 보여주는 테스트를 수행함으로써 의사는 비로소 환자에게 어떤 병에 걸렸다는 의학적 진단을 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DSM에 나오는 정신 질환이 다른 질병과 동일한 수준의 의료 정밀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불행하게도 DSM에 기재된 질병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경우, 그런 질병이 진짜로 있는 건지 아닌지에 대한 의학적 검사가 이뤄진 적이 없다. 일반적으로 DSM에 나열된 장애는 의학이 질병이라고 부르는 대상과 구분되는 몇 가지 특성이 있는데, 다음은 그중 세 가지다. 1. 병리학은 없고 대신 위원회의 투표만 있다의학에서 다루는 다른 질병과 달리, 심리학에서 다루는 질병은 위원회의 투표로 결정된다. 워낙 다양한 버전의 DSM이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각기 다른 위원회가 어떤 때는 새로운 병을 넣기도 하고 또 있던 것을 빼기도 하고, 또 이리저리 수정을 하기 때문이다. DSM의 역사를 보면 이런 사례에 대한 증거는 수도 없이 많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동성애다. DSM의 초기 버전은 동성애를 정신 이상으로 분류했다. 그런데 1974년에 미국 정신과 협회는 DSM 두 번째 버전에서 동성애를 제외했다. 동성애가 15인 위원회 투표에 의해서 정상적인 것으로 결론났기 때문이다. 이 위원회는 새롭게 발견된 어떤 과학 정보도 참고하지 않았고, 단지 동성애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하는 정치적 압력에 반응했을 뿐이다. 물론 DSM에 있는 모든 질환이 동성애처럼 다 정치적인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확실한 한 가지는 DSM에 기재된 모든 질환이 투표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없어지고 또 다시 수정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투표로 병을 결정하는 방식은 암, 당뇨, 그리고 알츠하이머를 진단하는 의학의 방식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2. 병리학은 없고 대신 주관적인 행동 묘사만 있다객관적인 의학 검사는 병리를 발견하는 생체검사, 피검사, 엑스레이, 그 외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병을 진단한다. 그런데 심리학은 정신 질환을 결정할 때 전혀 다른 방법을 쓴다. 무엇이 정상이고 또 무엇이 정상이 아닌지를 결정하는 바로 그 위원회가 해당 질병을 정의하는 행동적 특성에 관해서 투표를 한다. 그런 방식에 의해 병으로 결론이 난 한 사례가 바로 우울증이다. DSM 네 번째 버전을 담당한 위원회는 2주 이상 기분이 우울하고 또 우울증에 할당된 증세 아홉 가지, 예를 들어 잠을 자는 시간이 바뀐다, 활동량이 바뀐다 그리고 죄책감을 느낀다 등등 중에서 다섯 개 증상에 해당되는 사람은 심각한 우울증이라는 정신 질환이 있는 것으로 결정했다. DSM 다섯 번째 버전을 담당한 위원회는 우울증에 해당하는 요건에 큰 변화를 주었는데, 그 결과 남편이 죽어서 깊은 슬픔을 느끼는 여자는 이제 우울증 진단을 받게 되었다. 이런 DSM의 요건에 맞는 사람은 문제가 있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기독교인은 그들을 도와야 한다. 그러나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행동 양식에 따라 의학적 진단을 내리는 것은, 병리를 찾아서 약을 처방하는 의학과는 거리가 있다. 3. 병리학은 없고 도덕적 행동만 있다DSM이 묘사하는 대부분의 행동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도덕적 범주로 설명이 가능하다. 나는 앞에서도 동성애를 언급했다. 하지만 DSM에서 정신 이상이라고 규정한 GID(성 정체성 이상, Gender Identity Disorder)를 한번 살펴보자. GID는 성전환이다. DSM은 이것을 다른 성 정체성을 향한 강하고 지속적인 끌림과 현재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불편함으로 정의한다. GID 욕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다른 성에 속한 사람인 듯이 살고, 종종 그쪽 성과 관련 있는 옷을 입거나 행동을 하곤 한다. 심리학자들은 GID 치료를 위해서 여러 종류의 치료를 제안한다. 카운슬링에서부터 '맞지 않는' 성 때문에 오는 고통을 이겨내기, 그리고 성을 바꾸는 수술에 이르기까지.GID에서 근심하는 마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이미 그의 말씀을 통해서 드러낸 도덕적인 문제를 의학적으로 다루려는 것이 DSM의 특징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과 의미하지 않는 것증세에 대한 어떤 설명도 실제 정신 질환으로 진단받은 사람들이 삶에서 겪어야 하는 심각한 고통을 줄일 수는 없다. 정신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심층적이고 다양한 도움이 필요하다. 정신 질환이 있는 사람들 중에는 종종 의학적 도움이 필요한 신체 병리를 수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정신적 문제는 단순한 의학적인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정신 질환을 가진 사람을 돕고 싶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어떤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서 바로 이해해야 한다. 만약에 정신 질환이 병리 단계에서 비호지킨 림프종(Non-Hodgkin’s Lymphoma)과 같은 수준이라면, 우리는 지금 DSM을 쓰는 세속적인 심리학자들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꼴이 된다. 성경적 인류학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인간이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믿는다. 이것은 성경이 분명하고도 또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내용이다(창 2:7; 마 10:28; 고후 5:1; 딤전 4:8). 성경은 인간이 육체적인 문제 뿐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도 있다고 알려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 가지 영역으로 이루어지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이분법이라고 하는 성서의 이런 가르침은 경제적으로 힘들 때 주님을 의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만큼이나 두통이 있을 때 타이레놀을 복용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분법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가 된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다 영적인 것으로 돌리는 것은 죄가 될 뿐 아니라 무지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든 문제를 다 본질적으로 육체적인 차원으로만 환원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많은 기독교인이 정신 질환 진단을 받은 사람을 보면서 그들의 상태가 워낙 심각해 보이기 때문에 그 문제가 육체적인 문제로까지 연결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인간성과 영혼의 소중함에 관한 성경적인 이해에 근거할 때, 심각한 문제라고 해서 반드시 의학적인 진단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욥의 극심한 슬픔을 보자. 살인을 일으킬 정도로 극렬했던 사울의 분노를 보자. 느부갓네살의 이상한 행동을 보자. 그리고 신약성경에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들의 발광은 다 극단적인 영적 문제가 일으킨 증세고, 거기에는 그 어떤 의학적인 도움도 소용이 없다. 따라서 기독교인이라면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꼭 의학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가정은 버려야 한다. 우리는 극단적인 것을 좋아한다. 문제들이 딱 하나로 정리되고, 다른 요소가 끼어들지 않으면 더 편하고 좋다. 성경이 말하는 이원론은 문제가 육체적일 수도, 영적일 수도 또 둘 다일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도울 때는 의학적 도움이 필요한 육체적 문제에 대한 경각심과 더불어 오로지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만이 필요한 영적인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함께 갖고 있어야 한다. 아쉽게도 DSM이 말하는 정신 이상 치료법은 육체의 문제와 영혼의 문제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면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정신적인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기독교인의 관심이 커지기를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우울증, 불안 장애 및 성 정체성 장애로 진단을 받은 사람들을 향해 그 문제를 단지 의학적인 문제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의학적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약물을 복용하라는 말 이상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우울증에서 GID에 이르기까지, 영혼이 갇혀서 말도 못할 정도의 고통을 받는 이들을 영혼의 위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그리스도인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우리가 정신 질환을 보면서 단지 의학적인 범주에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정신 질환이라는 그 말을 제대로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약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약이 필요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위대한 의사만이 제공하는 그 약은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의사도 결코 줄 수 없다. 원제: Christian Reflections on Mental Illnes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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