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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교회를 세우는 권징
by Fred Greco
2019-09-06
권징이라는 단어는 많은 기독교인의 마음에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오늘날 권징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도록 명령하는, 억압적이고 시대에 맞지 않는 폭군의 이미지를 풍긴다. 교회 내외에서 공개적으로 발생했던, 권위를 남용한 여러 사건들을 고려할 때, 권징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또 동시에 기독교인이 오늘날 누리는 자유라는 기준으로 바라볼 때, 권징은 더욱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각각의 기독교인은 자신의 신앙과 신앙 생활에 대하여 스스로 알아서 판단하는 게 맞다는 생각과도 조화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지난 오랜 교회 역사 속에서 권징이 참된 교회를 판단하는 시금석으로 여겨졌는지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권징의 진짜 목적을 기억해야 한다.바른 교회를 가르는 시금석종교개혁 시절부터 신학자들은 참된 교회와 가짜 교회를 가르기 위해서 세 가지를 시금석으로 삼았다. 이는 하나님 말씀의 바른 선포, 올바른 성례 집행, 그리고 적절한 권징의 행사였다.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선포하고 또 올바르게 성례를 집행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겠지만, 참된 교회에 반드시 권징이 있어야 한다는 데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권징은 말씀 선포 및 성례와 동일하게 참된 교회를 만드는 핵심 요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선포되고 교육되는 것만으로는 바른 교회가 되는 데에 부족하다고, 무엇보다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지 않은가? 또한 성경은 반드시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에 따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지 않은가(롬 2:13; 약 1:22)? 성례에 참여할 사람을 교회가 제대로 결정하지 못한다면 성례는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 그러므로 권징은 하나님의 가족을 바로 지정함으로써 주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주님이 직접 만드신 방법이다. 교회는 단지 조직이 아니다. 교회는 죄인을 구원해 그들을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구체화된 현장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된다. 위대한 삼위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백성이 심판의 보좌 앞에서 단지 죄가 없다고 선언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롬 5:1). 그는 구원받은 죄인들을 당신의 자녀로, 하나님 가족의 일원으로 만들기를 기뻐하신다(요 1:12). 이런 가족의 개념으로 교회를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권징이 가진 목적과 그 속에 숨은 축복까지 깨달을 수 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자식의 잘못을 바로잡고 격려하는 것을 소홀히 할 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하는 목사와 장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도 서로를 바로잡고 격려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권징과 제자도교회 생활에 필요한 권징을 좀 더 잘 이해하려면, 우리는 주변에서 들은 이런저런 사건이 아니라 성경이 주는 렌즈를 통해서 권징을 바라보아야 한다. 권징이라는 단어는 재판, 판결 그리고 벌과 같은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도록 하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건 성경이 말하는 주된 권징의 사용 방법이 아니다. 성경적 권징은 그 어떤 단어보다도 ‘제자’라는, 우리와 친밀한 그 단어와 훨씬 더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이다(마 10:24).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명령을 잘 관찰하고 배우는 데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제자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마 28:19-20).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제자는 주님의 방법을 배워야 한다. 바울은 바로 이런 의미로 에베소서 6장 4절을 썼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신약에서 제자의 의미로 쓰인 그리스 단어는 넓은 의미로 교육 또는 훈육(특히 어린아이를 향한)에도 쓰인다. 누군가를 제자로 만드는 것은 그들이 바른 길을 가도록 훈련시키고(잠 22:6), 소중한 대상을 사랑으로(계 3:19) 세워 주는 것을 의미한다(히 12:5-11). 성경적 권징은 이게 다가 아니다. 성경은 은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배우는 데에도 권징이 필요하다고 알려 준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권징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늘 아버지로부터 오는 가르침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주님은 그분의 교회 안에 참 목자이신 주님의 지시를 받은 작은 목자들을 만들고, 그 작은 목자들을 통해 양 무리를 세우며 성장시키기로 하셨다. 주님은 그들을 통해서 그분의 백성을 권징하신다(엡 4:11-16).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권징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곳도 아닌 교회에서 이뤄지는 권징은 결코 세상 법정과 같은 공식적인 현장에서 시작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 지도자가 적절한 가이드와 지시, 그리고 필요한 경우 성경에 근거한 훈계를 주는 것으로 권징은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바로 세워지기 위해 무엇보다 그분의 명령을 잘 알아야 한다. 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 주님이 먼저 걸어가신 길을 알아야 한다. 정말로 현실적인 의미에서, 권징하는 교회의 일원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가르침을 받고 또 필요한 경우에 제약까지 받는 소중한 특권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이다. 교회 권징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참된 교회를 가르는 시금석이 권징이라면, 또 권징이 그분의 자녀를 사랑으로 훈육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면, 왜 보다 많은 교회에서 권징을 시행하지 않을까? 왜 권징이 그토록 사소하게 취급되는 걸까? 이는 권징이 종종 잘못된 형태로 시행되기 때문이다. 자녀를 신실하게 성경적으로 훈련하는 부모처럼, 교회 지도자도 그들이 가진 권위를 일관성 있게 또 사랑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구약성경은 요셉을 편애한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편애가 가진 위험을 잘 알려 준다. 또 엘리 선지자가 그의 아들들을 제대로 훈육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훈육의 부재가 주는 위험도 잘 보여 준다. 실로 주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들을 훈련시키신다(히 12:6). 교회도 주님의 본을 받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권징은 사랑의 표현이어야 한다. 이 말은 권징이 결코 상황이 심각하게 악화되었을 때에 어쩔 수 없이 행사하는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권징은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시점에 사용하는 최후의 수단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권징은 책임, 성장, 용서 그리고 은혜의 모습으로 교회 전체에 고르게 스며든 하나의 문화이다. 모든 교회 멤버는 죄로 힘들어 하는 다른 지체를 도와야 하는 책임을 진다. 그 책임은 판단과 비난이 아닌 온유와 회복을 향한 기대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도 얼마든지 같은 죄에 빠질 수 있음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갈 6:1). 마태복음 18장이 보여주는 모습은 권징이 소송에 대한 대안이라는 게 아니다. 일단 내가 먼저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권면하는 작은 단계에서부터 필요하다면 교회에 문제를 알리는 큰 단계로까지 나아가는 모습은, 성도가 인내를 가지고 사랑으로 최선을 다해 지체를 대하는 사례이다. 교회 지도자는 권징을 행할 권위가 결코 자신으로부터 오는 게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권위는 바로 그리스도가 허락하신 목자로서의 권위이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엡 1:22-23; 골 1:18). 교회를 흠 없이 세우는 분은 그리스도이다(엡 5:27). 따라서 지도자는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권위적으로 또는 독재자처럼 행동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벧전 5:3). 또한 권징을 행하면서 누군가를 편애하여 그 눈을 감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약 2:1). 권징은 결코 은밀한 처벌이 아니라, 죄인을 회복시키고 관계를 치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교인들이 바로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지도자는 공개적으로 권징을 행사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권징의 대상이 되는 교인이 불필요한 노출이나 잠재적인 소문의 대상이 되어 명예를 손상당하는 일이 없도록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한다. 권징의 목표는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을 더 강건하게 만드는 것이다. 교회 권징의 목표는 무엇인가마지막으로 교회 권징은 기도와 사려 깊은 배려 그리고 일관성이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권징은 교회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목적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교회 권징에는 세 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다. 첫 번째로, 권징은 죄인을 교회로 다시 불러들이고 궁극적으로는 주님께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권징이 사랑으로 행사될 때, 이는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심각하게 바라보게 할 뿐만 아니라, 교회가 결코 죄인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며 또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가 다시 온전하게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아주 현실적인 의미로, 우리는 권징을 통해 복음이 살아 역사하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은 거저 그리고 온전히 우리를 받아 주신다. 두 번째로, 권징은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향한 증인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다. 이는 위선자의 가면을 쓰자는 말이 아니라,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세상에 알리자는 것이다. 즉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용서받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보여 주자는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무엇보다 권징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해져야 한다. 기독교인은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그분의 사랑과 거룩한 품성을 더 드러내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 보여줄 수 있다(엡 3:10).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권징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넘어진 자를 사랑과 겸손으로 회복시키려고 할 때, 그 행동은 우주 속 모든 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향할 뿐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벧전 2:12).출처: www.ligonier.org원제: Church Discipline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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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영광
가장 좋은 무기는 문을 여는 것이다
by Rosaria Butterfield
2019-09-05
오늘날이 위험한 시대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틀리지 않은 생각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세계관을 ‘상호 교차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건 진짜 당신이 누구인가가 얼마나 많은 종류의 차별(victim-statuses)을 받는지에 의해 측정됨을 의미한다. 또 이는 인간의 존엄성은 어떤 종류의 불일치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만 지켜진다는 믿음을 뜻한다.바로 이런 세계관이 그리스도인을 탈(포스트)-기독교 세상에 상륙시켰다. 탈-기독교 세상에서 개인이 이룰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성취는 자치적이고 독립적이며 오로지 자기 자신을 통해서만 삶의 의미를 찾는 개인이다. 이처럼 기독교 전통이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지워지게 된다면, 조만간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던 로마의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아마 사려 깊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충분히 이와 같이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조류에 밀려 후퇴하는 것은 얼마나 유혹적인가? 우리 자신과 자녀들이 악에서 피할 때에, 그 마음이 두려움에 휩싸이는 게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또 성경적 진실성에 근거해서 말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하는 말은 모두 증오심의 표현이라고 손가락질 당할 때, 두려움에 떠는 것은 또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인의 가장 좋은 무기는 문을 여는 것이다.하지만 과연 어떻게 문을 열 수 있을까? 특히 과거에 크게 상처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을 향해 어떻게 문을 열 수 있을까?1. 듣는 법을 배워라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다는 좋은 소식, 즉 복음을 전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죄로부터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진짜 구원은 그리스도인 이웃으로부터 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지닌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먼저 말하지 말고 들어야한다. 그것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탈-기독교 공동체에서, 당신의 말이 가진 효과는 당신이 다른 사람과 맺은 관계의 수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청중을 알아보고, 세상 기준으로 볼 때 선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최선의 영적 무기는 문을 열고, 테이블에 신선한 커피와 눈물이 쏟아질 때 필요한 크리넥스를 준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눈물은 반드시 쏟아질 것이기 때문이다.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마음에 영원을 기록하셨으며, 그 심겨진 영원의 일부는 존엄성에 대한 갈망이다. 주님이 없는 삶은 힘들다. 그런 삶은 딱딱한 가장자리와 가파른 경사면으로 가득하다. 그런 삶에는 희망이 없고, 그런 삶이 주는 고통은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만 구속의 고통을 준다. 이웃 사람들이 가장 아파하는 곳이 어딘지 알 정도로 그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또한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라. 예수님이 들을 귀가 있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라.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이웃에게 시간을 낸다는 것은 내가 즐길 오락 거리를 줄이고 대신 하루의 여유 시간을 준비하고 또 예산을 책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미 내 이름을 아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받지 못한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들을 위해 과감하게 새로운 길에 도전하라. 2. 당신의 마음과 집을 준비하라탈-기독교 세계에서 호의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낯선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이웃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그 이웃을 하나님의 가족이 되도록 초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정은 이 일을 성취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가정은 교회와 세상을 이어 주는 다리이다.첫 번째 도전은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계급과 시간의 장벽은 이 중요한 기독교 사역을 이어 가는 데에 장애물로 작용한다. 그러나 교도소, 난민, 위탁 양육 프로그램은 얼마든지 당신 주변에 있으며, 이들은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안전한 가정은 기독교가 제시할 수 있는 위탁 보호에 대한 대안이며, 교회의 많은 가정이 이미 참여하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이 낯선 사람을 찾을 때에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집을 성이나 요새 또는 박물관이 아닌, 병원과 대사관 혹은 인큐베이터로 생각해야 한다. 두 번째 도전은 상대와의 대화를 그리스도에 관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바꾸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매일 밤 드리는 가정 예배를 통해 대화의 주제를 오락 거리에서 영원함으로 바꾸는 어려운 과제를 자연스럽게 다루어 왔다. 그 방법이 궁금한가? 가장 중요한 건 매일 밤 예배를 거르지 않는 것이다. 저녁 식사 후, 남편이 짧게 성경 말씀을 전하고 나면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또 때로는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를 마감한다. 우리는 매일 밤 이와 같이 가정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그 시간에 사람들을 초대해서 예배에 참여시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식사 후 접시는 알아서 싱크대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는 대신 성경과 커피잔이 놓였다. 이렇게 매일 정해진 시간에 가정 예배에 자연스럽게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 오랜 시간 잘 준비해서 펼치는 전도 이벤트보다 훨씬 더 성공할 확률이 높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초대와 모임을 진행했다. 교회에 다니는 결혼하지 않은 싱글들과 또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웃들이 일을 마치고 우리 집에 와서 저녁 식사를 돕는다. 이건 아주 재미있는 일이었다. 종종 식탁은 엄청난 세탁물이 놓이는 장소가 되기도 했고, 때로는 수학 수업 때문에 힘들어 하는 아이가 함께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힘을 합쳐서 많은 세탁물과 마치지 않은 수학 숙제를 처리할 때, 우리는 그 일을 훨씬 더 잘 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다른 이웃들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실 마약 흡입 또는 외도와 같은 비밀스런 삶을 가진 사람은 쉽게 계획을 짜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점에 특히 더 민감해야 한다. 아무리 계획을 짜더라도 그런 사람들은 약속한 시간에 과연 그 정신이 멀쩡한 상태일지 혹은 몇 주 후에도 여전히 안전한 상태일지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의 초청이 언제나 열려 있고 또한 무엇보다 규칙적이라면, 그런 사람들도 당신의 식탁에 함께 앉을 수 있다. 믿는 사람이든 아닌 사람이든, 모두 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투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눈물과 난장판 속에 살지만, 우리가 이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 이제 식탁에는 평화가 내려앉는다. 우리는 모두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때로는 의자를 더 들고 와야 할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바닥에 앉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우리는 가진 것을 다 내어놓았다. 대화를 위해 전화기는 잠시 치웠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를 꺼내 놓았고, 우리가 가진 질문도 말했다. 믿지 않는 이웃이 우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마음을 열고 말을 할지에 관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함께 저녁을 먹고 성경을 펼쳤고, 동시에 우리의 마음도 함께 열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들어와 달라고, 들어오셔서 우리의 대화를 멈추는 게 아니라 그 대화가 더욱 깊어지게 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도록 기도했다.3. 집 열쇠를 주어라지금 우리는 삶을 파괴할 정도의 깊은 외로움이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외로움을 결코 정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고아가 아들과 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당신의 삶이 친밀함과 소속감을 가진 인생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그리스도인이 성취, 소유, 자만심으로 가득한 허영과 같은 우상들을 허용하는 순간, 그 결과는 복음의 훼손으로 이어진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말하는 성경의 우선순위를 그만 생물학적 피가 그리스도의 피보다 더 우선순위에 있다고 말하는 거짓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건 마치 가장 취약한 형제 자매들을 달려오는 버스 밑으로 밀어 버리는 것과 같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과거에 누리던 삶(때로는 가족과의 삶)을 포기할 때 오는 것이지, 결코 기존의 삶 위에 추가되는 게 아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잃는 것이 곧 얻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그렇게 될 수 있다. 마가복음 10:28-30의 내용이다.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보자. 그들은 모든 것을 다 포기했다. 이에 따라오는 상실감은 자연스럽게 슬픔과 괴로움, 몸의 기억과 야간 공포 등등, 복음을 전하는 삶이 당연히 치러야 하는 복잡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이 구절은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모든 것을 버리는 삶을 사는 사람은 이 생애에서 백배의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말한다. 그 백배의 복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과 나로부터 온다. 아니,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백배의 복은 따뜻한 포옹, 정기적 혹은 밤에 먹는 식사와 기도, 서로의 짐을 지는 것, 그리고 서로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것을 포함한다. 이는 복잡하지만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 또한 이는 기혼이거나 싱글인 사람들, 젊거나 나이 든 사람들, 튼튼한 몸을 가졌거나 약한 사람들 모두를 포함한다. 백배의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속함은 영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육적이고 물질적인 측면도 포함한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뭔가 특별한 것을 약속한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이 하나님의 가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함께 식탁을 나눌 장소가 있음을 의미한다. 어떻게 해야 현관문을 지나 식탁으로 갈 수 있을까? 당신, 그리스도인은 열쇠를 갖고 있다.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에게, 복음은 현관 열쇠와 함께 온다. 무엇이 당신을 멈추게 하는가?세상 사람들의 눈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족들이 모여 또는 독신자와 아이들이 다 함께 모여 생명을 주는 공동체, 시간을 들여서라도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건네는 그런 공동체로 보인다면, 아마 그들도 시편 시인의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아마 구원받지 못한 이웃은 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우리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로 생각할 것이다. 가장 은밀한 비밀도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온 힘을 다 바쳐서라도 기꺼이 도우려고 하는 사람들, 그들은 우리를 그러한 사람들로 바라볼 것이다. 또한 이 세상이 가진 악의 문제를 가장 현명하게 대처하는 사람들로 우리를 볼 것이다. 우리가 삶을 투명하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은 비록 그리스도인이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복음만이 인간을 치유하고 도우며 또 발전시킨다는 사실을 볼 것이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내미는 손길로 인해 그들은 차마 상상할 수 없는 가장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환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가 된다. 당신이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원제: The Best Weapon Is an Open Door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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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기독교
언약으로 이루어 가시는 구속사
by Richard Phillips
2019-09-04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구약성경 다음에 신약성경이 나온다는 정도는 안다. 성경에 대해서 조금 더 아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모세오경이 나오고 따라서 역사서, 시가서, 그리고 선지서가 나온다는 정도를 안다. 신약에 들어서는 가장 먼저 복음서가 나오고 이어서 사도행전, 서신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뒤따른다는 것도 안다. 이런 순서는 교회가 정경을 어떻게 구성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나 과연 성경의 구조 자체가 구원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충분할까? 종교개혁 신학자들이 오랫동안 이해했듯이, 성경은 '언약 신학'이라고 부르는 데 필요한 충분한 구조를 제공하고 있다. 언약 신학은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을 통해서 구속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신학이다. 그러나 언약 신학은 단지 종교개혁자들만이 바라본 성경의 이해가 아니라 성경 스스로가 드러내는 구원의 방식이다.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백성의 역사미국 역사에 대한 이야기만 해도 여러 가지 다양한 접근법으로 바라볼 수 있다.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되는 과정을 전쟁이라는 기본틀을 통해서 이해할 수도 있고, 또는 대통령 제도, 놀라운 발명품들, 혹은 개인의 자유 확대라는 틀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이해를 위한 이런 기본틀은 미국 역사를 구성하는 많은 데이터를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그렇다면 성경은 어떤가? 성경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가? 최근 나는 비행기에서 바로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할 기회를 만났다. 한 젊은 유대인 여자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내게 이렇게 물었다. “기독교인은 뭘 믿나요?” 이 얼마나 놀라운 기회인가? 나는 다양한 교리를 통해서, 그러니까 창조와 죄, 심판 구원 그리고 영생에 대해서 설명할 수도 있었다. 교리를 통한 접근은 꽤나 신선하고 효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교리 대신 성경 속 이야기를 풀어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언약 신학을 그녀에게 설명했다. 내가 이 방법을 선택한 이유는 그녀가 가진 유대인이라는 정체성과 기독교 신앙을 연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이 그분의 구원 메시지를 자신의 백성들에게 알려줄 때 쓰셨던 바로 그 방법이기 때문이다. 먼저, 언약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언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명과 축복을 주겠다고 하신 약속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이라는 축복 안에서 언약을 맺을 때에도 약속을 한다. 우리가 혼인 서약이라고 부르는 공식적이고 강제적인 계약이 바로 그 약속이다. 혼인 서약은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그들을 하나로 묶는데, 이 안에는 그들만이 누리는 특권과 더불어 책임이 포함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그분의 주권적이고 강제적인 조건에 따라 스스로를 인간과 묶으셨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내가 그 유대인 여자에게 한 대답을 살펴보자. 나는 이렇게 시작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온전히 내게 순종하기만 하면 너를 영원히 살게 하시겠다'는 생명의 언약이죠. 그런데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그 언약을 깨 버렸고, 그렇게 죄를 지어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그의 모든 후손도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한 희생의 피를 통해, 그러니까 오로지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을 주시겠다는 또 다른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후에 하나님이 홍수를 통해 죄악에 찬 인류를 멸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분은 또 하나의 언약을 노아와 맺으셨습니다. 이는 믿음을 가진 인간을 구하고 또한 자신을 위해 그 거룩한 백성을 보존하시겠다는 언약이었죠. 나중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또 언약을 맺으셨어요. 그 언약은 아브라함이 믿기만 하면 그에게 축복의 땅과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나는 기독교인이 가진 믿음에 대한 설명을 이어 갔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것,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세우겠다는 언약을 맺으신 것 등을 설명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언약, 그의 자손을 통해서 영원한 왕국을 세우겠다고 하신 그 언약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 즉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서 그분의 완전한 삶과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 약속을 이루신다는 것, 그리고 이를 믿는 이에게 바로 그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 설명은 언약 신학을 떠받드는 성경적 기초를 보여 준다. 다시 말해 이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길을 드러내는 성경의 방법이고,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이야기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언약 신학을 믿는 것이다.두 개의 언약 이야기성경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 죄와 구원이다. 성경은 이 두 가지를 각각 다른 두 가지의 언약과 연결시킨다. 하나는 언약을 깨뜨린 인간이고, 또 하나는 언약을 충족하신 그리스도이다. 이 두 가지 언약, 즉 행함에 의지하는 언약과 은혜에 의지하는 언약은 성경의 가르침이 제대로 세워지는 데 필요한 구조를 제공하며, 또한 우리가 구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내가 유대인 여자에게 말했듯이,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은 아담과 그의 후손이 이 언약 조건에 근거하여 에덴동산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셨다. 그 언약 조건은 다름 아닌 “완벽하고도 개인적인 순종”이다(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7.2). 바로 그 언약에 관한 하나의 테스트는 나무와 관련된 것이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하나님은 이렇게 명령하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순종을 통해서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계속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언약을 깼고, 결국 죽음을 맞게 되었다. 개혁 신학은 이것을 “행함의 언약”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아담이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그가 살지 죽을지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행함의 언약을 파기한 아담의 불순종은 커다란 문제가 되었고, 성경의 나머지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대답을 기록하고 있다. 파괴되어 버린 행함의 언약에 대한 처방으로 하나님이 들고 나오신 대답은 은혜의 언약이다. 악마를 상징하는 뱀이 첫 번째 인간을 죄에 빠지게 한 이후, 하나님의 은혜는 뱀의 패배라는 장면을 통해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신학자들은 이것을 최초로 제시된 원시복음(Protoevangelion)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이에 이어서 은혜의 언약이 어떻게 이어질지를 보여 주셨다. 즉 죄인을 대신해서 죄 없는 자가 희생될 것이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의로움이 죄인들에게 주어지며 그들이 져야 할 형벌은 그의 피로 대신 치르게 될 것을 보여 주셨다. 창세기 3장 21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은혜의 언약은 그 이후 이어진 세대를 통해 드러나는 복음의 이야기에 놀라운 통일성을 제공한다. 노아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은혜의 언약이다. 그 언약 덕분에 인류는 멸망하지 않고 구주가 탄생할 때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단지 많은 후손만을 약속한 게 아니었다. 그건 언약을 온전히 성취할 단 한 명의 후손에 대한 언약이기도 했다(갈 3:16). 모세 시대가 되어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한 나라를 이루었고, 모세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죄 용서를 위해 희생 제사를 집례할 제사장을 제공했다. 하나님 왕국도 통치를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다윗과 맺으신 언약은 결코 실패하거나 죽지 않는 왕을 약속했다. 그러나 파괴된 행함의 언약은 길고 긴 세대를 통해서도 여전히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아담과 그의 후손은 여전히 완벽한 순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의로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이 구절이야말로 언약 신학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분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마 5:17). 다시 말해 그분은 우리를 대신해서 행함의 언약을 완성하러 오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심으로써 죄인들이 은혜의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초를 놓았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새 언약”을 세운다는 의미이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의 언약이 온전히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자신의 대속 죽음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셨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언약 신학은 구약과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서신서에 실린 사도적 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하나님은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라고 하실 수 있을까? 언약 신학은 이에 대한 대답을 제공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성취하신 행함의 언약뿐 아니라 은혜의 언약에 의해 바쳐진 그분의 피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은 의롭게 된다. 여기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이 있다. 우리가 하는 행함과 별도로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어떻게 의롭게 만드는가? 이에 대하여 언약 신학은 성경의 대답을 들려준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함의 언약을 어김으로 하나님께 진 빚을 대신 갚으셨고, 그 결과 우리는 이제 은혜의 언약에 따라 오로지 믿음만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받는다. 역사는 결국 그분의 이야기이다언약 신학은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사역을 드러내어 구원에 필요한 성경의 구조를 잘 드러낸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고후 1:20). 이 기록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 약속을 가리키고 있다. 하나님은 은혜의 선물로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그 답은 그의 언약 속에 다 들어 있다. 이는 바로 생명, 지키심, 약속의 땅, 영광스런 백성, 선지자, 의로운 왕, 그리고 속죄양이다. 이 모든 약속들은 우리가 언약의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온전히 '예'와 '아멘'으로 받을 때에만 주어진다. 그러므로 언약 신학이 말하는 성경의 역사는 실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맛볼 수 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Redemptive History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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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도 아우구스티누스가 필요하다
by Bryan Litfin
2019-09-03
2017년에 출판된 로드 드레허(Rod Dreher)의 ‘베네딕트 옵션’(The Benedict Option)은 광범위한 기독교 독자층을 사로잡으며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성공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첫 번째는, 쇄도하는 반기독교 세력에 상반된 입장을 견지해 온 보수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종을 울렸다는 점이다. 드레허는 “너무 늦었다”라고 말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이젠 더 이상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이 중심이 된 미국 사회로 돌아갈 수 없다.” 이에 대해 우리 모두는 그의 판단이 옳았다고 인정하게 된다. 준비가 됐든 그렇지 않든, 상황은 이미 바뀌었기 때문이다.두 번째는, 드레허가 지적하는 포인트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는 점이다. 그는 뒤로 돌아가는 길이 곧 전진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기독교 문화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유산을 활용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6세기의 수도사인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가 갑자기 우리의 대안이 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여기서도 드레허의 판단은 옳았던 것이다. 그는 미래란 과거에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스도인은 오래 전부터 이 땅에 존재해 왔으며, 우리는 작금의 새로운 암흑 시대를 맞이하여 역사의 교훈을 잘 배워야 하는 상황에 있다.‘베네딕트 옵션’의 부제는 ‘탈기독교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선택’(A Strategy for Christians in a Post-Christian Nation)이다. 물론 기독교의 기본 정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것은 우리가 속한 국가나 사회만이 아니다. 이미 복음주의 교회마저도 탈기독교화되었다. 지난 40년 간 교회가 쏟아부었던 노력, 즉 기독교 신앙을 시대정신에 ‘상황화’하려는 노력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사회적 또는 도덕적 구조보다는 교회 자체를 변화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 대부분은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되었지만, 그들 중 우리 같은 사람으로 변화된 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목회자들도 이런 현상에서는 예외일 수 없었다.만일 목회자가 너무 오랫동안 세상을 바라본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변질되고 만다. 혹 기독교 신앙을 비신자에게 상황화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고결한 목표를 가지고 있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는 “당신은 곧 당신이 사랑하는 대상과 같이 된다”라고 말했다. 이를 좀 더 실제적으로 표현한다면, “당신은 곧 당신이 바라보는 대상과 같이 된다”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신이 속한 사회가 권력, 재물, 쾌락을 숭배한다면, 그러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그 우상들을 오랫동안 바라보기만 한다는 일은 쉽지 않다. 대중문화에서 겉모습이 화려한 연예인이나 인기 있는 전문가가 추앙받는 모습을 볼 때,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전략을 따라하게 된다. 또 어느 회사나 단체가 국제 무대로 진출하여 새로운 도약을 하는 성장을 보일 때, 당신 안에 잠재된 기업가 정신이 깨어나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목회자는 유명 인사가 되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다가, 결국에는 CEO처럼 되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 밖에 있는 세상이 교회 안에 있는 양들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하지만 돌아보면, 우리가 따라야 하는 예외적인 모습도 있다. 과거에 교회를 섬겼던 주교나 장로들은 자신에게 할당된 교구에서 신실하게 섬기다가 순교로 마감하는 사역을 열망했다. 그들의 목표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속한 어느 공동체에 머물며 꾸준히 섬기는 데 있었다. 이렇듯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은 소규모의 삶, 내실을 다지는 삶, 지역을 섬기는 삶, 그리고 겸손한 마음을 품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러한 삶이 전혀 무력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을 비우며 축소된 삶을 지향했던 그들이 결국에는 로마 제국을 정복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지난 역사에 꾸준히 적용되어 온 그들의 지혜가 오늘날에도 다시 한 번 적용될 수 있을까?아우구스티누스 프로젝트고대 사회에 목회자로 소명을 받는 일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예증하는 데 아우구스티누스만한 인물이 없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묘사된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은 그를 방탕한 시절을 보내다가 결국에는 밀라노의 어느 정원에서 하나님을 만난 인물 정도로 기억한다. 실제로 그가 회심한 장면은 드라마 같다. 죄 짐에 눌려 고뇌로 가득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께 반항하기를 그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늘 안식이 없던 그의 마음은 그제서야 자신이 오랫동안 갈망하던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리게 된다.그런데 그 이후에는 실제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아우구스티누스의 남은 생애, 즉 목회자가 되어 살아가게 된 여생은 안일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고백록이 아니라, 그의 다른 저술이나 설교문과 더불어 특별히 그의 제자 포시디우스가 기록한 전기를 살펴봐야 한다. 이런 자료들을 통해 오늘날 목회자가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이런 차원에서 그의 목회 사역에서 얻을 수 있는 세 가지 교훈을 아래에 제시했다. 이는 새로운 반기독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지혜롭게 앞을 향해 전진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줄 것이다.1. 수도사의 마음으로 살라아우구스티누스가 교회의 일꾼이 되어 아프리카 히포에서 목회 사역을 하도록 요청받았을 때, 그는 외딴 수도원에 들어가기 위해 형제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 뜻밖의 요청을 수락한 이후로도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소명을 잊지 않았다.포시디우스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음식과 의복 문제에 있어 균형을 지키며 지나친 탐욕이나 그릇된 위선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또한 누군가가 사치품이나 땅을 교회에 기증하면, 그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그 수입을 나누어 주었다. 더 나아가 그의 식단에도 절도가 있어 활동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으면서도 부자들처럼 탐욕스럽게 먹지 않을 만큼의 양만 유지했다. 그리고 식사 시간에는 지적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격려하는 대화를 했다.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부재중인 친구의 명예를 훼손하는 사람은 이 식사에 참여할 수 없다.”물론 개인적으로 거룩을 추구하는 일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졌다. 여자들은 그의 집에서 살도록 허락되지 않았으며, 그 자신이나 다른 형제들이 여자들과 따로 있는 일도 허용되지 않았다. 유혹이 찾아들거나 스캔들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마찬가지로 그는 재물에도 초연했다. 그의 재정은 믿을 만한 직원들이 관리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들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행사할 뿐이었다. 직원들은 연말이 되어서야 아우구스티누스의 승인을 받기 위해 회계 장부를 보여 주었다. 그는 그저 일용할 물품을 교회에서 받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2. 당신의 양 떼에 집중하라아우구스티누스는 목회자로서 자신의 회중을 돌보는 데 주력했다. 그렇다고 바깥 세상에 무관심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당시 아프리카 수도였던 카르다고에서 열린 공회에 자주 참석하곤 했다. 하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늘 히포에 있는 그의 양들에게 있었다.아우구스티누스가 맡은 중요한 의무에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 문제를 판단하는 일까지 포함되었다(고전 6:1-8). 이는 매우 까다롭고 어려웠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일을 매우 진지하게 수행했다. 이 사역을 통해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정의를 베풀었는데, 이는 당시 타락한 세속 법정에서는 뇌물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 일이었다. 또한 그는 지혜와 기지를 발휘하여 도시의 권력자들 앞에서 자신이 목양하는 교회의 지체들을 자주 변호했다. 그 교회의 과부와 고아, 그리고 병든 자들 가운데 그의 따뜻한 목양을 받지 않은 자가 없었다.그뿐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는 올바른 교리를 양 떼에게 가르쳤다. 그는 높은 수준의 사고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시대를 분별하며 당시에 만연한 문화적 폐해를 간파할 줄 알았다. 펠라기우스주의나 도나투스주의와 같은 이단 사상이 발현했을 때, 그는 재빨리 그 해악한 신학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했다. 이처럼 그는 건전한 교리를 식별하는 지혜와 그 교리를 수호하는 용기, 그리고 바로 그 가르침을 따르도록 성도들을 이끄는 목회자의 사랑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양 떼의 몸과 마음을 함께 돌보는 목양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3. 야만인을 두려워 말라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말년에 반달족이 북부 아프리카에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 약탈자들은 스페인에서 건너와 로마제국의 성읍을 하나씩 점령하고 있었다. 그들의 공격은 매우 난폭해서 살인, 강간, 고문, 방화가 잇따랐다. 그들은 많은 이들을 노예로 삼고 교회까지 약탈했다. 당시 그들의 파괴 행위는 오늘날 우리가 ‘반달리즘’(vandalism)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수준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그래서 여러 신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를 찾아와 그 무시무시한 적군을 피해 달아나도 괜찮은지 물었다.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지혜롭고도 용기 있는 답변을 제시했다. 포시디우스는 그 답변이 담긴 편지를 남겨 놓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일반 성도들을 향해서는 야만인을 피해 달아나도 괜찮다고 말하지만, 목회자를 향해서는 양 떼가 모두 피할 때까지는 반드시 뒤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가 섬겨야 하는 교회를 버릴 수 없도록 이끄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결코 깨어져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목회자가 품은 거룩한 소명 의식은 야만족의 테러라도 꺾지 못했을 것이다.당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직자로 임명된 사람에 의해 성례가 베풀어져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그의 견해가 목회자는 반드시 성도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도 영향을 미쳤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무엇보다도 영혼을 돌보며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그의 더 큰 관심이 표현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는 목회자의 “직분 없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도, 그리스도인이 되지도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회자가 박해에 직면해서도 성도의 영혼을 위해 남는 일은 요한일서 3:16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죽는 날까지 목회자로 살았던 사람주후 430년, 연로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병상에 눕게 되었다. 이때 참회의 시편들을 묵상했다고 한다. 당시 성벽 밖에서는 여전히 반달족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 열흘 동안, 아우구스티누스는 계속해서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보냈다. 포시디우스는 이렇게 상기한다. “병들어 눕기 직전까지 그는 뚜렷한 정신과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힘과 열정을 다해 쉼 없이 교회에서 말씀을 전했다.”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돌보던 형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명예로운 장례가 치러졌다. 그는 하나님의 가난한 종으로 물려줄 만한 재산이 없었기에 굳이 유언장을 쓸 필요도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기고 간 게 있다면, 그의 신실한 제자들과 능력 있게 전했던 말씀이 전부였다.모든 목회자가 그와 같은 죽음을 맞이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신앙의 유산을 남겨 명예롭게 생을 마감하며 평생의 복음 사역을 다음 세대가 이어가리라는 확신 가운데 잠든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혹 야만인이 문밖에서 아우성치더라도 말이다.원제: Why We Need More Pastors Like Augustine: Retrieving Ancient Pastoral Practi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성우
목회
리더십
로드드레허
베네딕트옵션
제임스스미스
수도사의마음
포시디우스
야만인
아우구스티누스
아침마다 당신을 묵상하겠습니다
by Marshall Segal
2019-09-02
하나님과 단둘이 있고자 하는 열정 또는 헌신을 잃을 때면, 그분은 그냥 내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여전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선명하게 볼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또 몇 주가 지나는 사이, 눈에 안개가 끼여 시야가 서서히 흐려지면서 나는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고, 내가 얼마나 그분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서도 무뎌졌으며,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할 때만 누릴 수 있는 그 깊고도 강렬한 행복감을 잃었다. 당신도 이런 안개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다윗왕 역시 그 안개를 알고 있었다. 그는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갈망했고, 마침내 구름이 걷혔을 때 이렇게 말했다.“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시 63:5-6).다윗은 우리에게 묵상을 통해 안개를 뚫고 나가라고 가르친다. 그는 단지 말씀만 묵상할 것이 아니라 그분, 곧 하나님을 묵상하라고 말한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묵상은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더 오래 생각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시편, 레위기의 율법, 소선지서, 복음서, 초대 교회 및 바울 서신서 속에 자신의 영혼을 깊이 잠기게 할 때, 우리는 단지 글자가 아닌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우리는 빛나는 영광 속에 계신 그분을 보고, 무한한 지혜로 드러나는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또한 인간의 영혼을 만족시키시는 그분의 독특한 능력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공부하고 영적 훈련을 하기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나기를 권고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일찍 일어나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시 145:5). 새벽과 오후 그리고 밤늦은 시간에 잠들지 않고 앉아서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장엄함을 그리고 그분의 위엄을 기대한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기대한다. 잠보다 더 중요한밤의 시간은 경계병이 적을 감시하는 내내 길게 이어진다. 안전이 잠보다 중요하기에, 누군가는 도시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잠을 자지 않는다. 행여 잠자는 사이에 누가 와서 나를 죽이지 않을까 고민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잠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시 119:147-148).시편 저자는 비록 휴식이 소중하지만 묵상이 그보다 더 큰 만족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잠을 포기한다. 조금이라도 더 자기 위해서 기도와 말씀을 경시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균형을 잃을 것이다. 잠은 중요하다(시 127:2).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아니다. 음식은 중요하다(딤전 4:4; 6:8).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아니다. 결혼과 가정은 중요하다(전 18:22; 시 127:3).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아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즉 잠잠한 가운데 서두르지 않고 그분을 묵상하며 또한 그분께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 그분을 즐기는 것, 이것이야말로 아무리 급하게 느껴지는 다른 어떤 것보다 더욱 소중하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깊은 밤에 깨어 있게 하고 또한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일어나게 하신다면, 이는 잠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 쉬어야 할지, 언제 묵상하고 기도해야 할지 잘 알고 계신다. 만약 필요하다면, 그분은 자명종 시계가 울리기 한참 전에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한번 더 그분의 위엄을 보고 누리도록 하실 것이다. 또한 그분은 자신의 귀를 더욱 활짝 열어 전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의 마음 괴롭히던 그 무거운 짐에 귀를 기울이실 것이다. 당신은 스트레스 때문에, 소화가 안 되서, 또는 다른 어떤 불균형 때문에 깨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건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하나님은 잠자리보다 더 가치있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집중된 애정그러나 집중하는 능력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묵상을 더 이상 은혜로 느끼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인터넷은 길게 묵상하는 능력을 저해한다. 우리가 찾는 대부분의 사이트는 끊임없이 클릭을 유도하고 또한 사용자가 페이지를 옮겨다니며 움직이도록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사람들이 인터넷을 하면서 어느 하나에 온전히 집중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심지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가를 말씀하시는 경우에도 당신은 이에 전혀 집중하지 못할 때가 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시 119:12). 당신은 최근 시편 저자와 같이 뭔가에 집중한 때가 있는가? 무언가에 마음을 온전히 기울인 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것을 아예 거부했던 적이 언제인가? 알람도, 먹을 것도, 혹은 뉴스 속보나 스포츠 경기 결과도 거부하고 오직 한 가지 일에 집중했던 때가 언제인가? 만약 시편 저자가 묵상을 통해서 느낀 이런 기쁨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거의 불가능하거나 달성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면, 이는 우리가 묵상으로부터, 즉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갈구하는 삶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다. 정말 우리는 열심을 다해 하나님을 찾는 그런 갈급함을 잃어버린 것일까? 묵상은 단순히 정신적으로 집중하는 것, 다시 말해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읽고 생각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차가운 동의가 아닌 열정적인 갈망만이 하나님을 찾는 우리의 영혼에 불을 붙일 수 있다.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시 119:48). 묵상은 집중과 깊은 생각, 심지어 지치지 않는 애정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와 같이 묵상하는 사람은 축복받은 자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힘들고 무거운 아침에도우리는 조용한 아침, 방해받지 않는 아침에만 제대로 묵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즉 우리는 묵상을 아무 문제 없이 “평상시”대로 흘러가는 날에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용한, 방해받지 않는, 또한 예상대로 흘러가는 아침이 어떤 아침인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아침은 정신없이 바쁜 시간일 뿐만 아니라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하기 마련인 때이다. 말 그대로 비정상이 정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다. 내가 아무리 계획을 짜고 알람을 맞추어도, 인생은 마구 흘러간다. 아침에는 언제나 예상보다 시간이 모자라고, 어떤 아침에는 아예 시간 자체를 낼 수 없기도 하다. 또한 예상치 못한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는 아침도 있다. 우리는 비로소 왜 다윗이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을 선택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어느 하루, 혹은 인생의 어떤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묵상에 적합할 때가 있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우리에게 묵상을 위한 이상적인 시간을 기다리느라 그저 앉아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알려 준다. 사실 묵상을 위한 가장 이상적인 시간이 사라져 갈 때, 그때야말로 가장 유용한 묵상이 가능하다. 고난과 박해 속에서 시편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고관들도 앉아서 나를 비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나이다”(시 119:23). 다윗은 집에서 쫓겨났으며 적에게 둘러싸였다. 어디를 둘러봐도 오로지 위험뿐이었지만, 그는 결코 묵상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시편 한편 한편을 보면, 다윗은 다른 모든 것은 다 포기했지만 하나님을 향한 집중된 애정을 바탕으로 그분을 더 생각하고 기도하는 그 시간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내일 아침 일어나 말씀을 통해 그분을 묵상할 때, 하나님은 단지 당신을 만나고, 당신으로부터 이해받고, 또 찬양을 받기만 하는 분으로 존재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으로 하여금 그분을 이해하고 찬양하도록 도우신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 진정한 묵상은 자신을 의지하려는 욕망을 죽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조차도 은혜가 없다면 하나님의 지혜를 대적하고 불쾌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펼칠 때마다 강하고, 똑똑하고, 또한 독립적인 사람으로 서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시편 저자처럼 기도해야 한다.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시 119:27). 우리가 집중된 애정과 기도에 의존해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신다. 또한 사라지지 않는 상처에 대한 위로와 치유, 끈질긴 죄로부터의 독립, 힘든 상황과 관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그 아름다움을 다시 맛보고 누리는 경이로움을 허락하신다.하나님이 직접 우리의 묵상을 인도하실 때 나와 당신은 로버트 맥체인(Robert Murray McCheyne)처럼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내 영혼이 그토록 사모하는 그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을 만날 수 있는데, 그 누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을까요?”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은 우리 곁에 앉아 계시고, 또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묵상한다. 내 영혼이 사랑하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묵상을 허락하시고, 또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그분 자신을 내게 드러내신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I Will Meditate on You in the Morning번역: 무제
영성
묵상과기도
아침마다
하나님을묵상
다윗왕
로버트맥체인
사모
율례
철저하게 부활에 소망을 둔 삶
by John Piper
2019-08-31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15:30-32).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15:20).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 삶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는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택한 삶이 정말로 불쌍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터무니없었을 우리들의 삶에, 인내하며 행하도록 힘을 부여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 이에 대한 믿음이었다. 예를 들면, 바울은 그가 기꺼이 경험한 평생의 모든 위험에 대해 그것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고후 11:26).그 다음으로 그는 자신의 ‘자기 부인’의 정도를 생각하며 “나는 매일 죽노라”라고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하신 말씀을 바울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바울이 “나는 매일 죽노라”라고 했을 때 쾌락적인 욕망에 대해 죽는다는 뜻을 말하고 있다고 본다. 하루도 어떤 욕망을 죽이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말이다. “[전략]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3-28).또 그는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운’ 일을 떠올린다. 우리는 그가 의미하는 ‘맹수’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 베드로후서 1장 10절과 유다서 10절에서는 복음을 반대하는 어떤 부류를 ‘맹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지 그것은 우리를 완전히 낙담시키는 것들이다.“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고후 1:8).그래서 바울은 그가 잦은 위험에 노출되고, 맹수로 인해 매일 싸우며, 죽음의 위협 속에 있었기에, 부활이 없었으면,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선택한 삶은 어리석고 불쌍한 삶이었을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때만 이 고난이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그는 만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고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두 식충이가 되고 술고래가 되자는 의미이다. 부활이 있든지 없든지 그들은 불쌍하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부활이 없으면, 적절히 절제하는 삶이나 거기에서 벗어나 최대한 세상 쾌락을 즐기는 것이 모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바울이 선택하고 있는 것은 세상 쾌락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고난을 택한다. 그 고난은 그가 순종을 택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했을 때, 아나니아는 주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을 바울에게 전해 주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6). 바울은 그의 소명의 일부로 ‘고난’을 수용했고, 그는 고난 받아야했다. 바울이 이것을 어떻게 행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철저한 순종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그 대답은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나온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고 나는 그분과 함께 살아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한 고난은 아무 것도 헛된 것이 없다(고전 15:58)”라고 생각하고 순종했던 것이다.부활에 대한 소망은 바울의 삶의 방식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그것은 그를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에 얽매이지 않도록 해방시켜 주었다. 그 소망은 많은 사람들이 이생에서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느끼는 것들 없이도 행할 수 있는 힘을 그에게 주었다. 예를 들면, 그가 결혼할 권리를 가졌음에도(고전 9:5), 수많은 고난을 감당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즐거움을 포기했다. 그는 부활 때문에 그 즐거움을 포기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소망이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킨다’고 말씀하신 것도 이 점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집에 초청하라고 했다. 이로 인해 우리가 어떻게 동기를 얻을 수 있을까? 예수님은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 14:14)라고 말씀하셨다.이 말씀은 현재 우리의 삶이 부활의 소망으로 형성되었는지를 잘 살펴보라는 철저한 부르심이다.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 이생에서 얻을 것을 기초로 하는가, 아니면 내생에서 얻을 것을 기초로 하는가? 부활이 있어야만 오직 지혜롭다고 설명될 수 있는 사랑을 하기 위하여 위험을 감수하는가?우리의 몸이 노화될 때 낙담하여 어떤 것들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시인하는가, 아니면 부활을 바라보며 용기를 내는가?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 우리의 겉사람은 쇠약해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매일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의 무게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고후 4:16-17).우리 모두 한평생 부활의 신앙을 소유하며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을 살아 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Radical Effects of the Resurrection번역: 정은심
복음
부활
소망
환난
쾌락
즐거움
고난
평범한 그리스도인 가족의 아름다움
by Tedd Tripp
2019-08-30
성인이 된 아들이 최근 내게 가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요약하자면, 전통적인 가족의 모습은 이제 그다지 경쟁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계속 지켜질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다. 오늘날, 평범한 크리스천 가족은 거의 사라져 가고 있고 또한 현대 문화는 가족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있다. 동성애 가족, 부부 관계의 창조성과 다양성에 대한 합의, 일부다처제를 수용하라는 압박 등과 같은 문화적 현상들에 의해 전통적이고 평범한 크리스천 가족의 정체성은 흔들리고 있다. 부모는 사랑으로 자녀를 낳고, 남녀는 결혼 관계 안에서 함께 살아야 하며, 부부는 경건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에게 안정감을 주기 위하여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더 이상 문화적으로 이상적이지 않게 보인다. 보통의 크리스천들이 비범한 복음의 은혜로 말미암아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이룬 가정, 우리는 이를 평범한 기독교 가족이라고 부른다. 물론 가족이 두 명의 부모로 이루어진 가정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한 부모 가정의 크리스천들 역시 동일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많은 조부모들이 그들의 손자,손녀들을 담대하게 키우고 있다. 내 며느리의 친정 어머니는 홀로 세 자녀를 키우셨으며, 그 자녀들은 이제 크리스천 성인이 되어 자신의 자녀들을 키우고 있다. 그녀는 성경적 가족의 규범을 자녀들에게 계속 상기시켜 주었다고 한다. “네 아버지가 있었으면 이것을 했겠지만, 아버지가 없으니 내가 하는 거란다”라고 말이다. 비록 남편이 부재하지만, 그녀는 자녀들이 가족 안에서의 남편과 아버지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도록 가르쳤다. 가족의 역동성에베소서 5장은 평범한 기독교 가족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이 본문에 의하면, 남편은 사랑의 리더십을 행하도록 부름받았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 목회 사역을 아버지의 자격에 빗대어 설명한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신이 겪는 고된 일과 어려움을 말하면서, 그가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가르친 이유는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사용한 그 아버지 은유는 경건한 리더십을 알게 하는 놀라운 도구였다. 바울은 자신의 목숨을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내려놓았다. 경건한 권위는 다른 사람을 종으로 삼을 때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으며 상대방을 섬길 때에 나타난다. 에베소서 5장에서는 아내의 모습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복하듯이 아내는 남편의 리더십 아래에서 살아간다. 아내는 남편이 가족의 지도자로 성공하도록 돕는 역할을 담당한다. 머리로 존재하는 다른 사람의 지위에 자신의 삶을 종속시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에베소서 5장은 이를 평범한 크리스천 아내의 부름받은 모습이라고 표현한다. 궁극적으로 아내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남편의 권위 아래에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을 가져다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하나님은 에베소서 6장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그들에게 순종하는 자녀는 잘되고 장수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현명한 부모는 자녀들에게 순종의 필요성을 잘 이해시킨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독려하면서, 이는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부모의 권위를 주셨기 때문임을 설명한다. 즉 자식은 부모의 요구 때문에 그들을 공경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순종을 실천해야 한다. 부모님께 순종할 때, 자녀들의 삶은 잘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 순종을 보시고 자녀들에게 복을 주신다. 어린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방식을 진리로 수용하는 모습은 무척 아름답다. 나의 평범한 손자,손녀들이 그들의 부모를 기뻐하며 또한 부모가 현명하게 정해주는 경계선을 사랑의 권위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내게 큰 기쁨이다. 나는 최근에 내 손자들이 그들의 아빠와 나눈 짧은 대화를 들었다.첫째 아들(사춘기): 아빠, 커피 마셔도 돼요? 아빠: 물론이지.둘째 아들(십대 초반): 나도 마셔도 돼요?아빠: 아니, 아직은 안 돼.둘째 아들: 아빠, 불공평해요. 왜 형은 마셔도 되고 나는 안 돼요?아빠: 아들아, 아빠의 역할은 가정을 공평하게 이끄는 것이 아니라 현명하게 인도하는 거란다.이 대화는 짧고도 유쾌한 상호교환이었다. 그리고 둘째가 아빠의 판단을 불평 없이 수긍했기 때문에 나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는 이 대화를 통하여 아버지의 권위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웠다. 언젠가 그도 아버지로서 친절하고 현명한 권위를 가지게 될 것이다. 관계의 역동이 성경적 질서로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 가족에게는 세 가지 소명이 생긴다. 즉 가족은 신학과 사회성 및 복음을 배우는 학교가 된다. 신학을 배우는 학교평범한 크리스천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다음의 두 계명으로 요약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막 12:30-31).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평범한 크리스천 가족의 삶에 대한 훌륭한 묘사이다. 신학을 배우는 학교로서의 가족은 첫 번째 계명에 잘 묘사되어 있다. 가족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놀라움에 매료되는 공동체이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심오한 감각을 아이들에게 심어 주는 장소이다. 시편 기자는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시 145:4)라고 기록했다. 당신의 가족은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가? 이에 대해 시편 145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행위를 입으로 말하는 것, 그분의 위대하심을 선언하는 것, 그분의 풍성한 선하심의 명성을 쏟아 놓는 것, 그분의 의로우심을 노래하는 것,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알리는 것, 그분의 친절하심을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송축하는 것(시 145:4-20)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선하심을 읊조릴 때에,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가족 안에 심어진다. 아이들은 개념적인 공백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기뻐할 수 없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면, 그들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행복해진다. 가족은 신학을 배우는 학교이다. 사회성을 배우는 학교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은 두 번째 명령이다. 이는 가족의 책무이다. 가족 생활은 다른 사람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놀라운 기회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가정은 관계적 갈등이 가장 크게 일어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4장은 관계적 갈등을 질문의 형식으로 언급한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4:1). 우리는 보통 갈등의 이유를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다. “그가 나를 너무 화나게 한다” 혹은 “그녀가 내 실수를 보며 비웃었다”와 같이 말이다. 야고보는 갈등의 이유를 우리 자신에게서 찾으라고 권면한다. 그에 따르면, 관계적 갈등은 우리 안에 있는 정욕과의 싸움에서 온다. 우리 내부의 열정과 욕망이 갈등을 야기한다. 가정은 그 내적 욕망이 전쟁을 벌이고 다른 사람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통찰할 수 있는 장소이다. 즉 가정은 자기애의 추함을 밝힐 수 있는 장소이다. 이와 동시에 가족 생활은 다른 사람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의 훌륭함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가족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추구하는 법을 배우는 훌륭한 공동체이다.가족 간의 갈등은 때때로 가족의 책무를 이행하며 살아가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하지만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가족의 갈등은 이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통하여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도록 돕는다. 가족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장소이다.복음을 배우는 학교마지막으로, 평범한 크리스천 가족은 복음을 배우는 학교이다. 즉 크리스천 가정은 복음의 은혜를 현실에서 삶으로 나타내는 장소이다. 사랑으로 함께 살아가고자 노력할 때 생기는 갈등은 우리가 복음의 은혜를 매우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점을 일깨운다.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셨고, 또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기 위해, 즉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충족하기 위해 죽으셨다. 지금도 그분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그리고 용서받은 사람들로 살아가도록,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나와 당신을 하나님께 중재하신다. 평범한 크리스천 가족은 완벽한 장소가 아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또한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하여 상처를 입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녀들도 죄를 지으며,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 상처를 입는다. 많은 경우, 우리는 인간의 지혜로 갈등을 해결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복음에 근거하지 않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당신은 갈등을 통해 얻는 유익을 잃게 된다. 가족 생활에서 생기는 피할 수 없는 갈등은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엡 4:32)하신 것처럼 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를 제공한다.자신들도 열망과 욕구로 노략당한 죄인임을 아는 부모는 자녀의 죄에 공감할 수 있다. 죄의 문제와 복음의 은혜 및 능력을 아는 부모는 죄를 지은 자녀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도울 수 있다. 죄인으로서 은혜를 경험한 부모는 자녀에게 복음의 능력과 은혜를 전할 수 있다. 크리스천들은 가족을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은혜로 함께 성장하며 사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크리스천 가족은 이상적인 세계 속에 존재하는 추상적 개념의 대상이 아니다. 평범한 크리스천 가족은 보통의 사람들이 그들의 목숨을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내려놓을 때에만 존재한다. 그러한 가족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와 아름다움을 강력하게 설득하는 힘이 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Ordinary Christian Family번역: 정은심
가족
역동성
에배소서
신학
사회성
사랑
가족의책무
복음
우울증과 씨름하는 목회자
by Mark Meynell
2019-08-29
내가 항우울제를 복용한다는 사실을 성도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렸을 때, 가깝게 지내는 교인 한 명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나에게 우리 교역자 중의 한 사람이 정신 건강이 좋지 못하여 투쟁하고 있다고 말했다면, 나는 결코 그 사람이 당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예요.” 나는 항상 스스로의 문제에 대해 명백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는 착각에 불과했다. 나는 목회라는 가면의 그림자에 숨어 때로는 밤늦게까지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다만 그 가면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또한 나는 목회자가 정신 건강 문제로 씨름하는 상황을 교회에 알리는 것이 오히려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목회자도 우울해진다많은 사람들이 목회자는 우울해지면 안 되는 것처럼 여긴다. 진정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한가?그렇다.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그 무엇도 정신 질환을 막지는 못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다윗왕과 그 외의 시편 기자들, 엘리야와 예레미야, 그리고 바울의 영적 상태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성경의 위인들과 마찬가지로 마틴 루터(Martin Luther)와 존 칼빈(John Calvin), 그리고 스펄전(C. H. Spurgeon)과 루이스(C. S. Lewis)도 그들의 영적 상태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경험을 종종 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많은 목회자들이 우울증을 경험한다. 그에 대한 증거와 증언들은 명백할 뿐만 아니라 넘쳐흐른다. 목회자들도 성도들이 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이나 이와 유사한 정신 질환으로 씨름하고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정신 질환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25%에 달한다고 한다. 목회자는 이들과 달라야 한다는 법이 어디에 존재하는가? 사실, 우울증을 겪는 목회자의 비율이 비목회자로서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들의 비율보다 더 높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비록 목회 사역은 보람과 기쁨을 안겨 주지만, 때때로 이는 외롭고, 스트레스가 되며, 또한 목회자를 비현실적인 기대 안에 갇히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목회 사역은 결코 끝이 없다. 특히 목회자들은 위기 중에 있는 사람들을 주로 돌본다. 하지만 그들은 이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하지도, 전능하지도, 지치지 않는 체력을 부여받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힘들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목회자들은 낙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러한 어려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다. 공유 딜레마공적 사역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민감한 약점에 대해서 지나치게 공유하는 것과 성스러운 완벽함의 가면을 쓰는 것 사이에서 그들 나름의 적절한 경계선을 찾아야만 한다. 공유 범위의 두 축에는 오류와 위험이 분명히 존재한다.초보 목회자는 사적인 문제를 성도들과 지나치게 공유한다. 그러나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항상 자신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당신이 지금 무엇과 씨름하고 있는지에 대해 속속들이 알 필요도 없다. 목회자 및 그 가족들의 사생활은 보호되는 것이 좋으며, 이를 완전히 개방하는 것에는 위험이 따를 수 있다. 최근 나는 장로들이 목회자 부부에게 말하기 힘든 마음 속의 고통을 자신들과 나누어도 된다고 확신시키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실제로 장로들에게 사적인 고민을 나누었다. 그러나 두 주 후, 그 목회자는 해고당했다. 많은 목회자들은 아무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거나 혹은 아주 가까운 소수의 사람에게만 연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우울증이나 다른 여러 어려움을 숨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두 가지 문제를 만든다. 첫째, 성도들은 목회자가 보통의 사람들보다 고상한 존재라고 착각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성도들은 잠시 동안은 목회자를 인상적으로 볼 수 있지만, 그들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면 실망과 절망 속에 갇히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목회자는 너무 고상하기 때문에 성도들의 인간적인 문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더이상 목회자의 말을 경청하지 않게 된다. 둘째, 성도들은 은폐된 사항을 추측할 수 있다. “그 목회자가 사실은 그렇게 훌륭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측은 성도들이 목회자는 위선적이라고 믿기 시작하는 출발점이 된다. 그 결과는 어떠할까? 성도들은 더이상 목회자의 말을 듣지 않게 된다. 마음을 여는 목회자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지혜롭게 마음을 여는 것이 좋다. 하지만 과연 정신 건강에 대해 알리는 것도 좋은가? 우리는 (너무 자세하지 않게, 그리고 가까운 몇 명의 친구들과) 영적 싸움과 유혹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우울증을 시인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가 상황과 자신감에 기초하여 이러한 사안에 대해 마음을 열면, 이는 성도들에게 여러 이유로 큰 유익이 될 수 있다.첫째, 개방성은 교회를 건강하게 만든다. 내가 올소울즈교회(All Souls)에서 우울증에 대해 처음 설교했을 때, 성도들의 반응은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정신적인 문제로 아파하는 목회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그들은 여전히 목회자가 자신들의 문제를 다루어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다수가 아닌 소수의 사람들만 그러한 바람을 드러냈다. 그 설교가 불러온 가장 의미 있는 현상은 많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이제 나도 스스로의 아픔을 시인할 수 있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즉 목회자의 개방성이 그들에게 나 역시 마음을 열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주었다. “목회자가 자신이 겪는 문제를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겠네”라고 말이다. 교회 공동체는 상심한 상태의 연약한 사람들이 자신의 취약한 모습을 공개해도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둘째, 개방성은 냉소적인 세상을 향한 증언에 필수적이다. 비록 이는 정교함이 요구되는 일이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빙빙 돌려 말하거나 허세 부리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인간의 연약함을 부인하듯 살아가는 지도자들의 모습은 종교 기관을 향한 사람들의 의심을 확증할 뿐이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인 거룩한 성배, 즉 ‘진정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삶의 복잡성과 의문들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이다. 상처를 이기고 사역하는 목회자는 TV 진행자와 같은 매끄러운 진행 능력을 보이는 목회자보다 더 큰 힘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줄 것이다.정답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우울증을 겪는 목회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 그들이 씨름하고 있는 것들을 성도들과 나누어 보라고 말이다. 그렇게 할 때에, 당신의 진실성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hould Pastors Admit They Struggle with Depression?번역: 정은심
목회
난관
정신질환
경계선
우울증
마틴루터
존칼빈
스펄전
루이스
고통 중 병원 대기실에서 만난 하나님
by Elizabeth Reynolds Turnage
2019-08-28
쿵, 쿵… 나는 조심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혹시 대기실에 있는 다른 사람이 내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듣는 건 아닐까? 고작 4일 전에, 이비인후과 의사는 충격적인 소식으로 우리의 삶을 뒤흔들었다. 겉으로 보기에 건강하기만 하던 22살 아들이 뇌종양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3일 전, 동네 병원에서 서둘러 찍은 MRI는 뇌종양을 확진했다. 이틀 전, 우리는 이 소식을 다른 가족에게 전했고, 어제는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선포하는 예배에서 찬송을 부르면서 흐느꼈다. 그리고 지금, 아들은 이 지역의 가장 뛰어난 종양 센터에서 길고 긴 한 시간 동안의 정밀 검사를 받고 있다. 당신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는가? 건강에 심각한 이상이 발생하여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었던 적이 있는가? 당신은 아니더라도, 아마도 주변의 가까운 누군가는 가슴이 마구 뛰고 속은 메슥거리는 가운데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을 견디며 병원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면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속에 “만약에”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만약에 암이면 어떡하지? 만약에 직장을 잃으면 어떡하지? 만약에 손주를 안지도 못하면 어떡하지? 만약에 우리 아들이 죽으면 어떡하지?”이런 생각은 심각한 건강 문제를 겪는 환자 자신과 그 가족의 평안을 한순간에 뒤흔든다.아들이 뇌종양 진단을 받은 때에 83세이신 내 아버지 또한 4기 전립선암 진단을 받으셨다. 나는 아버지뿐 아니라 아들까지 간호해야 할 상황을 맞은 것이다. 지금껏 병원 대기실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낸 나는 복음이 주는 희망을 만나고 다시 또 만나는 경험을 했다. 건강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초조한 가슴을 가라앉히고 다시 평안과 희망을 찾도록 만든다.1. 이 세상에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것은 없다복음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21세기의 주된 세계관, 즉 삶의 평안은 개인의 자유와 주체적인 관리에 달려있다는 생각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성경은 우리가 주님 안에 속할 때에만 평안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세 번째 뇌 수술이 끝나고 아들은 바로 이런 평안을 고백했다. 아들은 자신이 겪은 고통스러운 치료 과정을 문병 온 사람들과 나누었다. 종양 제거를 위한 두 번의 수술, 그리고 종양이 감염되어서 치러야 했던 세 번째 수술. 그 세 번째 수술에서 두개골의 일부까지 제거되었다. 뼈가 사라진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착용한, 독특한 소재로 만든 회갈색의 헬멧을 보며 아들과 방문객들은 같이 웃었다. 만약 뇌종양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면, 그건 바로 우리 아들일 것이라고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이 말씀하셨다. 이는 다름 아닌 우리 아들이 보여준 놀라운 용기를 뜻했다. 그러나 곧 웃음은 사라지고 침묵이 찾아왔다. 바로 그때 눈물을 머금은 아들이 천천히 말했다.“그 어떤 것도 나로부터 예수님, 내 가족, 그리고 내 친구들을 떼어놓을 수는 없어요.”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고 죽음이 눈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낼 때조차도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롬 14:7) 그리고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는 말씀을 사실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평안과 평화 그리고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다.2. 하나님은 내 머리칼 하나하나를 셀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병원 대기실에 있던 첫째 날, 가슴이 미칠 듯이 뛸 때 내 마음은 온통 “만약에”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아들의 머리카락, 항상 단정하게 머리를 빗던 아들이 수술 때문에 머리카락을 뭉텅 잘라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바로 그 무서운 “만약에”의 생각이 떠오른 직후, 나는 하이델베르크 신조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최근 공부했던 내용을 기억했다. 그것은 바로 머리카락 한 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과 이 모든 과정은 결국 나의 구원을 위해 모두 협력한다는 사실이었다.건강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평화와 희망은 오로지 하늘 아버지가 인자한 왕이며 또한 그의 자녀들을 사랑으로 보살핀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만 누릴 수 있다(마 10:29-31).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용서함을 받았다대기실에 앉은 사람들이 깊은 후회와 죄책감을 느끼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불치병을 선고받은 환자도 동일한 후회를 느낄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런 환자를 간호하면서 분노와 함께 좌절까지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일수록 용서야말로 우리가 더욱 기억해야 할 참된 복음이다. 암 전문의 대기실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던 어느 날, 나는 너무도 화가 났다. 얼마 전 아들을 간호하기 위해 아버지와 잠시 떨어져 있는 동안, 아버지는 분명히 자신의 상태가 아주 좋다고 내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쓰는 대기실에서 내가 그토록 성이 났던 이유는 바로 아버지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그렇게 거짓말을 하셨기 때문이다. 내 분노는 아버지로 하여금 죄책감과 미안함을 유발했다.감사하게도 아버지는 화를 내는 내 모습을 용서했고, 나 역시 거짓말을 해서라도 나를 안심시키고자 하셨던 아버지를 용서했다. 우리에게 평화과 희망을 가져다 준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에베소서 1장 7절의 말씀이 전하는 진리였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4. 예수님이 가까이 계신다예수님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은 대기실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불확실성에 평화와 희망을 가져다준다. 그분의 가까움이 지닌 두 가지 속성은 힘든 시간을 참을 수 있게 하는 힘이 된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상한 마음을 가까이 하신다(시 34:18). 다시 말해 그의 가까움은 우리의 좌절을 달래 준다. 그분의 가까움은 오로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놀라운 평화로 우리를 감싼다.갑자기 닥친 아들의 세 번째 수술은 대기실에 앉은 나를 고독과 절망에 빠뜨렸다. 행여 아들의 뇌 전체가 전부 감염된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의 심장은 너무도 요동쳐서 손목에 찬 디지털 시계가 내게 숨을 제대로 쉬라고 경고 메시지를 보낼 정도였다. 나는 곧 이어폰을 꺼내서 찬송가를 들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달콤한가…” 그 가사를 음미하는 내내 예수님이 주신 평화가 나를 감쌌다. 어머니가 보채는 아기를 달래듯 찬송은 그렇게 내 마음을 달랬다.두 번째로 빌립보서 4장 5절의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를 히브리어로 해석하면, 이는 곧 있을 주님의 재림을 의미한다. 대기실에서 느끼는 긴장과 초조함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언젠가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모든 부서진 머리와 가슴 그리고 수족을 새롭게 만들 때(계 21:5),우리의 가장 깊은 희망은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 그 날,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속에 거하실 것이고 우리는 실로 완전하고 영원한 평화를 맛볼 것이다. 혹시 당신은 지금 이 순간 병원 대기실에서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그렇다면 좌절하지 말라.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 그날을 상기하면서 평화와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애초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셨던 온전한 모습으로 서게 될 바로 그날을 기다리면서,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을 온전히 또한 영원히 누릴 그날을 기다리면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희망을 누리라.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Finding God in the Anxiety of the Waiting Room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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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사도 중 가장 작은 자
by Jerry Bridges
2019-08-27
신약성경은 교리와 이야기를 통해서 약 스물여섯 가지에 달하는 기독교인의 특성을 알려 준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 사랑 그리고 겸손, 이 세 가지는 그 어떤 특징보다 자주 언급된다. 공감, 친절, 온유함 그리고 인내 등등 그 외의 다른 모든 특징들은 사실상 사랑과 겸손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따라서 이 세 가지 특성에만 초점을 맞추어 사도 바울을 바라보아도, 우리는 그에 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자. 그는 빌립보서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사도직을 수행하는 가운데 견디어야 했던 엄청난 고난 속에서, 바울에게는 자신이 설교한 내용을 실천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있었다. 이 유명한 구절도 그가 로마에서 투옥되었을 때에 썼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서를 쓰기 여러 해 전에 이미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복음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또한 투옥되었다(행 16:16-40).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런 심각한 상황은 당연히 엄청난 두려움을 가져다주기 마련이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25절).그들이 무슨 기도를 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이 사건의 전체적인 의미를 유추해 볼 때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겪을 만큼 자신들이 가치가 있는 도구로 사용된 것에 대하여 감사했고, 동시에 이런 힘든 상황조차도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사용되도록 기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말 그대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다.투옥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뻐한 바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러한 사건이 벌어지기 7-8년 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썼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 즉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었다(마 10:29;눅 12:6). 그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었고 존재의 중심에서부터 붙잡았다. 하나님을 향한 바울의 신뢰는 다름 아닌 그분의 선하심과 주권을 신뢰하는 믿음에 뿌리는 두고 있었다. 또한 바울이 보여준 겸손의 근원은 바로 그가 가졌던 신학이다. 애초에 바울은 겸손하게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이 아니다. 사도행전을 통해 처음 만나는 그는 오만하고 아집에 찬 바리새인이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 감옥에 보내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행위를 살펴볼 때, 우리는 그의 타고난 강하고 거친 성품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엄청난 경험조차도 그의 기본 성품을 바꿀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뒤따르는 이야기에서 달라진 바울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다메섹 회당에서 그분을 담대하게 전한다. 또한 몇 년이 지나고 고린도 교회가 심각한 도덕적 문제를 겪을 때, 그는 이를 결단력 있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뿐만 아니라 바울은 거짓 복음으로 갈라디아 교회를 훼손하려는 그릇된 선지자들을 강하게 저주하기도 한다. 그는 진정 바리새인일 때부터 보인 기존의 그 강하고 거친 성격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도로서의 삶, 그의 새로운 삶 전체를 관통한 것은 바로 겸손이다. 바울의 겸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그가 스스로를 평가한 기록이다. 서기 55년 경, 그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언급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 15:9). 이후 5년 정도가 지나고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다”(엡 3:8)라고 표했했으며, 생을 마감할 때가 되어서는 스스로를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5)라고 불렀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은 시간이 흐르며 이처럼 변화했다. 즉 그는 오만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던 바리새인에서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로 고백하는 자로 바뀌었다. 진정한 겸손함을 갖춘 사람만이 스스로를 이러한 용어로 묘사할 수 있다.도대체 무엇이 한때 그토록 교만하던 바리새인을 그리스도의 겸손한 사도로 바꾸었을까? 이는 바로 그가 이해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단지 자격없는 자에게 주는 혜택 정도로 이해하지 않았다. 바울은 자신을 자격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격이라는 단어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자로 생각했다. 바울은 자신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가장 합당한 사람임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한때 그토록 파괴하려고 했던 그 복음의 전달자가 되었다. 스스로를 사도 중 가장 작은 자라고 평가했고, 또 이어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 그는 또한 이렇게도 말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엡 3:8). 그는 자기 자신을 은혜 입은 자의 표본으로 보았고, 바로 이런 은혜의 신학이 그가 가진 겸손의 근원이 되었다. 그렇다면 바울의 생애에서 사랑은 어떠한 모습일까? 한번 더 그의 강하고 거친 성격을 상기하면, 바울이야말로 사랑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그토록 아름답게 묘사했다. 바울은 과연 삶 속에서도 그런 사랑을 보여 주었을까? 그가 네 교회에 보낸 서신서를 살펴보면, 바울은 진정 삶을 통해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다. 빌립보의 신자들에게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또 이렇게 썼다.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살전 2:7). 우리는 바울 안에서 정말로 놀라운 패러독스, 즉 역설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그의 강한 성격은 사랑과 온유를 특징으로 하는 ‘부드러움’과 놀랍도록 조화를 이룬다.물론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그나마 ‘괜찮은’ 교회였다. 따라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게 뭐가 힘드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문제 많았던 교회, 바울에게 그토록 고통을 주었던 고린도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그의 마음을 어떠한가? 바울이 이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 정말로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는 고린도 교회를 위한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2:4). 갈라디아 교회에는 또 이렇게 썼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그들에게 그토록 엄격했던 것은 바로 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과 그들의 영혼을 위한 그의 걱정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사랑을 ‘엄격한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엄격한 사랑이야말로 사랑 중에서도 가장 가치가 있다. 바울이 교회들을 향해 품은 사랑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의 사랑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출발한다. 바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자신은 그분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또한 그리스도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동일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스도가 그를 사랑하셨기에 바울은 고린도와 갈라디아 교회를 사랑할 수 있었다. 바울의 신학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굳건하게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성품은 자신의 신학을 반영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를 사랑하신 것처럼 바울도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Least of the Apostles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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